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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창작 클럽 (139) 로소, 미안해. 정말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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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7,109회 작성일 2020-05-18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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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소, 미안해. 정말 미안해!
 
 
사공 경(한인니문화연구원장)
 
바틱 작업장인 ‘바틱 로소(Batik Rosso)’ 에 천연염색 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색색의 다양한 문양은 여러명의 무희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작업장 뒤쪽에 펼쳐진 논밭에는 전형적인 자바 풍경이 평온하게 펼쳐져 있었다.
 
1995년부터 직물박물관에 다녔던 나는 박물관 직원인 아리(Ari)와 여행도 하며 가까이 지냈다. 아리는 바틱을 좋아하는 나를 좋아했다. 아리는 족자에 가면 구루 사공이 만나야 할 바틱 예술가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로소(1970~2014년)는 족자의 전통문화를 지키는 바틱 천연염색 예술가였다. 바틱 예술세계에서 주목 받는 그는 천연염색 예술세계에서는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다양한 천연색깔과 문양을 타이-다잉(Tie-Dying)과 바틱기법을 콜라보로 만들기도 했으며, 바틱 만드는 과정을 춤으로 형상화하기도 한 춤꾼이기도 했다. 또한 가믈란 연주, 다양한 패션 디자인으로 유명했다. 문화보존 영역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아 일본·태국·인도 등에서 족자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국제적인 상을 여러번 수상하였다. 특히 2010년 태국 방콕에서 아세안 국제 실크 콘테스트에서도 우승하였다.
 
<패션쇼 피날레에서 모델과 함께 한 로소 /출처: youtube >
 
내가 로소를 처음 만난 것은 그의 작업장에서였다. 작업장의 뻔도뽀(pendopo)에는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고 정원에는 다양한 과일 나무가 있었다. 정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2층 높이에서부터 지상까지 높게 혹은 낮게 펼쳐져 있는 젖은 바틱 천은 바람이 불때마다 흔들렸다. 햇빛에 빛나는 바틱 천은 밝은 옷을 입은 무희의 아름다운 움직임처럼 보였다. 다채로운 색의 드레스를 입은 무희들의 우아한 움직임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떤 무희는 하늘을 닮은 인디고색을, 어떤 이는 땅을 닮은 황색을, 어떤 이는 나무를 닮은 소간색을, 어떤 이는 나뭇잎을 닮은 초록색을 입고 바틱의 아름다움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었다.
 
<로소 바틱 작업장 /사진=사공 경>
 
뒤쪽에는 짠띵으로 그리는 바틱 뚤리스과 짭으로 찍는 바틱짭을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천연염료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채색 과정을 잘 설명해 주었다.
망고 잎에서는 녹색을, 심황과 낭까(잭 프루트) 나무껍질에서는 황색을 얻었다. 천연 성분을 사용하기 때문에 염색 공정이 오래 걸리고 또 여러번 염색해야 한다고 했다. 소가 나무에서 갈색, 떼게르(Teger) 나무에서 황갈색, 띵기(Tingi) 나무의 붉은색, 잠발(Jambal) 나무의 붉은 갈색, 인디고 잎의 푸른색을 추출하는 과정도 설명하면서 인내 없고 자바 철학을 이해하지 않고서 천연염색은 만들어 질 수 없다고도 했다.
 
왜 천연염색만 고집하느냐, 너무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심플하게 대답했다.
“원래 자바 전통 바틱은 천연염색을 사용합니다. 저는 전통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리고 천연색은 사람의 피부 톤과 같습니다. 사람이 곧 자연입니다. 자연과 사람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무질서하게 변화하는 디지털의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는 천연염색의 불확실성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색상 결과에 따른 여러가지 조건 중에서 예를들어 태양열에 많이 노출되면 밝은 색상이 된다고 했다. 같은 색상의 색이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더 창의적이라고 말했다. 완전하지 않고 불확실한 인생처럼.
 
<로소 바틱 / 사진=사공 경>
 
2010년에 직물박물관에서 열린 바틱 전시회 오프닝 때 한 남자가 한 스텝 한 스텝 절도 있는 느린 춤사위로 무대를 꽉 채우고 있었다. 저 무용수가 누굴까? 멋지다. 당시 막연하게나마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예술의 콜라보를 통해 새로운 예술세계를 꿈꾸던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공연, 전시 등 예술활동을 예민한 시선으로 보는 편이다. 그 춤사위는 강렬하면서도 품위가 있어 보였다. 부관장 아리에게 물었다. 저 남자 무용수가 누구냐고. 족자에서 만난 그 바틱 예술가, 로소라고 했다. 춤을 만들고 전시와 공연을 세련되게 연출하는 예술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단한 춤꾼인 줄은 몰랐다.
 
2011년에 한인니문화연구원이 개원한지 얼마되지 않아 로소가 찾아왔다. 바틱 전시나 콜라보 공연을 하고 싶으니 후원자가 되어 달라고 했다. 당시 그런 능력이 없었던 나는 짜증부터 났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로소의 예술성을 잘 알게 되었고 보존해야 할 예술가라는 것을 직감했기에 부담으로 다가왔고, 부담은 짜증으로 표현되었다.
 
그 후, 탐방팀을 꾸려서 족자 피닉스 호텔에서 그의 공연과 작은 전시를 봤다. 국가나 지자체에서 해야 할 일을 저 예술가가 고독하게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은 한켠으로 미루어 두었다.
 
나는 그를 무대로 불러내 한인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012년 9월에 한인니문화연구원 주최로 ‘누산따라에서 한반도까지’라는 음악회를 개최했다. 당시 민간 문화 교류 행사가 많이 없었던 시절이라 반응이 좋았다. 로소 팀(2인)의 바틱춤 공연을 나는 숨죽이면서 봤다.
 
바틱은 결과가 아니라 원사가 패션이 되는 과정이다. 그는 실을 뽑아내고 천을 만들고 바틱을 그리고 염색을 하고 완성된 한 벌의 바틱을 입고 뽐내는 장면을 춤으로 연출하였다. 그의 바틱 춤에는 인내와 족자의 느림의 미학이 잘 표현되어 있었다.
 
행사 후 사람들에게 물었다. 어떤 공연이 가장 좋았으며, 어떤 공연이 가장 어필되지 않았느냐고. 모든 공연이 수준 이상이었지만 굳이 말하자면 로소 팀의 무용이 지루했다는 대답도 있었다. 그의 예술성이 표면적으로 강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나는 안타까웠다.
 
1년 뒤 그의 작업장을 다시 찾았을 때 우리를 위해서 그가 춤을 추었다. 바틱 작업 과정처럼 진지하고 아름다운 춤이었다.
 
2014년 로소가 한인니문화연구원에 와서 그가 걸어온 길과 로소 바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가 살아온 길에서 외롭게 서 있는 나 자신을 만나게 되었다. 사회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하겠지... 어두운 밤하늘 보다 더 짙게 내려앉은 로소의 슬픔을, 사명감의 무게를 나는 보았다.
 
2014년 6월에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지속가능한 문화예술 교류를 위해 로소가 이끄는 족자예술단체와 한인회 한인니문화연구원과 MOU를 체결하였다.체결을 축하하며 자바 전통 복장을 하고 그는 춤을 추었다. 직접 만든 바틱 춤을 추었다. 이 춤이 그가 마지막으로 춘 춤이었다. 초췌한 모습에 좀 놀랐다. 옛날의 빛나던 모습은 아니었다.
 
< 한인니문화연구원에서 MOU 체결 후 축하의 춤을 추고 있는 로소 / 사진=사공 경>
 
2002년에 문을 연 작업장인 바틱 로소는 오랫동안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 내가 혹은 연구원이 기회가 생기면 로소의 무대를 만들어 주리라고. 그 무렵 연구원 또한 운영난에 허덕이고 있었고 많은 일들이 쌓여 있었다. 여력이 없었던 나는 로소의 예술성이 부담으로 다가왔고 힘든 내 모습이 연상되어 눈감아버리고 싶었다.
 
로소는 1970년 12월 족자의 반뚤(Bantul)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다양한 콘테스트 및 패션과 관련된 활동에 참여하였다. 로소는 1990-1991년부터 PAPMI (Perhimpunan Ahli Perancang Mode Indonesia 산하 Yogyakarta Fashion School: 인도네시아 패션 디자이너 협회 산하 족자카르타 패션 스쿨)에서 디자인을 전공했으며, 1991-1992년에 바틱 의류를 전공하여 패션 세계를 마스터하고 ABA 족자카르타 (Akademi Bahasa Asing Yogyakarta 족자카르타 외국어 아카데미)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패션 세계를 진지하게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인도네시아 패션계를 주름잡았다. 2002년에 Batik Rosso를 오픈하고 꿈을 펼치기 시작하였으나 전통 천연염색보다는 실용을 추구하는 시기였다.
 
2014년 8월 족자의 한인회 행사에 로소 팀을 소개했다. 로소 춤이 보고 싶어서 족자로 갔다. 로소는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고, 로소의 제자들이 와서 행사를 빛내주었다. 로소 작업장에 가서 바틱냄새 자연냄새를 맡고 자카르타로 돌아왔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젊은 예술가 로소가 걱정이 되었다.

2014년 10월 제2회 문예총 종합예술제에 로소 팀을 초청했고 공연장인 한국학교에 로소가 제자들을 데리고 왔다. 8월 입원 이후 곧 퇴원했다고 들었는데 지난 6월보다 더 수척하고 병든 모습이었다. 항상 자바양반의 예의를 갖춘 그였지만 예술가로서의 자부심 있는 당당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무꾼과 선녀”를 공연하였다. 그날의 공연은 주문한대로 빠르고도 품위 있는 공연이었다. 이렇게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만나는구나 생각하며 공연 후 훌륭한 공연을 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며 곧 있을 “제5회 인도네시아이야기 문학상 시상식”에 초대하겠다고 말했다. 공연장 한쪽에 바틱을 전시해 줄 수 있는지도 물었다. 그에 대한 답은 하지 않고 “구루 사공. 바나나 섬유 직물로 만든 바틱 드레스를 입는 모습이 보고 싶어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2010년 로소는 바나나 줄기에서 나온 섬유에서 바틱 천을 만드는 새로운 혁신을 일으켰다. 바나나 나무는 매우 경제적이며 손쉽게 얻을 수 있으면 면보다 부드럽고 실크보다 실용적이라고 언젠가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바틱 기법으로 만든 천연염색의 아름다움을, 바나나 섬유에서 로소 바틱 패션으로 변신하는 것을 한국예술가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뒷뜰이 있는 전시장이면 좋겠어. 천연바틱의 아름다움이 춤추고, 흔들리는 바틱 천 아래에서 로소가 ‘바틱 춤’을 추면서 오프닝을 해주면 좋겠어라는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그날이 언제 올까.’ 라고 생각하니 좀 서글퍼졌다.
 
문학상 시상식에 초대하기 위해 그에게 여러번 전화를 했으나 받지 않았다. 매니저에게 전화를 했다. “며칠 전(2014년 12월 21일)에 돌아가셨습니다.”고 했다.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천연염색의 철학, 인생은 불확실하다는 것. 완전하지 않다는 것처럼 그는 그렇게 갔다.
 
‘그날이 왔다.’ 2016년, 2017년, 2019년 이어서 한국에서 바틱 초대전이 있었다. 그러나 로소는 없었다.
2016년 6월 바틱 전시회, 한세 24 초대전 <Batik The Soul of Indonesia Exhibition>(서울 인사동)때 그가 2005년에 무대의상으로 만든 것을 전시했다.  2017년 <Highlight Jogja Batik Exhibition>(한국문화원) 바틱 전시회 때 한 공간에 나는 로소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그를 기리며. ‘미안해’를 되뇌이며.

정체성과 작가 정신에 끊임없이 고민하던 한 예술가가 무너져가는 모습을 나는 마음 아프게 바라보며,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였다. 정말 미안해. 그때는 나도 정말 힘들었어요.

2017년, 다시 찾은 Batik Rosso에는 바람만 펄럭이고 있었다. 작은 바람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흔들리던 자연의 몸짓은 없었다. 뒤쪽에도 천연색을 추출하고 바틱을 삶고 하던 큰 솥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옆의 논밭에서 아궁이로 휘어지던 불꽃도 없었다. 잠자리 몇 마리 빨랫줄 위를 맴돌고 있을 뿐.
 
로소. 미안해. 정말 미안해!
 
 
*참고자료 
 https://travel.kompas.com/read/2011/12/19/15463331/Ketika.Rosso.Membagi.Ilmu.Membatik.
Pesona Batik Warna Alam book by Rosso &Heni Nur Afni


<로소의 천연색상 바틱 의류가 환경에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kompas.com>




<로소의 바나나 섬유로 만든 바틱 드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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