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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제2회 적도문학상 성인부 수필부문-가작(한국문협인니지부상) / 양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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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047회 작성일 2018-06-28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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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적도문학상 성인부 수필부문-가작(한국문협인니지부상)
 
아버지, 자카르타에서 만난 또 다른 나
 
양동철
 
2년쯤 전에 자카르타에 부임한지 6개월 만에 아버지, 어머니가 아들 내외와 손녀들을 보기 위해 이 곳에 오셨다.몇 달만에 만난 부모님과 공항에서 반가운 해후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나도 물론이지만 집에 있던 두 손녀들도 이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가방에 가득 담아 오신 그 어떤 선물보다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공항에서 밤 늦은 시각에야 집에 들어왔고, 그 동안 못 다한 이야기를 하며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들었기에 다음날 아침에는 해가 꽤 높이 떠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일어나 보니 아버지, 어머니는 이미 아파트 구석구석과 동네 주변 산책을 다 마치신 뒤였다. 아침식사를 하시면서는 아파트 후문이 어디 있는지, 새벽시장이 어디에서 열리는지도 알려 주셨다. 이미 몇 개월을 거기 살았던 아들 며느리도 잘 몰랐던 정보들이다. 
 
아버지는 며느리에게 인도네시아말로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산책 중에 만난 경비와 아파트 직원들과 인사를 해야겠는데 인사말을 몰라서 아쉬우셨던 모양이다. 그러고서는 며느리가 공부하는 인도네시아말 책을 들고 여러 가지 표현들을 물어 가시면서 한글로 종이에 줄줄이 적으셨다. 두 주 정도 인도네시아에 머무시면서 쓰실 표현들을 알아두고 익히시는 것이다.
 
그 다음부터 아버지는 아침저녁으로 아파트와 동네 주변을 돌아다니시면서 도움이라도 받거나 사람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웃으며 ‘슬라맛빠기’, ‘슬라맛소레’, ‘뜨리마까시’ 하며 반갑게 인사를 하셨다. 
그렇게 다니시다가 혹시 길이라도 잃지 않으실까, 차나 오토바이하고 부딪히지는 않으실까 걱정되기도 하였지만 아버지가 즐거워 보이셔서 그냥 맘을 편히 먹기로 하였다. 숙소가 마을 가운데 있었던 발리 가족여행에서도 그러셨다. 아침 산책에서 만나는 구멍가게 주인하고도 이빨 빠진 동네 할머니하고도 그렇게 얼굴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영어를 못하신다. 유년시절에는 형편이 그나마 괜찮았다고 했는데, 집안에 사정이 생겨 공부할 기회가 없으셨다. 해외경험도 많지 않으시니 외국에 나갈 일이 생기면 아들이나 며느리가 꼭 붙어서 안내를 하던지, 아니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주는 안내자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상황에 맞닥뜨려 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다.
 
7년 쯤 전에 말레이시아에서 유학할 때의 일이다. 그 때도 부모님이 2주 정도 쿠알라룸푸로 오셔서 우리 집에 머무신 적이 있다. 하루는 차를 몰고 시내 구경을 했는데, 얼추 둘러보고 집에 돌아가려 하니 우리끼리 먼저 집에 돌아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무슨 말씀이신가 하고 아내와 함께 어리둥절해 있었다. 아버지 말씀인즉 두 분이서 시내를 좀 더 둘러보고 전철로 집에 찾아오시겠다는 것이다. 한두 번 함께 전철을 탄 적은 있지만 영어도 말레이어도 안 되고 해외 경험도 없으신데 두 분이서 쿠알라룸푸르 시내를 둘러보고 집을 찾아오신다고? 길이라도 잃으시면 어떻게 하나 걱정스런 마음에 몇 번이나 거듭 정말 괜찮으시겠냐고 물었다. 만류해 보기도 했지만 결국 아내 전화기를 내 드리고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다 적어 드린 후 아내와 아이들만 데리고 집에 왔다. 전철은 어떤 역에서 타고 내려야 하는지 육교는 어떻게 건너야 하는지 자세히 알려드린 것은 물론이다.
 
잘 찾아오실까, 무슨 일은 없을까 하며 약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네 다섯시간 정도 기다리니 아버지 어머니가 웃으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아들 며느리에게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신 표정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두 분이서 시내 차이나타운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재미있게 둘러보고 아들이 일러준 대로 전철 타고 집에 찾아오신 것이다. 여기저기 다니시는 중에 소나기가 와서는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서 아이스크림도 사서 드시면서 그 지붕에서 비도 잠시 피하셨더란다. 

사진도 서로서로 찍어주기도 하고 길가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두 분이 함께 찍기도 하셨다. 
두 분이 그렇게 쿠알라룸푸르 시내에서 짧은 데이트를 즐기는 장면들을 생각하니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짝 눈물이 핑 돌기도 하고, 입가에 웃음이 지어지기도 하였다. 아들이 부모에게 할 수 있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아버지 어머니가 자랑스럽고 대견했다. 
 
아무래도 아버지는 그 때 그 기억이 너무 좋았던 모양이다. 이번에 오셨을 때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 회사 건물을 가리키며 저기가 아들이 일하는 회사라고 알려드린 적이 있다. 하루는 집에서 저기 보이는 아들 회사까지 걸어가면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보시는 것이 아닌가? 자카르타에 살면서 한 번도 다르마왕사 집에서 스망기 근처에 있는 회사까지 걸어가 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물어보시니 좀 당황스러웠다. 거리는 칠 킬로미터 정도라서 두 시간 정도면 걸어갈 수도 있겠지만 자카르타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걸어다니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다. 대중교통이나 보행자를 위한 인도가 턱없이 부족해서 걸어가실 수 없다고 말씀드리니 수긍하시면서도 못내 아쉬운 표정이시다. 아들 회사에 두 분이 한 번 걸어가 보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해외로 여행을 가면 음식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또래 친구나 동료 분 들과는 달리 현지 음식에 도전하는 것을 무척 즐긴다. 특히 아들네를 오실 때면 현지인들이 먹는 소박한 식당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시켜 아들 며느리 손자들과 함께 하는 그 시간을 너무 좋아하신다. 그럴 때면 맥주 한 잔으로 살짝 붉어진 얼굴에 한 시간이고 두시간이고 흐뭇한 웃음이 떠나지를 않는다. 
 
함께 밥 먹던 낯익은 식구들과 낯선 장소에서 이국적인 정취와 음식을 즐기시는 것이 좋으셔서 그런 것이 아닐까?나도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면 한국식당에는 별로 가지 않고, 현지음식 중에서 너무 무난하지 않으면서 약간의 도전이 필요한 곳을 일부러 찾아가기도 한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말레이식 인도음식이나 중동음식을, 자카르타에서는 빠당 음식, 발리에서는 특산품인 아얌버뚜뚜나 바비굴링에 도전하였다. 익숙한 한국음식만큼 모든 음식이 편하지는 않으셨겠지만 결코 입맛에 맞지 않다고 숟가락과 포크를 내려놓으시는 일은 없었다.
 
결혼하기 전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았으니 아버지와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버지를 얼마만큼 알고 얼만큼 이해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자신이 없다. 여기 자카르타에서 만난 아버지는 새롭다. 모든 자식이 그렇겠지만 뵐 때마다 조금씩 늙어가시는 모습에 가슴이 아프기도 하다. 하지만 새로운 장소와 문화, 사람들 속에서 여전히 호기심을 가지고 새로운 경험을 즐거워하시는 것을 보면 아버지는 여전히 젊다는 생각을 한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길가다 만난 사람들하고도 내 친구들하고도 그렇게 거리낌이 없이 웃으시며 반가이 인사하시는 것을 보면 아버지 안에는 아이도 있고 젊은이도 있다.
 
난 아버지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뉴스를 보고 신문을 보며 세상에 대한 관심을 키워갔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의 영향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것에 대해 알아가고 그걸 나누길 좋아하셨다. 단지 형편이 어렵고 7남매의 맏이라는 상황 때문에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하셨을 뿐이다. 아마 기회가 주어졌다면 아버지는 온 세계를 누비며 꿈을 펼치셨을 것이다.
 
자카르타에서 다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가 영락없는 우리 아버지 아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언어와 문화, 생각에 대해 알아가는 것을 즐거워하는 내 피는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다. 아버지는 얻지 못한 기회에 대해 원망이 없으셨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적이 있다. 아들이지만 아버지 마음을 다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갈 수 없었던 길에 대한 회한 같은 것을 들은 적은 없다. 아버지는 누구를 원망하기 보다는 아들과 손자들이 지금 당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더 넓은 세계로 나가 부딪히며 사는 것을 그저 흐뭇해하시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제라도 아들을 통해 아들이 맞닥뜨리는 새로운 문화를 조금이나마 엿보며 함께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 즐거우신 것이고.자카르타에서 그렇게 아버지는 아들의 눈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보고, 나는 아버지에게서 또 다른 나를 만났다.
 
*** 수상소감 
 
새로운 곳에 살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생각의 샘이 터진다.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참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 삶의 방향이 조금씩 바뀌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전의 삶이 오답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겉으로 보면 딱딱해 보이지만 그런 면에서 은행원으로서의 삶이 나쁘지는 않다. 태어나서 26년 동안 거의 한 동네에서 움직이지 않고 살다가 입행하고서는 15년 지겹게 돌아다녔다. 앞으로도 한참 남았는데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 만나고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공부하면서 얻은 새로운 생각들 글로 쓰며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똑똑하고 일 잘한다는 말보다는 나와 함께 생각을 나누는 분들로부터 내가 뭔가 새롭고 다르고 특별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더 기분 좋다.
 
오래 만났고 너무 익숙한 얼굴이지만 새로운 곳에서 만나면 뭔가 좀 다르게 다가온다. 가족도 그렇다. 태어나서 26년을 함께 살았고, 가정을 꾸린 후에도 자주 뵈었던 아버지, 어머니를 쿠알라룸푸르에서 그리고 자카르타에서 뵈니 새로웠다. 아버지의 눈으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꿈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글이 되었다. 아버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큰 선물인데 덤으로 그 생각을 쓴 글이 입선까지 하게 되었다. 불혹을 넘은 나이이지만 아버지가 이 아들을 자랑스러워 하실 것 같다. 상을 타서가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것을 보실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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