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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창작 클럽 (38) 차원의 문, 영웅들을 만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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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5,890회 작성일 2018-05-23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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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의 문, 영웅들을 만나는 곳
 
배동선
 
 
 
몽인시디 거리의 한식당 토박은 요즘도 많은 손님들로 넘쳐나지만 ‘교민사회 역사’란 측면에서도 일정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수많은 한식당들이 흥망성쇄를 거듭한 그 거리에서 20년 가까이, 그것도 한 차례 화재를 겪고서도 여전히 최고의 한식당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는 토박은, 수십 년간 같은 자리를 지키며 일종의 한인사회 구심점이 되었던 인근 스노빠티의 무궁화수퍼 만큼이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후 앞다퉈 주변에 들어선 한인업소들에게 이분들이 특별히 지분투자를 했을 리 없지만 그 저변과 환경을 미리 다져 놓는 데에 큰 역할을 한 것만은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대부분 저녁식사 약속이 그 동네에서 잡히게 되는 현실은 퇴근길 북적이는 뗀데안 도로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나에겐 재앙이나 다름없습니다. 특히 교통신호등 있는 통칭 ‘위자야 사거리’는 그 상공을 지나 찔레둑까지 이어지는 버스웨이 전용고가도로가 생기기 전에도, 또 그 후에도 항상 지옥처럼 밀립니다. 난 거길 지나야만 젖과 꿀이 흐르는 몽인시디 거리로 진입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물론 그 위자야 사거리가 나를 만찬의 세계로 이끄는 포탈의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선 700년의 시간을 넘나드는 차원의 문이 열립니다.
 
< Raden Wijaya > 
 
13세기 말, 전세계를 상대로 정복전쟁을 벌이던 몽골의 쿠빌라이 칸은 적도 남쪽까지 대규모 함대를 보내 동부자바의 싱가사리 왕조를 침공하고 있었습니다. 꺼르따느가라 왕은 항전의 결기를 다졌지만 모두 힘을 합쳐도 승리를 보장하기 어렵던 순간 오히려 끄디리 왕국의 자야캇 왕이 일으킨 모반에 목숨을 잃고 맙니다. 자바의 왕국들은 사상 처음 맞는 초유의 강적 몽골군 앞에서 적전분열하며 지리멸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꺼르따느가라 왕의 양자 라덴 위자야는 마두라로 피신해 와신상담한 끝에 스스로 몽골군의 앞잡이가 되어 끄디리 왕국을 멸망시키는 선봉에 서서 자야캇 왕에게 처절한 복수를 합니다. 고구려의 멸망 당시 조국을 배신하고 당나라의 편에 붙었던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이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라덴 위자야는 호화로운 승전연회에 몽골 장수들을 초대한 후 남김없이 척살하더니 동시에 본진을 기습해 몽골군 전력의 상당부분을 순식간에 파괴했습니다. 허겁지겁 퇴각한 몽골군은 심대한 피해를 복구하지 못해 결국 남방원정을 포기해야만 했죠. 이 사건으로 일약 자바의 영웅으로 등극한 라덴 위자야는 그 여세를 몰아 1299년 자바땅의 마지막 힌두 왕국인 마자빠힛 왕국을 세우고 그 시조가 됩니다. 위자야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다르마왕사 스퀘어와 그랜드 위자야 센터로 이어지는 잘란 위자야 거리는 그 라덴 위자야 왕자를 기념한 도로입니다.
 
 
 < Senopati >
 
그로부터 250년쯤 후에 자바땅에 바구스 수루붓 또는 수따위자야라 불리는 사내가 태어납니다. 그는 훗날 빠장 왕국을 무너뜨리고 1587년 마타람 왕국의 시조가 되는 ‘권능왕 스노빠티’라는 인물입니다. 그의 일생은 수많은 에피소드와 신화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가 빠랑뜨리띠스 해변에서 만난 자바섬 남쪽바다 마물들의 여왕 니롤로끼둘과의 영적 결혼을 통해 건국에 도움을 받았다는 전설은 인도네시아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가 이슬람의 아홉 선교사, 즉 왈리송오 중 한 명을 극진히 지원했다는 것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가 세운 마타람 왕국도 명실공히 이슬람 술탄국이었니까요.
 
그러나 건국한지 불과 15년 후인 1602년부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자바땅을 야금야금 침범해 식민지로 삼더니 급기야 1755년 마타람 왕국마저 멸망시키는 모습에서 낭만적인 고대사가 잔혹한 근대사로 넘어가는 변곡점을 보게 됩니다. 위자야 사거리의 오른쪽 방향인 잘란 수리요 거리는 면의전설과 일식당 오쿠조노가 있는 또 다른 사거리에서 권능왕의 이름을 딴 스노빠티 거리와 연결됩니다. 결국 두 왕국의 시조가 위자야 사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것이죠.
 
 
 < Monginsidi >
 
 
자바와 수마트라에서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946년 경 술라웨시를 포함한 동쪽 해양지대인 동인도네시아 지역은 비교적 네덜란드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특히 미나하사와 말루꾸 사람들 상당수는 네덜란드 동인도군인 KNIL에 입대하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고 그래서 수까르노의 인도네시아 정부군에게 총을 겨누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술라웨시 남부 마카사르 지역은 유독 독립열기가 뜨거워 네덜란드 특수부대가 막무가내 민간인 학살을 자행할 정도였죠. 원래 일본어 교사였던 미나하사 출신 로베르 월떠르 몽인시디는 동료들과 함께 술라웨시 시민저항군을 조직해 네덜란드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마카사르에서 한번 체포되어 고문과 고초를 겪었던 그는 우여곡절 끝에 탈출에 성공해 독립군 게릴라가 되어 최전선에서 네덜란드군을 괴롭히다가 전쟁 막바지에 또 다시 생포되는데 이번엔 운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보원이 되어 준다면 살려주겠다던 네덜란드의 모든 회유를 완강히 거부하고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공식적으로 국가의 주권을 이양 받기 불과 3개월 전인 1949년 9월 5일 총살당하고 만 것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24세였습니다. 토박 식당은 그 몽인시디의 희생을 기리는 도로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 Tendean >
 
그가 죽은 지 26년 후인 1965년 10월 1일 이른 새벽, 대통령궁 경호실 짜끄라비라와 부대 소속 병사들 20여 명이 멘뗑 소재 뜨구 우마르 거리의 나수티온 장군 자택에 난입하고 있었습니다. 공산당 쿠데타로 알려진 9월 30일 사태의 한 장면입니다. 육군사령관 아흐맛 야니 장군을 비롯한 장성 6명이 살해되거나 납치된 그날 새벽 전군사령관 나수티온 장군은 반군들을 피해 담을 넘어 옆집 이라크 대사관저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 그날 유탄에 척추가 부서져버린 막내딸 이르마는 며칠 후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사건 당시 권총을 들고 뛰어나온 부관 삐에르 뗀데안 중위를 반군들이 나수티온 장군으로 오인한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는 훤칠하고도 서구적인, 잘 생긴 젊은이었는데 말입니다. 할림 비행장 인근 루방부아야의 반군 본부로 납치된 그는 이미 잡혀와 있던 다른 장성들과 함께 극심한 고통과 조롱을 당한 끝에 처참하게 살해되었고 시신은 루방부아야의 폐우물 속에 유기되고 말았습니다. 그 사건은 수까르노에겐 끝도없는 추락의 시작이었고 수하르토에게는 권력의 정점을 향해 나아가는 디딤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헬게이트가 열려 전국에서 최소 50만, 최대 300만 명으로 추정되는 국민들과 화교들이 공산당 추종자로 몰려 학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뗀데안 중위는 사후 대위로 일계급 특진되었고 몽인시디 거리로 넘어가는 길목의 잘란 깝뗀 뗀데안은 그를 추모하는 거리입니다.
 
그래서 정체된 위자야 사거리에서 신호대기로 오래 서있는 동안 난 라덴 위자야 왕자와 권능왕 스노빠띠, 게릴라 병사 몽인시디, 그리고 뗀데안 대위를 떠올리며 그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700년의 시간을 생각합니다. 각각의 시대가 위자야 사거리에서 서로 충돌하며 그 거대한 시간적 간극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의 문을 열고 있는데 거기서 식당 가려고 불과 10분, 20분 막히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인적이 잦아든 어느 깊은 밤, 달빛이 밝을 때면 그 차원의 문에서 걸어나온 네 명의 영웅들이 호젓한 위자야 사거리에서 만나 서로에게 눈짓하며 미소짓는 광경을 꿈꿉니다. 그 회합 전, 각각의 능력있는 참모들이 챙겨 준 상대방에 대한 자료를 미리 들여다 봤다면 그들은 그렇게 만난 서로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했을 것 같습니다. 굳이 행선지가 토박이 아닐지라도 붐비는 위자야 사거리에서 어느날 꼼짝없이 막혀 있게 될 당신에게도 어쩌면 그 차원의 문이 살짝 엿보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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