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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8) 창문과 파파야 / 김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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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7,817회 작성일 2018-08-29 11:24

본문

<수필산책 18 >
 
창문과 파파야
 
김재구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우리 집에는 3년 전부터 우리 집안 일을 부지런히 도와주는 식모가 있다. 이름은 우쭈(Ucu)다.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서부 자바의 찌안쭈르에서도 오토바이로 6시간을 더 해안가로 가야 하는 어느 촌에서 한 20시간이나 걸려서 자카르타에 왔다고 했다. 지금은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도 곧잘 만들고 우리 식구에게 안성맞춤이 된 지가 오래다.
 
아내와 나는 맞벌이를 해야 하고 선교일도 바빠 집안 일이 쉽지가 않다. 그런 이유로 우린 우쭈에게 생활 의존 비율이 아주 크다. 어쩌다 르바란 휴가를 며칠 보내 주고 나면 온 집안이 엉망이 되고 싱크대는 설거지할 것으로 산을 이루기도 한다. 워터 디스펜서의 19리터짜리 물통도 그 작은 체구로 단번에 번쩍 들어올려 새 것으로 바꾸어 놓아 경외심까지 불러 일으키는 건강한 여인이다. 우리 집의 아주 귀한 사람이다.
 
우쭈는 시골에 갔다 오면 한 두 개의 파파야를 내가 좋아한다고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가져와서 선물이라고 건네 주곤 한다. 그리고 깎아서 접시에 가지런히 내오며 ‘쁘빠야’ 라고 부르라고 가르친다. 파파야는 바알간 과일로 육질이 부드럽고 향기롭다.
 
 
 
파파야는 인도네시아에서는 남녀노소 잘 살던 못 살던 누구나 즐겨 먹는 과일이다. 도로변이든 집 뜰이든 쓰레기 더미든 파파야가 못 자라는 곳이 없다. 그래서 파파야 나무는 인도네시아에서는 아주 흔한 과일나무다.  과일 이름도 파파야다. 다년생 식물로 다 자라면 제법 키도 크고 나무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여인들처럼 겉은 나무처럼 강해 보일 뿐 실은 나무처럼 그렇게 강하지는 않다. 비바람이 거세면 쉽게 쓰러지고 일단 넘어지면 아주 형편없이 썩어 버려 생을 쉽게 마감하기도 한다. 그래서 파파야는 나무라고 하기에는 풀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어떤 이는 파파야 열매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고도 하고 씨까지도 위장에 좋아 먹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씨까지는 못 먹겠다.
 
우쭈는 씨를 잘 버리지 않았다.  3년 전부터 우리가 찌까랑에 살 때 우쭈는 자주 앞마당에 씨를 심었다. 하지만 제법 싹을 틔우고 자라다가도 이내 썩어서 죽고 다시 심기를 아주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을 보았다. 한 그루의 파파야 나무가 생존해서 열매를 맺기까지 쉽지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우리 집 앞마당이 큰 길가에 있는데 땅 밑에 하수구가 지나가고 그 위에 시멘트 콘크리트가 있어서 나무가 자라지 못했나 싶기도 하다.  그러던 중 한 그루 파파야가 우리 집 2층 창가 밑에서 자라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이 파파야는 쉬 죽지 않고 살아서 커가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아주 신기하고 재미있게 바라 보았던 기억이 있다. 이 파파야는 내가 주로 책을 읽는 방의 창문 밑에서 자라고 있어서 늘 바라볼 기회가 많았다.
 
 
나는 인니에 살면서 하루라도 에어컨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적도의 한낮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찌는 듯한 폭염이다. 작렬하는 태양 빛에 단 몇 분만 노출하고 서 있어도 죽음의 맛이다. 피부가 아프기까지 한다. 이런 열기를 파파야는 온종일 온 몸으로 받으며 서 있는 것이 안스럽기도 했다. 파파야의 잎이 간혹 축 늘어지는데 나는 아마도 파파야가 이제 죽겠구나 하고 생각도 했었다. 얇은 창문 하나가 파파야와 나의 삶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여러개월이 넘도록 죽지 않고 살고 있던 파파야에게 찬사를 보냈던 것으로 지금 어렴풋이 기억난다.
 
내게는 파파야가 강인한 생존력을 가진 우리 어머니를 연상하게 하였다. 2014년경, 가족과 함께 족자를 여행하면서 느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인도네시아의 시골은 한국의 70년대를 생각나게 한다는 것이었다.
 
1960년대 한국에서 지방에 살다 서울로 갓 올라온 시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우리 아버님도 그 때는 변변한 직업이 없으셨고 사업을 하신다고 하다가 연이어 실패하고 우리 집은 몹시도 가난하게 살게 되었다. 내가 처음 무릎을 다치고도 변변하게 치료를 못해서 한동안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을 하루도 다닌 적이 없다. 3학년을 다니다 몇 년을 쉬고 5학년부터 다시 늦은 나이에 학교를 다닌 기억이 있다. 그 때 아버님은 집을 나가시고 오래동안 들어오시지 않았다. 어머니는 홀로 나를 포함해 세자녀를 혼자 키우셔야 했다. 그 때 어느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댁의 가정부로 일을 하셨고 나는 학교에도 못가고 아무도 돌봐 주는 이가 없어서 그 집에서 두 끼의 끼니를 얻어 먹고 엄마 등에 업혀 함께 출퇴근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아직도 그 교장 선생님 부부의 애정어린 눈빛과 우릴 위해 신실하게 기도하여 주신 사랑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우리 어머니에게 참 긍휼하게 잘 해주셨던 분들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지독한 가난을 헤치고 70년대를 살아 남으신 강인한 한국 여인이지만, 그 못지 않게 인도네시아 어머니들도 참으로 생활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어머니라는 이름을 가진 온 세상 여인들이 보편적으로 다 강한 존재들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우리 집 식모인 우쭈도 많이도 부지런하고 생활력이 좋다. 시골에 자신의 친정 어머니가 3살 된 자신의 아들을 돌보고 계신다고 했다. 남편은 자카르타에 있는 어느 공장의 기사라고 했다. 온 식구가 다 떨어져 살고 있는 셈이다. 3살 배기 어린 아들이 늘 보고싶어 쉬는 시간에는 시골의 어머니가 보내주는 핸드폰의 문자 메시지만 보는 것 같았다.
 
지난 2017년7월에 땅거랑 베에스데 (Tangerang BSD)로 이사 왔는데 그 보다 몇 달 전 일이다. 어느 날 우쭈가 직장에서 일을 하고 왔는데 보이지가 않았다. 아내가 하는 말이 지난 밤 우쭈가 엄청나게 울고 불고 하였다고 했다. 어머니가 위중하시다고 했다. 당장 시골로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쭈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게 기약없이 우리 집을 떠난 것이다. 어머니가 아프시기에 아마도 집에 노약한 아버지와 자신의 아들에게 밥을 해 먹일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아들을 돌보시던 어머니가 몸져 누우면 누가 아들을 돌보나 걱정이 아주 컸던 것 같다.
 
우쭈가 떠난 그 날 오후부터 어둠이 내리고 천둥 번개가 우레와 같이 치고 아침까지 얼마나 비가 많이 내렸는지 모른다. 인도네시아의 날씨가 참 얄궂다는 생각을 하였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파파야는 떨어지는 빗방울들로 인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를 못했다. 마치 세차게 떨어지는 빗방울들로 인해 손가락처럼 보이는 잎사귀들이 찢어져 보이기까지 했다. 세차게 쏟아지는 빗 속에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슬픈 춤을 추고 있는 듯했다. 힘든 삶의 무게로 두 어머니란 이름의 여인들이 마음이 찢어지고 흔들거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우쭈가 없이 아마도 한 3주를 버티었던 것 같다. 이제는 더는 못 기다린다고 우리 부부는 여기저기 새 식모를 찾는다고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피곤하지만 학교로 일하러 갔다가 와서 설거지도 하고 주로 밥은 나가서 사먹고 빨래는 아내가 세탁기 돌려 대충하고 아침에 바삐 빨래줄에 널고 갔다가 와서 걷어서 다림질도 안하고 꾸겨진 셔츠 그대로 입고 직장에 출근을 하여야 했다. 새 식모들을 면접도 몇 번 봤지만 우쭈만큼 탐탁해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한 사람 며칠 후에 오기로 하고 조금만 더 참자고 하던 어느 날 밤이었다. 식모 방에서 웬 소리가 났다.  한 3-4살 먹은 아이의 말소리 울음소리도 났다. 모른 척하고 잤다. 새벽에 출근할 때도 우쭈에게 와서 반갑다는 인사만 하고 나는 집을 나섰다. 집이 한 결 깨끗해진 느낌이 났다. 오후에 집에 돌아오자 아내가 말을 해 주었다. 시골에서 어머니가 몸져 누워 계시다 이제 조금 거동은 하시는데 도저히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지경은 아니어서 하는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왔다는 것이었다.
 
창문 아래 파파야가 어느 날부터인가 잎사귀 밑에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주먹만한 사과 같은 것들이 하나 둘씩 생기더니 시간이 지나고 나자 제법 어린 아이들 머리만 해 보였다. 아기들을 보듬고 있는 파파야를 보면서 인도네시아의 어머니들을 연상하게 되었다. 가난한 때 남자보다 여인들이 좀 더 고생을 많이 한다는 생각도 하였다. 파파야 나무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인니의 여인들을 상징하는 것 같고 어머니란 이름을 가진 여인들의 삶을 반추하게 하는 그런 식물이란 느낌이 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파파야는 여기저기 자바 섬 어디에서나 볼 수 있어 너무 흔한 식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집안이 부유하고 학식과 권력이 있는 여인들의 이미지와는 좀 다른 느낌이 든다. 인니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좀더 서민들의 삶과 더 가까워 보인다. 인도네시아의 평범한 대다수의 여인들과 파파야는 어쩌면 같은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눈에 비추인 한 인니 여인의 삶이 묘하게도 전에 살았던 찌까랑 (Cikarang) 우리집 창문으로 보였던 파파야 나무와 오버랩 되어 보였다.
 
지금 땅거랑 베에스데에 있는 어느 국제학교의 교감으로 재직하며 나는 잘 살고 있다. 그리고 우쭈의 식구들을 보면서 옛날 생각도 가끔하며, 이제 내가 진 빚을 갚아야 할 때가 온 것을 느낀다. 일요일 이른 아침 가끔 아빠의 오토바이에 3식구가 함께 타고 마실 가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이 참 기쁘기 그지없다. 창문을 통해 그들을 바라보면서 한 편의 시를 써본다.
 
 
창문과 파파야 / 김재구
 
고향 떠나 머나 먼 도심의 한 귀퉁이 어쩌다 사람 집 창문 아래 자릴 잡고 살았다.
이글거리는 무자비한 열대의 태양 아래 눈물도 메말라 무슨 말도 없이 어린 파파야 지쳐서 고개만 숙였다.
 
어제는 하늘이 부서져 내리 듯 굉음의 번갯불이 일고 마치 바다가 쏟아지 듯 억수 같은 비를 퍼부을 때 백만개의 빗방울들 온 몸으로 맞아 손가락을 벌려 파파야는 아파도 두 눈 감고 춤을 추었다
 
발리에는 화산이 끓고 자바에는 애간장이 끊고 고양이는 창문 넘어 흔들리는 파파야 잎사귀들을 무심히 바라보는데 나는아무도 모르게 커튼을 쳤다. 내일 아침 그녀에게 도란도란 매달릴 아이들은 눈물의 열매임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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