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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창작 클럽 (144) 사적(私的)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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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0,095회 작성일 2020-06-25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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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私的)인 편지
  -인니에서 나고 자라서 떠나갈 나의 딸에게
 
조현영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나 인도네시아 땅을 밟고 자란 나의 딸아,
엄마 품에서 인도네시아의 푸름 속에서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주어 고맙다.
 
나면서부터 두 개 언어를 말하고 들어온 딸아,
어떤 언어로 어떤 말을 하든 그 말에는 선한 뜻을 담거라.  
 
아파트 로비에서 유모차 동기를 만나고 함께 걸음마를 떼던 딸아,
그렇게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나아가는 것임을 기억하거라.
 
오빠의 세발 자전거 뒤에 타고 신나게 동네를 누비던 딸아,
어느날 세발 자전거 운전석에 앉아 있더구나. 차근차근 하나씩 배우며 겸손을 알고 발전하는 모습을 응원한다.
 
유치원 소풍 때 카메라 앞에서 아주 그럴듯하게 모델 포즈를 취하던 딸아,
TV에서 봤던 모델을 따라한거라고 별일 아니란 듯 말했지. 그때 엄마는 알았다. 네가 모델이 될 줄 .. 아니, 너의 남다른 눈썰미와 관찰력. 그 재능이 네 삶을 다채롭게 하는데 쓰였으면 좋겠구나.
 
엄마에게 고운 꽃반지 만들어 주던 딸아,
이제는 빛나는 돌이 박힌 반지를 준비하거라. 하지만 꽃반지를 엮던 그 감성은 오래 간직하렴. 네가 살아가는 세상이 더 따뜻해질테니.
 
친구가 놀린다고 엄마에게 울며 일러바치던 딸아,
네가 어른이 되어도 너를 괴롭히는 자가 있다면 언제라도 엄마에게 일러바치거라. 힘든 일일수록 나누어야 할 것이며 엄마는 나이가 들어도 너의 든든한 빽임을 잊지 말아다오.
 
새끼 밴 길냥이를 살뜰이 거두어 주던 딸아,
자신보다 약자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엄마에게도 그 다정함을 조금만 나눠주겠니. 엄마도 자식 앞에서는 약자란다.
 
인형뽑기 기계를 집에 들이고 전용 비행기를 사겠다며 눈을 반짝이던 딸아,
그날 이후 엄마의 꿈도 바뀌었다. 너의 집에서 뽑은 인형을 들고 네 전용 비행기에 오르는 꿈으로.
 
엄마 얼굴보다 거울을 더 자주 보며 자기가 못생겼다고 투덜대던 딸아,
자꾸 못생겼다고 말하면 진짜로 못나진다고 엄마가 진부하게 말했었지, 하지만 그건 정말이란다. 못 믿겠으면 어디한번 해보렴. 말하는대로 이루어지더라.
 
엄마가 옷 차려 입고 엄마 괜찮은지 물어보면 1초만에 대답하던 딸아,
엄마도 1초 서운하단다. 엄마도 여자라는 걸 너는 아직 모를 때지. 사실은 엄마도 그랬었다. 반성한다.
 
속마음을 얘기하며 울먹이던 딸아,
묻어뒀던 속마음을 얘기할 때는 엄마도 눈물이 난다. 우리 가끔씩 속마음은 털어내며 살자.
 
딸이라고 무조건 이쁘다고만 하지 말고 객관적인 엄마가 되라던 딸아,
너도 딸 키워보면 알게 될거다. 안 이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걸.
 
인도네시아를 곧 떠나갈 딸아,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난 것은 너의 선택이 아니었으나 앞으로 펼쳐질 선택과 결정은 온전히 너의 몫이 되겠구나. 다양한 선택지를 찾고 어떤 결정이든 그 기준은 너의 행복이어야 한다.
 
인도네시아에서 몸에 익힌 여유로움으로 나와 다른 이들의 다양성을 수용하고, 인도네시아에서 느낀 결핍은 한국의 스마트함으로 채우며 너를 성장시키거라.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걱정을 할 시간에 미래에 일어날 너의 꿈을 위해 ‘지금-여기(Here&Now)’에 투자하기를 바란다.
 
너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너’여야 하고 그 다음으로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엄마이기를.
유쾌함을 잃지 말며 긍정 에너지로 곧 펼쳐질 너만의 세상에서 또한 반짝이기를.
 
2020년 6월 끝자락에
너를 두번째로 사랑하는 엄마가.
 
 딸이 엮어준 꽃반지 (사진=조현영)
 
*이 글은 '데일리인도네시아'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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