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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창작 클럽 (108) 떠다니는 얼굴, 굴러다니는 머리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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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9,570회 작성일 2019-10-09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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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떠다니는 얼굴, 굴러다니는 머리통
 
배동선
 
 
뿌르발링가 가발공장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는 조코는 저녁 퇴근길, 스라유 강가에서 도시 외곽 산자락으로 이어지는 갈래길 소또아얌(자바식 닭국) 파는 와룽(작은 가게) 앞에서 갈등합니다. 일몰을 알리는 마그립 아잔이 들려온 지도 오래 전, 어둠이 깊이 내리는 만큼 배도 더 고파오는데 향긋하고도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습니다. 거기서 50미터쯤 앞에 사떼깜빙(염소고기 꼬치)과 나시고렝(볶음밥) 파는 그로박(이동식 간이 판매대)이 몇 개 더 있으니 거기까지 가는 동안 조금 더 고민해 보기로 했을 때 길 옆 야자나무 위에서 둥근 물체 하나가 풀썩 떨어져 와룽과 그로박들 사이 비포장도로 위로 데구루루 굴러 나왔습니다. 당연히 야자열매라 생각했던 그 물체는 반대편 풀숲으로 굴러들어갈 듯하다가 브레이크라도 걸린 듯 우뚝 멈춰 섰습니다. 그 순간 싸~한 느낌이 조코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습니다. 얼굴이 뜨거워지며 귀까지 울기 시작하면서 조코는 그제서야 저 물체가 뭔지 알아차렸습니다. 군둘 쁘링이스(Gundul Pringis)가 주변에 나타나면 그런 현상이 벌어집니다.
 
서부 자바 반둥과 찌레본 사이 마잘렝카 지역 출신 조코는 자바 땅에서도 저걸 보게 될 줄 몰랐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해질 무렵 마을 변두리 빈 밭을 가로질러 자그마한 대나무 숲으로 덜컹거리며 굴러가는 커다란 실뭉치 같은 것을 이전에도 그는 조무래기 친구들과 함께 여러 번 보았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귀뚜라미 잡으러 나온 아이들이 풀섶에 나뒹구는 실뭉치 따위에 왜 관심을 갖겠어요? 그날 실타래처럼 보였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에서 드러난 섬뜩한 얼굴이 아이들을 쓱 돌아보기 전까진 말이죠.그 입술이 살짝 뒤틀리며 삐죽이 튀어나와 기괴한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면 눈이 마주쳐 얼어붙어 버린 아이들은 놀라 입만 떡 벌린 채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잊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릭 굴루뚝 승이르다!”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사방으로 내달리자 그 머리통은 다시 쪼르륵 굴러 실뭉치 같은 머리칼로 둘둘 휘감긴 채 대나무숲으로 쏙 들어가고 말았는데 조코만 밭 한 가운데에 남아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습니다. 순다어로 주릭은 귀신, 굴루뚝은 ‘굴러다닌다’, 승이르는 ‘비웃음’이란 의미이니 ‘굴러다니며 비웃고 다니는 귀신’이란 뜻인데 정말 이름값을 하는 놈이었어요. 네덜란드 강점기 당시 경찰에 붙잡힌 독립투사들이 인근 대나무 숲에서 참수당하곤 했는데 그 잘린 머리들이 수습되지 않아 굴러다니는 머리통 귀신 굴루뚝 승이르가 되어 출몰한다 합니다.
 
조코에게서 그 얘기를 전해들은 수마트라 빠당 출신 아버지는 ‘수치스럽다’고 크게 분개하더니 곧바로 자바 지역 뿌르발링가로 이사를 결정했습니다. 눈앞에 출몰한 귀신을 겁내지 않고 끝까지 관찰한 자신이 절대 수치스러운 행동을 한 게 아니라 믿었던 어린 조코는 그 일로 마음을 다쳤지만 나이 먹은 후 뿌르발링가 논두렁 풀섶 앞에 멈춰서 조코를 향해 서서히 시선을 돌리는 군둘 쁘링이스를 보는 순간 그때 부모님이 왜 그런 말씀을 했는지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름이 민머리라는 의미를 담은 만큼 실타래가 아니라 일견 야자열매처럼 보이는 군둘 쁘링이스는 두 눈이 새빨갛게 타올랐고 길게 찢어진 입에서 터져나오는 깔깔거리는 소리에 귀가 멍멍할 정도였습니다. 와룽과 그로박 근처에 모여 앉아 요기를 하던 사람들이 기겁을 하고 접시를 집어던지며 달아났는데 그 머리통은 풀섶으로 사라지는 대신 길을 따라 조코 쪽으로 맹렬하게 굴러오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움찔 했지만, 코앞까지 다가와 펄쩍 뛰어오르는 머리통과 눈이 마추친 순간 조코는 군화발로 냅다 걷어차 버렸습니다. 깔깔거리던 웃음소리는 ‘억’하는 외마디 비명으로 바뀌었고 머리통은 그로박 너머 수풀 속으로 멀찍이 날아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수치스럽다!”
그 사건을 전해들은 조코의 아버지는 이번에도 기염을 토했습니다.
 
“맞아요! 아버지!”
조코도 이젠 거기 맞장구를 칠 만큼 아버지 마음을 이해했습니다.
 
“장단 맞추지만 말고 좀 제대로 못 날아? 다 큰 놈이 아직도 창자가 바닥에 끌리잖아! 잠비 사는 너희 외삼촌도 그러다가 치질 걸리신 거야!”
하지만 조코의 어머니는 다 큰 아들을 아직도 인정하지 않았어요. 세 사람은 지금 스라유 강변 상공에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날고 있었습니다.
 
 
"굴러다니다니! 굴러다니다니! 그것도 킬킬거리면서!”
맨 앞에 날아가던 아버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집안 체면이 있지! 주변에 그런 천박한 놈들을 두고 살다니!”
조코의 집안은 대대로 빨라식 흑마술을 전수받았습니다. 주술을 완전히 체득하면 성인이 되는 보름날 밤, 머리통이 몸에서 떨어져 나와 목 밑으로 허파와 위, 간, 창자 같은 내장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밤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사람이나 가축을 공격해 피를 빨아먹게 되죠. 일부 몰지각한 빨라식들은 막무가내로 임산부를 공격해 태아를 뽑아 먹거나 갓난아기 무덤을 파헤쳐 배를 채우기도 합니다. 가문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같은 부류와 혼맥을 맺는데 조코의 어머니도 잠비 빨라식 집안 여인입니다.
 
“역시 깔리만탄이나 발리로 다시 이사해야 할 모양이에요.이 동네는 굴러다니는 놈들 천지라 조코 신부감 구하긴 틀렸어요.”
 
깔리만탄의 꾸양, 발리의 레약도 수마트라 미낭까바우의 빨라식과 똑같은 습성을 갖습니다. 하지만 조코는 내심 외국 신부도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말레이시아의 뻐낭갈, 캄보디아의 압, 태국의 크라슈에도 모두 먼 친척뻘 되니까요.
 
“이쪽이에요.”
조코가 십이지장을 뻗어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아까 소또아얌 와룽 앞에서 후각을 자극했던 맛있는 냄새가 그쪽에서 풍겨왔습니다. 와룽에 앉아있다가 군둘 쁘링이스의 출현으로 혼비백산해 달아났던 젊은 여자. 그 갈래길 와룽 앞에서 사냥감을 찾곤 하던 조코가 그날 그녀의 특별한 냄새를 맡은 것입니다.
 
“그래, 바로 이 피냄새야.”
아버지는 어느새 마을 외곽의 한 집을 향해 쏜살같이 날았고 그 뒤를 따르는 조코와 어머니의 입에선 채찍 같은 혀가 길게 뻗어 나와 무섭게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PS. 공중을 떠다니는 빨라식, 레약, 꾸양 같은 머리통 귀신들과 길바닥을 굴러다니는 머리통 굴루뚝 승이르나 군둘 쁘링이스 사이의 혼담은 그래서 들어본 적 없습니다.
 
 
*이 글은 '데일리 인도네시아'에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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