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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창작 클럽 (67) 물따뚤리 박물관 (Museum Multatuli)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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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143회 작성일 2018-12-2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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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따뚤리 박물관 (Museum Multatuli) 이야기 1
 
사공 경 / 한인니문화연구원장
 
 
물따뚤리 박물관 전경 
 
인도네시아의 유명한 시인인 렌드라는 물따뚤리가 바라 본 그 눈으로 “랑가스비뚱 사람들을 위하여”라는 시를 남기고 있다. 랑까스비뚱의 의미는 순다어로 ‘흩날려 떨어지는 잎사귀‘라는 의미인 rangkas와 ‘대나무’를 뜻하는 betung 의미가 합성된 것이다. 시적인 지역명이기도 하지만 그는 시에서 농부가 대부분인 랑까스비뚱 주민들이 그 이름이 갖고 있는 상징처럼 과거 인도네시아의 피 식민통치 기간 동안 전횡을 일삼는 관리들 때문에 어떻게 철저히 망가지고 정의가 권력자에 의해 말살되어져 갔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물따뚤리 박물관은 르박군 군청 소재지인 랑까스비뚱에 위치해 있다. Museum은 흘린 글씨로 Multatuli는 하얀 글씨 정자로 쓰여 있었다. 정자로 된 하얀 글씨는 강직했고 고결했던 그의 정신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대지 면적은 박물관, 공원, 회의실과 현관을 모두 합쳐 1,842m² 규모이다. 그 중 현관(pendopo)은 232m²이며 박물관 부지만은 220m²로 작고 단정한 박물관이었다. 박물관 지붕은 옅은 회색이며 박물관 문과 현관 기둥은 노란색이었다. 박물관 입구 벽돌 벽에 순다(Sunda)어로 “물따뚤리 박물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ilujeng Sumping)"라고 쓰여 있었다. 이처럼 박물관 외관은 지적이고 밝고 단아해 보였다.
 
박물관장인 우바이딜라 묵따르(Ubaidilah Muchtar)(이하 우바이)씨는 작은 키에 다부진 체구로 얼핏 보기에 군인 같았다. 겨자 색 인도네시아 공무원 복장이 잘 어울렸으며 르박 군을 상징하는 로고가 있는 명찰에는 교육부 공무원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는 르박의 찌세엘(Ciseel) 시골 지역에 있는 소방(Sobang)3 중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물따뚤리 독서회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열정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막스 하벨라르』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그의 안경 너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그는 2000년, 반둥교육대학에 다니던 때 『막스 하벨라르』를 처음 읽었고, 그 후 20여년을 저자 물따뚤리에 몰두하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박물관 건립에 대한 구상은 2009년 우바이씨를 중심으로 자카르타에 있는 몇몇 그의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중에는 밤방 에르유다완(Bambang Eryudawan), 인도네시아 건축가 연합(IAI), 꾸리에 수디또모(Kurie Suditomo, ‘TEMPO’ 기자), 보니에 뜨리야나(Bonnie Triyana, Historia Magazine 기자) 등이 있었다고 한다. 관련 구상을 2015년까지 거듭하다가 2016년 4월에 르박 군이 1923년에 건축한 군수 보좌관 집무실 겸 숙소로 사용했던 건물을 박물관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물따뚤리 탄생 197년이 되는 2017년 『막스 하벨라르』가 발간된 5월에 반뜬(Banten)주 르박군 랑까스비뚱에 물따뚤리 박물관 간판이 걸리고 개관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최초의 반 식민 유물을 전시하는 물따뚤리 박물관은 1828년 12월 2일 창립된 르박 군 제 189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2018년 2월 11일 정식 개관하였다.
 
우바이 관장실은 77m² 크기였다. 그의 책상 위에는 민족주의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킨 물따뚤리 혹은 『막스 하벨라르』와 관련된 서적이 30 여권이나 있었다. 그 중에는 인니어판 책표지에 <1999년 미국의 뉴욕 타임즈, 막스 하벨라르는 식민주의를 말살 시키는 책>이라고 쓰여 있고, 꽃무늬 사룽(Sarung)을 입고 끄루둥(Kerudung)으로 머리를 가린 아딘다와 물소, 그리고 사이자가 나무와 꽃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또 네덜란드어로 된 책 표지에는 2003년 최우수 도서상을 받은 책이라고 쓰여 있다. 미국 펭귄 북 고전에서 출판된 『막스 하벨라르』 표지에는 지방 관리들의 모임(Sebah)에 인니인 부하가 머리를 조아리고 보고하는 장면인데 『막스 하벨라르』 13장에 나오는 장면이다. 다른 책 표지는 물따뚤리가 석판에 그린 자화상이 그려져 있다. 또 다른 표지에는 네덜란드 식민 통치의 부패상에 대한 세계인들의 눈을 뜨게 한 책, 국민들에게 독립에 대한 영감을 준 첫 번째 책이라고도 쓰여 있었다. 독일어로 쓴 표지에는 군수의 명령에 따라 군수 경호원들이 농부의 물소를 강탈하는 장면이, 이태리어로 쓴 책 표지에는 반뜬 농민들의 일상생활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담겨져 있었다.
 
우바이 관장은 전 세계에서 46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된 물따뚤리 번역본 및 관련 서적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였고 네덜란드에서 간행되는 물따뚤리 관련 간행물에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고 한다. 『막스 하벨라르』 안에는 몇 개의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배고픈 땅을 떠도는 농부들, 사랑하는 물소 등에 올라 탄 사이자, 호랑이가 나타나는 장면, 어린 소년 소녀, 사이자와 아딘다가 애틋하게 바라보는 모습, 물소 살 돈을 벌기 위해 바타비아로 가는 길에 땅그랑에서 초생 달을 보며 ‘나의 신부, 아딘다 3년만 기다려줘.’라고 속삭이는 사이자, 달이 뜨는 첫날 절구통에 금을 그으며 사이자를 기다리는 아딘다가 그려져 있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수백만이 다시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에 쨍쨍한 햇볕 속에 쪽배를 타고 노를 저으며 그들의 마지막 도피처 람뿡으로 탈출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아딘다를 찾기 위해 미친 듯이 람뿡 구석구석을 찾아 헤매는 사이자의 모습도 담겨져 있다.
 
물따뚤리가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 서부 수마트라, 마나도(Manado), 말루꾸(Maluku) 등 여러 지역에서 근무를 했었는데, 물따뚤리 박물관이 르박에 세워진 배경에 대한 질문에 “르박은 『막스 하벨라르』가 태어난 곳이며, 『막스 하벨라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즉 르박은 물따뚤리가 군수 보좌관으로 일한 마지막 장소이고, 또한 물따뚤리가 쓴 ‘사이자 아딘다’라는 특별한 이야기의 중심 배경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르박군에 대한 물따뚤리의 각별한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고 우바이 관장은 말했다.
 
박물관은 7개의 전시관으로 나뉘어져 각 테마에 맞는 관련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14세기부터 인도네시아 군도의 여러 지역에 진출한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의 식민 세력에 대항한 시기서부터 194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 독립, 그리고 1949년 인도네시아공화국 설립까지 인도네시아 반식민지 투쟁 운동을 르박과 반뜬을 중심으로 시대별로 보여 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 1 전시관> 에 들어가면 모자이크로 처리된 물따뚤리가 소리친다. “인간의 과제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라고. 이 얼마나 큰 울림인가. 그리고 물따뚤리 박물관과 사이자 아딘다(Saidjah Adinda) 도서관 축소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 2전시관 >은 인도네시아 식민 역사의 시작에 관한 전시관으로 전시된 선박을 보면 인도로 가는 길을 찾아 신항로를 개척하는 유럽인들의 대항해 시대(15세기 후반에 시작)를 알 수 있다. 그 결과 1498년에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발견한다.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VOC가 항해했던 선박 Prins Willem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선박의 길이는 181 피트, 폭은 14.32 미터이며 선적량은 1200톤이 된다. 1651년 인도로 첫 항해를 했고, 많은 선적량 뿐만 아니라 40개의 무기로 무장되었다. 1652년부터 1654년까지 네덜란드가 영국과 전쟁을 할 때 참전했었다. 1661년 인도네시아로 출항을 했는데, 인도양에서 태풍을 만나 난파 되었다. 또 사진으로 전시된 1608년 건조된 선박 Halve Maan는 당시 미국의 New Amsterdam(현 New York)을 발견할 때 사용했다. 모형으로 전시된 선박 De Batavia는 1628년 암스테르담에서 만들었다. 24개의 주철 대포와 많은 청동 총으로 무장하였다. 바타비아로 첫 항해를 하면서 난파 되었고 생존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계속되는 반란과 학살로 유명해졌다.
선박을 보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함께 대항해 시대로 인해 서서히 유럽인들의 식민지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전시관 >은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 식민지 역사에 관한 것이다. 전시된 향료를 보면 향료와 인도네시아 식민지 시대와의 연관을 알 수 있다. 『막스 하벨라르』와 관련 깊은 커피에 대해서도 전시되어 있다.
17세기부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VOC는 페르시아만과 홍해의 커피 무역에 관여하다가 18세기 초부터 인도네시아에 커피를 경작하기 시작했다. 1707년 당시 식민 총독은 바타비아에서 찌르본(Cirebon)까지 북부 자바 전 지역에 커피 재배를 독려했으나 저지대인 관계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서부 자바 고 지대가 커피의 주 생산지가 되었다. 동인도 회사와 지방정부 수장들과의 협력관계(검은 거래)를 바탕으로 한 값싼 노동력으로 1726년대에는 전 세계 커피 소비량의 절반이 VOC에서 나왔고, 그 중, 많은 양이 서부 자바 커피였다. 까만 커피 색깔처럼 인도네시아 인들에게는 앞이 안 보이던 시절이었다.
말 발걸이도 전시되어 있었다. 말은 강제재배 시기 때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16세기 이전, 유럽인들이 인도네시아에 도착하기 전, 이미 수마트라와 자바 지역의 야생 후추는 국제 시장에서 판매 되었다고 『인도네시아 향료 무역의 역사』라는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유럽인들이 처음 경작한 곳이 바로 반뜬 지역이다. 특히 수마트라 지역 후추는 경작지의 이름이 상표가 될 정도로 유명했다. 즉, 아쩨(Aceh), 끄린찌(Kerinci), 잠비(Jambi) 후추가 그것이다. 1772년, 후추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전체 이익의 2/3를 차지하게 되었다.
정향(Cengkeh)은 말루꾸(Maluku)가 원산지인 향료이다. 말루꾸 중에서도 떼르나떼(Ternate), 띠도레(Tidore), 모띠(Moti), 그리고 마끼안(Makian) 산이 유명하다. 정향은 유럽인이 오기 전에 아랍, 중국 상인에 의해 이미 유럽에 알려졌다. 그리스의 트리예(Trye)와 이태리의 베네치아가 유명한 향료 항구가 되었다. 16세기 이후,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그리고 네덜란드 사람들이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원산지에서 정향을 수집하기 위해 도착하기 시작했다.
 
계피는 나무껍질로 부터 얻는 향료이다. 16세기, 포르투갈 사람들은 모든 향료의 생산지인 인도로 향해하면서 향료 무역을 독점하려고 했다. 그러나 1656년부터 계피가 포함된 향료 무역은 네덜란드 사람들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스리랑카에서 1770년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경작하기 시작했다. 1825년부터 스리랑카에서 자바 섬으로 계피의 경작지가 확대 되었다. 참고로 1796년 계피 무역의 독점이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넘어 갔다.
 
말루꾸의 육두구(Pala)는 중국 상인에 의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인도 상인에 의해 서 아시아, 베이루트, 레바논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아랍 상인들은 지중해에서부터 유럽 대륙까지 향료 무역을 독점했고, 그 중심은 이태리의 베네치아와 제노아였다.
 
천문 기상학이 뛰어난 아랍 상인들 덕분에 포루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 상인들은 말루꾸에 도착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이 최초로 말루꾸를 장악했고, 그 다음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장악하게 되었다. 『반다 섬: 식민주의와 빨라제도의 여파』라는 책에서 Willard A. Hanna는 VOC는 말루꾸의 론또이르(Lonthoir), 아이(Ai), 룬(Run) 지역에 있는 어마어마한 육두구를 다른 유럽인들이 가져가지 못하게 일부러 불태웠다고 언급하고 있다. 1756년 동인도 회사의 육두구 판매액은 1백 8십만 굴덴 (gulden)을 기록했다.
 
 
 
<4 전시관 >은 『막스 하벨라르』와 물따뚤리에 관한 전시관이다. 『막스 하벨라르』는 1860년 출간 즉시, 네덜란드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1875년 수정본이 출간 되었다. 르박 지방정부는 물따뚤리 박물관의 원조 격인 암스테르담에 있는 물따뚤리 박물관에서 기증품을 받았다고 한다.
 
기증품 중에 1876년에 프랑스어로 출간한 『막스 하벨라르』는 1장~12장, 13장~20장 이렇게 두 권으로 되어 있었다. AJ. Niewenhuis와 Henri Cristafulli가 번역하였고, 1876년 파리에 있는 출판인 J. v.d. Hoeven과 E. Dentu가 로테르담에서 출간하였다. 책 표지에는 네덜란드 군대가 쑥대밭으로 만든 한 마을에서 이미 강간당해 죽은 아딘다를 보고 슬픔과 분노로 절규하는 사이자의 불타는 음성이 들린다. 사이자의 얼굴 표정에는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무게가 드리워져 있다. 깨어지는 하늘 사이로 고향 바두르가 보인다. 실제로는 람뿡이지만 책표지의 배경은 그들의 꿈이 있고, 추억이 있는 고향 바두르이다.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누렇게 바래고 책장은 낡아 있었다. 이 책처럼 지상에서의 그들의 사랑은 누렇게 바래고 슬프다 못해 아프고 낡은 사랑이었을지 모르지만 저 세상, 바두르 농촌 마을 끝에 가면 풀밭 속에 아딘다의 싱싱한 미소가 햇빛과 햇빛 사이로는 아딘다의 풋풋한 목소리가 남아있겠지.
 
전시된 다섯 질로 된 물따뚤리의 초록색 저서에는 『연애편지(Minnebrieven)』 『사상(Ideen)』그리고 그의 칼럼이 수록되어 있다. 1907년 암스테르담에서 Elsevier가 발간한 것이다. 다른 기증품으로는 물따뚤리가 거주했었던 집의 마루 도기 타일이 있는데 육각형으로 회색이었다. 이 도기 타일과 함께 검은 색 도기 타일이 암스테르담 물따뚤리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1987년 네덜란드의 사진작가 겸 기자인 Arjan Onderdenwijngard가 물따뚤리의 발자취를 둘러보기 위해 랑가스비뚱에 왔었다. 그는 두 종류의 마루 도기 타일을 발견하게 된다. 그 것을 네덜란드로 가져갔고, 2016년 네덜란드에 있는 물따뚤리를 사랑하는 모임(Multatuli Genootschap)에서 26대 르박 군수인 자야바야(Iti Octavia Jayabaya)에게 전달했다. (연임 현 27대 군수)
 
 
물따뚤리 석판화도 있었다. 1864년부터 19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 로 추정된다. 낮 시간에는 시골 여러 곳을 다니고 농민들과 어울렸으며 밤늦도록 각 보고서를 읽는 물따뚤리의 모습이 연상이 된다. 견고해 보이는 자화상을 보면 그의 외침이 생각난다.

<자바 사람들은 진정한 농부들이다. 나는 인도네시아를 사랑했다. 내 모든 능력을 다해서 / 결함이 있는데도 그것을 고발하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들은 진실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 한나라를 훔치는 것은 풍차를 하나 훔치는 것보다 언제나 더 쉽다.>
또한 물따는 네덜란드 왕에게 격정과 분노로 외친다. ‘당신의 왕국은 여기 Hindia Timur에 있는 3천만 명의 사람들이 당신 왕국의 이름으로 억압 받고, 착취당하기를 원합니까?’라고.
 
물따뚤리에 영감을 받은 인물들의 삽화도 전시되어 있다.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Soekarno), 인도네시아의 최초 여성 운동가 까르띠니(Raden Ajeng Kartini), 소설가 프람(Pramoedya), 초대 외무부 장관 아흐맛 수발조(Ahmad Subarjo), 필리핀 독립 운동가 호세 리잘(Jose Rizal)이다. 이 다섯 사람이 『막스 하벨라르』를 인용한 작품의 사진도 전시되어 있다. 이처럼 인도네시아 역사에 있어 물따뚤리는 확실한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문학가 모임인 뿌장가 바루(Pujangga Baru, 1933-1949) 등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게 된다. 『막스 하벨라르』를 통해 강제 작물재배를 강요하는 식민주의에 대한 분노와 투쟁, 그리고 파렴치한 전통과 비열한 권력, 또한 봉건제도에 대항하는 힘찬 목소리가 터져 나오게 된 것이다.
 
제 2의 물따뚤리로 불리는 프라무디야 아난따 뚜르(Pramoedya Ananta Toer, 1925-2006)(이하 프람)은 작가로서, 사상가로서, 언론인으로서 식민통치와 혁명시기와 수하르토의 독재에 온몸으로 맞선 저항적 지식인으로 ‘인도네시아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신질서(Orde Baru) 시기에도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 투옥이 된다. 40여년 동안 감옥에서도, 수용소에서도, 가택 연금 상태에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많은 문학 작품으로 독재 불의에 항거한다. 『인간의 대지』(BUMI MANUSIA)는 프람의 대표작으로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태동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정치범 수용소 부루에서 필기도구조차 지닐 수 없었던 프람이 동료 수감자에게 구술해 가며 완성한 작품이다. 봉건제와 식민지주의가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파괴하는지를 그의 작품에서 역설하고 있다.
그는 동남아 최고의 작가로 자리매김을 하며, 1981년부터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에 올랐었다. 투옥, 검열, 억압 등의 비정상적 환경에 처한 프람은 사회에서 철저히 고립되어 『작가의 망명』이라는 책도 쓰게 된다. 물따뚤리처럼 프람은 문학 작품을 통해서 투쟁하고 소통한다. 프람은 말한다. “물따뚤리를 모르는 정치인은 분명 악랄한 정치인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도네시아 역사와 인간애를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그는 1995년 필리핀 막사이사이(Ramon Magsaysay) 상과 네덜란드 Wertheim 상을 수상하게 된다.
 
 
호세리잘(1861-1896)은 필리핀의 국부로 작품에서 스페인 식민통치의 잔악상을 폭로한다. 1896년부터 필리핀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나 결국 사형에 처해지게 된다. 그는 친구인 Ferdinand Blumentritt에게 “내가 당신에게 보내는 『물따뚤리』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내가 쓴 작품보다 더 위대하다” 고 언급한 바가 있다.
아흐맛 수발조(1896-1978)는 서부 자바, 까라왕(Karawang) 출신으로 1933년 네덜란드 Leiden 대학교에서 법학석사를 취득하였고, 초대 외무부장관(1945.8.19~11.14)과 수끼만(Sukiman) 내각 시,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51.4.27~1952.4.3)
 
민족주의에 대한 인식이라는 책에서 “막스 하벨라르는 나의 폐부를 찔렀다. 책을 통해 나는 식민통치자와 그에 동조하는 인도네시아 귀족, 군수들이 얼마나 인도네시아 인민들 불평등하게 다루고 있는지를 느끼게 되었다. 나는 식민정부가 행하는 모든 행태에 대해 구역질을 느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1901-1970)는 1921년 인도네시아 국민당을 창설하였다. 1930년 네덜란드 식민 정부에 대항한다는 죄목으로 반둥에서 투옥된다. 반둥 식민 재판소 변론에서 “물따뚤리와 ‘강제경작제도' 간의 파이프는 수많은 자바인들 가슴에 꽂혀졌고, 이 파이프는 원천으로부터 물을 양수하기 위한 모터를 작동하고 있다.”고 물따뚤리의 내용을 인용하여 식민자들이 인도네시아에 행한 악행을 폭로한다.

네덜란드어를 배운 까르띠니(1879-1904)는 물따뚤리를 읽고 그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했다. 실제로, 그녀는 네덜란드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1922년 서간집 출간)에 당시 억압되어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렸고, 인도네시아인의 독립을 박탈한 식민지 통치자들에 대한 가혹한 비판이 담겨져 있다. 이처럼 물따뚤리가 추구 한 이상을 계속 구현해 나가려고 했다. 까르띠니는 후일 수하르토 대통령의 신질서(Order Baru)시대 때 강조되었던 단순한 여성권익 해방운동가가 아니라 진정한 반식민지 운동가였다. 그녀는 1904년 9월 17일 첫 아이를 출산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된다.
 
5전시관은 반뜬 주 역사관으로 중요한 사건들의 사진과 삽화가 전시되어 있다. 즉, 반뜬 지역 이슬람 연합회, 지역 인도네시아 국민당, 1926년 반뜬 폭동사건, 일제시대의 폭정 대한 증언, 바야(Bayah) 지역의 노동자 항쟁, 족쇄, 수갑, 반뜬 지역 지도, 수까르노 반뜬 방문 등에 관한 것이다.
 
19세기 반뜬 지역은 매우 낙후되었고 가난한 지역이었다. 당시 자바에서 진행되었던 경제 발전의 영향을 반뜬은 전혀 받지 못했다. 1920년까지 반뜬에는 어떤 공장도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카르타와 수마트라로 떠났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가축을 돌보고 농업에 종사했을 뿐이었다.
“많은 반뜬 사람들은 네덜란드 식민통치자들에게 항쟁의 깃발을 들었다.”고 막스 하벨라르에 쓰여 있는 것처럼 다음과 같은 운동이 일어난다.

1888년, 반뜬 찔레곤(Cilegon) 지역의 농민 항쟁의 원인은 막중한 세금 부담, 흉년, 끄라까따우(Krakatau) 화산 폭발(1883), 그리고 네덜란드 식민정부에 의해 파괴된 반뜬 왕국 복원이었다. 항쟁은 1888년 7월 9일 시작되어 30일 끝났다. 이때 네덜란드인은 17명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을 입었다. 반면, 반뜬 주민은 30명이 사망하고 11명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94명은 유배 되었다.
 
여전사 감빠란(Gamparan)은 1829년부터 1830년대까지 30명의 여성 투쟁가와 함께 식민정부에 대항했다. 그들은 식민정부의 강제재배 제도를 반대했고, 반뜬의 자신가(Jasinga), 지깐데(Cikande), 블라라자(Balaraja) 지역에서 투쟁을 전개했다. 자신가 지역 면장과 나따느가라(Raden Tumenggung Karta Natanegara)가 이 항쟁을 진압하였다. 그 대가로 그는 르박 2대 군수가 되었다. 바로 막스하벨라르에 나오는 악질 군수이다.
 
하지 와끼아(Haji Wakhia)는 세랑 지역의 부유층 출신으로 1854년 5월 3일 식민통치에 대항하다가 결국 그의 추종자 뚜바구스(Tubagus)와 함께 1856년 사형을 당한다. (2편에 계속) 
 
* 물따뚤리 박물관 / Jl. Alun-Alun Timur No.8, Rangkasbitung, Kabupaten Lebak, Banten 42312
 
 
*이 글은 '데일리 인도네시아'와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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