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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14] 빨간 상점 Toko Mer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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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21-09-30 17:42 조회 10,72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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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니문화연구원 자카르타역사연구팀>
 
빨간 상점
 Toko Merah

사공 경(한인니문화연구원장)

자카르타의 구 도시에는 찔리웅 강 (현재 깔리 브사르)이 순다 끌라빠 항구로 흘러 들어간다. 깔리 브사르 강가에는 오래된 집들이 아직까지 많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붉게 타오르는 풍경으로 남아 문득, 뒤돌아보게 하는 그런 집이 하나 있다. 깔리 브사르에 1600년대 지어진 도개교나 운하가 이 빨간 집으로 인해 더 빛나 보인다. 밤에는 강과 운하에 별들이 한없이 흐르기도 한다. 빨간색과 함께.
 
▲ Toko Merah 2005년 (사진=사공 경)
 
1.Toko Merah는 누가 지었을까?
꼬따 뚜아에 가면 와양박물관 뒤편 깔리 브사르 강가에 있는 빨간 벽돌집 주변을 괜히 서성거리곤 했다. 이 건물에 ‘Toko Merah’(빨간 상점)라고 흰색으로 적혀 있었다. 밖에서 보기에도 저택으로 보이는 이 건물은 항상 문이 닫혀 있는 것 같았다. 길가 사람들에게 물으니 사무실이며 안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고 했다.
 
‘저 빨간 집은 어떤 시간으로 채워졌을까.’
건물 중앙 아래 현판에 ”1730년에 구스타프 빌렘베른 반 임호프(Gustaaf Willem baron von Imhoff, 1705-50)가 지었으며, 그는 1743-50에 총독을 역임했다.“라고 적혀 있다.
 
▲건물 앞에 있는 현판(출처 tagar.id)
 
그 중 No.4(남쪽)는 1700년대 초에 지어졌으며, No.11(북쪽)은 1730년에 당시 상인이었던 임호프가 건축했는데 비용이 모자라 부자였던 장모의 도움을 받았다. 이처럼 Toko Merah는 한 지붕 아래에 두 가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1736년 스리랑카 주지사로 임명되기 전에도 No.11(북쪽)에 살았다. 그의 장모는 No.4(남쪽)에서 살았다. 

이 건물은 붉은 벽돌과 붉게 칠해진 실내장식과 나무 계단, 빨간 가구들 때문에 명칭에 ‘Merah(빨간)’가 붙여졌다. 이후 이 건물의 용도와 주인이 여러번 바뀌었는데 1851년 중국인 Oey Liauw Kong가 매입해 상점으로 운영했다. 그래서 ‘Toko(상점)’라는 이름이 추가되었다.

2. Toko Merah의 내부와 상징적인 의미
2012년 9월에 Toko Merah가 공식적으로 재공개 되었다. Toko Merah 오른쪽 (No.11,북쪽) 입구 쪽에 옛 커피점 Kopitiam Doeloe가 운영되고 있었다. 미리 약속한 관리자의 안내에 따라 내부를 볼 수 있었다. 밖에서는 2층 건물이었으나 건물 뒤쪽은 3층으로 되어 있었다. 첫 느낌은 웅장했고 어두운 빨간색은 강렬했으며, 300년 넘은 집 같지 않게 깨끗하고 튼튼해 보였다.
 
관리인은 ”외벽의 두께가 50cm나 됩니다. 두 집의 중간 벽을 허물어서 큰 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넓은 홀도 있고 천장이 높으니 덥지 않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부드러운 바람이 바다를 어루만지듯이 격자창을 통해 들어오는 듯했다.
 
관리인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있는 멋있는 목공예의 아름다움을 말하기도 하며, 이곳은 사진과 영화 촬영 장소로도 사용된다고 했다. 건물의 장식품에서 고전적인 유럽 스타일과 중국 스타일이 혼합되어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바로크 스타일로 된 계단과 높은 창문, 처마 장식은 고전적인 유럽 스타일이었다. 전형적인 네덜란드 주택인데 빨간색으로 인해 중국풍이 느껴지기도 했다. 현관에는 반 데르 빠라(van der Parra)총독의 석고 문장이 남아있어 더 고풍스러워 보였다.

▲(좌)Toko merah 내부(shrayaresidence.com) (우)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pencyclopedia.jakarta-tourism.go.id)

Toko Merah는 3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북쪽에서 남쪽으로 세로로 놓여 있는 2층으로 된 앞건물과 3층이 된 뒷건물, 그리고 중간 건물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로 놓여 북쪽과 남쪽 건물로 연결된다. 또 한 지붕 아래 두 집이 있는 쌍둥이 건물이라고 한다. 건물에 두 개의 출입구가 있고, 인접한 건물에 화재가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분할 장벽이 있었다고 했다.
 
Toko Merah 실내에 방이 많다. 즉, 1층에는 북쪽과 남쪽 건물에 방이 각각 8개로 총 16개, 강당이 1개, 2층에는 4개의 방과 1개의 강당, 3층에는 5개의 방이 있다. 2층 뒤쪽에는 추가 건물이 있고 방이 몇 개 더 있었다.
 
다음해 Toko Merah의 역사만큼 깊은 Kopitiam의 커피 향이 생각나 다시 찾았다. Kopitiam은 문을 닫았고 Toko Merah도 굳게 닫혀 있었다.

1700년대에는 깔리 브사르 강가는 상류층의 거주 지역이었다. Toko Merah는 옛 바타비아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큰 개인주택이기 때문에 이 저택은 당시 귀족들이 바타비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

Toko Merah는 VOC(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전성기 때 바타비아 시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후에 이 전략적인 곳을 중심으로 바타비아의 상업 중심 지역이 된다. 따라서 Toko Merah는 구 도시에서 제일 크고 호화로웠고, 현재까지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는 건물이다.
 
3. Toko Merah를 사랑한 임호프와 정적 발케니에
25대 총독인 아드리안 발케니에(Adriaan Valckenier, 1737~1741)가 중국인 실업자들을 스리랑카로 보내겠다고 선언하자, 1740년 10월 중국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총독 발케니에는 중국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VOC 위원회가 그를 문책하자, 그는 조카인 임호프를 모함했다. 임호프는 재능과 집안의 인맥으로 빠르게 승진하여 바타비아의 인도협의회의 정회원으로 임명되었다. 이 직위에서 그는 1740년 중국인에 대한 올바른 정책을 펼쳤으나 삼촌 발케니에 총독과 충돌하게 되었다. 임호프는 의회 회의 중에 체포되어 Toko Merah를 팔고 네덜란드로 추방되었다.

1736년에 실론(스리랑카)의 주지사로 임명되어 떠날 때도 Toko Merah에 쌓인 추억으로 가슴을 쓸어안았던 그였다.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후 임호프는 정당하게 자신의 정책과 행동을 소명할 수 있었고, 바타비아의 번영을 파괴한 학살에 대한 모든 책임을 발케니에 총독에게 돌릴 수 있었다. 1742년 임호프는 총독으로 임명되어 바타비아로 가는 길에 케이프 타운에서 전 총독 발케니에를 체포했다. 발케니에는 바타비아 성에 갇혀 법정에서 자신의 정책을 방어할 기회를 헛되이 기다려야 했다.
 
4. 바타비아 역사의 침묵의 증인 Toko Merah
앙께 비극 사건(Tragedi Angke)이 1740년 10월에 발생했다. VOC는 여러면에서 중국계 사회를 탄압했으며, 설탕 가격의 하락으로 중국계 사회는 소득이 감소하여 VOC 정부에 반대했다. 그 결과로 수백 명의 중국계는 50명의 네덜란드 군대를 죽였다. 따라서 발케니에 총독은 모든 폭동에 대해 치명적인 폭력으로 대응한다고 선포했다. 또한 중국계는 지독하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바타비아에 사는 다른 소수 민족들이 깔리 브사르 강변에 있는 중국계 가옥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한편, 네덜란드군은 대포로 중국계 가옥을 공격했다. 이 폭력은 바타비아 시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많은 중국계가 죽임을 당했다. 약 10,000명 이상의 중국계가 학살당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학살된 시체가 깔리 브사르 주변에 흩어져 물 색깔이 붉게 물들었다.
 
▲또꼬메라 앞에 있는 깔리 브사르에 수없는 시신이 던져지고 있다.( propertyinside.id )
 
Toko Merah는 역사 외에도 신비로운 귀신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앙께 비극 사건으로 죽은 중국계는 Toko Merah 앞에 있는 깔리 브사르에 수없이 버려졌다. 게다가 Toko Merah 건물은 많은 중국계 소녀들이 죽을 때까지 고문을 당한 장소였다고 알려진다.
 
초자연적인 이상한 사건이 종종 이곳에서 일어났다고 하는데, 심지어 아침에도 자주 발생했다고 한다. Toko Merah 옆 노점상은 자신을 부르는 듯 형체 없는 여성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한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르지만 정확히 여자 소리였고 건물 안에서 나왔어요. 건물 쪽으로 돌아보면 그 소리는 없어졌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우는 것 같았고 때로는 웃고 있었어요”라고 했다. 
 
한 ‘네덜란드 아가씨’가 부서진 얼굴로 밖을 바라보는 모습이 Toko Merah 창문을 통해서 자주 목격되었다고도 한다. 그 아가씨는 앙께 비극 사건에서 중국계 사람들을 지키려고 했는데 네덜란드 사람이 수없이 얼굴을 밟았다고 한다. Toko Merah 근처에서 음료수 파는 상인은 Toko Merah를 방문하는 사람이 건물 앞에서 귀신에 홀린 모습을 여러 번 봤다고 했다. 보통 처녀였으며 홀렸을 때 인도네시아어 아닌 네덜란드어로 말하며 외친다고 하였다. 또 관광객이 Toko Merah를 향해 사진을 찍을 때 사람이 아닌 어떤 형태가 찍혔다고도 했다. 우는 소리와 군인 발소리도 Toko Merah 안에서 자주 들렸다고 했다.
 
5. Toko Merah의 열정과 진정한 개혁가 임호프
임호프는 27대 총독(1743-1750)이 되자 사는 법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Toko Merah의 북쪽에 있는 건물(No.11)을 다시 매입하였다.
 
임호프는 18세기의 진정한 개혁가였다. 그는 많은 일을 수행했고, 선장과 동료를 위한 군대 계급을 도입하여 개선하고자 하는 회사의 상선을 개편했다. 그는 해군 장교에게 더 나은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Academi de Marine(1743-55)를 설립했다. 이 아카데미는 동양의 첫 해군아카데미로 운영되었으나 인도네시아인들은 사용하지 못했다. 이 아카데미가 연상되는 전시품을 국립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다. 망원경을 든 소녀가 묘사된 부채 등이다.

그는 바타비아의 학교 시스템을 개혁하고, 무역회사를 바타비아의 자유 시민에 의해 형성된 민간단체로 이전했으며, 개인이 아시아 간 무역을 보다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규정을 제정하였다.

그는 첫 번째 우체국인 신용은행을 열고 처음으로 신문을 발간하는 등 바타비아의 건강과 교육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타비아의 활력을 그 이전으로 완전히 회복할 수는 없었으나 그의 개혁 중 몇 가지는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임호프는 보고르의 부지에 설립한 ‘뷔텐 조르그’라는 토지를 제외하고는 재산이 거의 없었다. 그는 총독 대행을 위한 국가 거주지로 부동산을 계획했지만, VOC 이사들은 승인하지 않고 대신 그에게 노고의 대가로 새 부동산을 부여했다. 그의 노력은 사후 60년이 지난 19세기 초에 마침내 세계 최고의 식물 기관인 그 유명한 ‘보고르 식물원’이 탄생하게 된다.
 
Toko Merah의 빨간색처럼 열정적으로 살았던 임호프는 1750년 11월에 세상을 떠난다.

6. Toko Merah의 역사
발케니에는 1751년 자신이 죽기 몇 달 전에 정적인 임호프가 죽는 것을 보고 만족했을까? 1750년에 세상을 떠나 교회(현 와양박물관)에 묻혀 있지만, 그에게 Toko Merah는 아픈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남쪽 집을 소유했던 인도 의회 회원인 Hugo Verijssel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미망인(Sophia Westpalm)이 1760년까지 그 곳에 살았다. 28대 총독인 자콥 모셀(Jacob Mossel)의 딸, 필리피나 테오도라 모셀이 Toko Merah를 매입했다. 자바 북부해안지역의 주지사 Nicolaas Hartingh도 이곳에서 살았는데 그는 욕야카르타(1755) 술탄국과 솔로 망꾸느가라(1757)왕국의 영토 다툼을 화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로인해 그는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인도협의회의 일원으로 일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대부분 바타비아 귀족들의 거주지로 사용되었다.  
북부 집에서 살던 드 클러크 부인은 1785년에 사망했으며, 남부 집은 현재 Gambir에 있는 Gatot Subroto Army Hospital의 복합지인 Weltevreden (1787) 대저택에서 사망한 Mrs. van der Parra의 소유가 되었다. 둘 다 전 총독의 미망인이었다.

두 미망인이 죽은 이후, Toko Merah는 1786년-1808년에 공무원들의 숙소인 Heerenlogement 호텔로 운영했으나 번창하지는 못했다.

1809년-1813년에는 Anthony Nacare가 주택으로 사용하였다. 1813년-1851년 동안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가 1851년 중국인 Oey Liauw Kong가 매입해 상점으로 운영했다.
 
1910년-1925년에는 Voor Indie 은행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1923년 Bouwmaatschapijj 주식회사가 Toko Merah를 백만 길더의 비용을 들여 최대한 원래의 모습으로 재건하였다.  두 개의 입구 문 중 하나는 이전 모델로 교체되었다.

1925년-1934년에는 무역회사로, 1934년-1942년에는 네덜란드의 5대 주식회사 Van den Berg의 본사로 운영되었다. 1942년-1945년에는 일본군의 보건청으로, 1945년-1946년에는 영국·인도의 군인 베이스캠프로, 1946년에는 수출 무역국으로 운영되다가 독립 후 인도네시아 정부에 성공적으로 인수되었다.
 
1957년 이후, 국영회사에서 사용하였으며, 1990년대에는 문화재로 사용되었다. 1977년부터 2003년까지 PT Dharma Niaga가 잘 관리했다. 이후 수년간 방치되다가 잠시 동안 도박장이 되기도 했다.
 
2012년에 Toko Merah는 복원되어 전시 및 회의 장소가 되었다. 현재는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고 특정 활동만 건물을 사용할 수 있다.
 
모든 가구, 델프트 타일 및 목공예품은 1901~04년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었다가 이전 회사의 방 (현재 'Numismatic Room')으로 가져왔다.  이 가구는 1939년에 Old Batavia 박물관 (현 와양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와 그 이후에 분실되지 않은 전시물은 1974년에다시 자카르타 역사박물관(구 시청)의 2층으로 옮겨졌다
 
7. 지금도 타오르고 있는 Toko Merah
총독 임호프는 바타비아와 보고르를 발전시켰고 중국인 학살을 반대했으며 Toko Merah가 가슴 밑바닥까지 에이는 풍경으로 남아 있는 사람으로 남아 있다. 그가 Kopitiam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의 함수 속에 기억과 망각의 변주곡을 쌓아 올리리라. 세월만큼이나 다양한 역사만큼이나 두터워진 빨간색을 위해.
 
오늘도 그는 Toko Merah에서 잃어버린 누군가를 찾고 있을까. 시간의 칼날 속에서도 빨간색은 더욱 빛나는데, 그는 아직도 그곳에서 서성이고 있다.
 
코로나 상황이 나아지면 나는 임호프가 사랑한 Toko Merah에 가서 그가 바라봤던 깔리 브사르에 흐르던 빛나던 별빛과 빨간색을 보고 싶다. Toko Merah에 대한 역사 이야기로 자카르타의 문명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고 싶다. Toko Merah에서 세상을 만나고 순다 끌라빠의 바다내음을 마시며 빨간 열정으로 산 임호프, 그를 만날 것이다.

Toko Merah는 분명히 역사의 여정에 대한 증인이 되어 지금도 조용히 붉게 타오르고 있다. 
▲Toko merah (kumparan.com)
 
 
참고문헌 및 자료
-B.H.M. Vlekke in Nusantara, A History of Indonesia (Bruxelles, 1961, pp. 217-218),
-『Historical Sites of Jakarta』 by Adolf Heuken SJ/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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