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아데니움, 그 사랑이야기 > 인문∙창작 클럽

본문 바로가기

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사이트 내 전체검색

73c27ae0295d5ccfd060ed5825f883ca_1671375260_4225.jpg

인문∙창작 클럽 (89) 아데니움, 그 사랑이야기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897회 작성일 2019-05-22 18:12

본문

아데니움, 그 사랑이야기
 
김현숙
 
 
십오 년을 나만 바라본 이 있었네
첫 눈에 반한 건 나였다네
그의 붉은 얼굴에
나도 따라 붉어지고
도도한 자태에
정신을 놓았지
 
사랑했기에 곁에 두고 싶었네
정성을 다해 비위를 맞추었지
얼굴빛은 괜찮은지
불편함은 없는지
아련한 눈빛을 아침 저녁으로 보내곤 했지
 
머잖아 내 심장은 평정을 찾았고
그는 잡초처럼 화단에 버려졌지
난 또 새로운 사랑의 설렘을 찾고 있었던 거야
 
이사를 했다네
떠나는 나를 붙잡던 애절한 눈빛
외면할 수 없었네
마지막 이삿짐이 된 그가 우리를 따라 나섰지
 
베란다에 던져 놓았네
바로 옆의 나팔꽃이 보라 빛으로 터지면
호들갑스럽게 사진을 찍곤 했지
무심한 내 눈은 그에게 머문 적이 없었네
 
어느 새벽 낯선 이가 집에 들었네
진 붉은 얼굴 넷이 거실을 들여다보고 있었어
삐쩍 마른 몸에 까치발을 들고 서서
목까지 차오른 그리움이 검붉게 충혈된 꽃
 
가슴이 쿵 내려앉았네
잊었던 첫사랑의 자태
 
십삼 년을 꽃이라곤 피워본 적 없는 이
그저 나무로만 묵묵히 살아온 이
꽃 피울 최소한의 햇빛도 허락하지 않은
내 잔인한 무심함에 짓밟힌 이
 
난 고개를 들 수 없었네
반했던 순간보다 더 아름답게 빛났지만
자랑스레 반짝이는 그의 눈을 들여다 볼 수 없었어
 
사 일째 되는 날,
그는 처절하게 지고 말았네
선명한 자줏빛 목을 뚝뚝 자르고
털썩 내려놓은 뒤꿈치 옆에 쓰러져 있었어
 
십오 년을 나만 바라보는 이 있었네
내가 첫눈에 반했던 이라네
식어버린 내 심장에 뿌리를 박고
십삼 년을 나무로 살다
사 일간 꽃이 되어 내게 왔던 그런 이였다네
 
 
                                                   (사진=김현숙)
 
** 시작노트
 
아데니움(Adenium), 이 시의 주인공인 꽃의 이름입니다. 학명은 Adenium obesum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원산지이며 인도네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상용 꽃입니다.
 
이 꽃과 인연을 맺은 지는 15년쯤 되었습니다. 매혹적인 붉은색에 고귀한 자태가 교정의 목련화를 떠올리게 했고, 이내 흠뻑 매료되어 집으로 데려와 기르게 되었죠. 주택에 살던 초기에는 꽃도 자주 피워 더욱 깊은 사랑에 빠졌지만, 그 마음이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아파트로 이사해서도 베란다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13년을 살았습니다. 푸른 잎사귀만으로는 저의 눈길을 잡을 수 없음을 알았는지 여위어만 가는 몸을 햇빛 쪽으로 기울이고 내내 까치발로 서서 지냈습니다. 옛사랑을 찾기 위해 13년을 노력한 셈이지요…… 그가 꽃으로 왔을 때에야 비로소 난 그의 존재를 실감했고, 그의 숭고한 열정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 이 글은 '데일리 인도네시아'에 함께 실립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PT. Inko Sinar Medi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