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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제2회 적도문학상(학생부) 수필부문 장려상(한국문협인니지부상) /김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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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083회 작성일 2018-06-28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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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적도문학상(학생부) 수필부문 장려상(한국문협인니지부상)
 
내가 살아가는 세상
 
김도아 (JIKS 10) 
 
나는 11월 가을의 쌀쌀한 바람과 살랑살랑 대는 단풍잎은커녕 햇살이 내리 쬐는 날씨에 태어났다. 나는 그저 평범함에 화목함을 더한 가족의 철없는 막내였다. 나는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나라에서 태어나 살아왔다. 그리고 난 그 해가 오기 전까지는 내가 사는 나라가 외국 같다고 느낀 적이 없다. 그냥 우리 나라 라고 생각을 했다. 추억을 더듬어 보면 나는 오로지 이세상의 주인공은 나인 것처럼 살아왔던 것 같다.
 
나는 유치원 때만해도 아주 지극히 평범하고도 좋은 추억들만 간직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난 한국인들이 다니는 유치원에 다녔고, 항상 매사에 적극적 이였으며, 항상 친근하게 먼저 인사도하고 장난도 치며 7살까지 잘 살아왔던 것 같다. 내 기억 속에 나는 굉장히 활동적 이여서 여자아이지만 남자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7살 유치원을 졸업하기 전까지 어린 내가 느끼기에 내 삶은 완벽했고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하지만 어릴 적 내 삶을 바꿔놓은 일이 일어난 건 바로 유치원 졸업 이후였다. 나는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큰언니와 오빠는 유치원 을 졸업하자마자 이 나라에 있는 한국 국제 학교로 입학을 하였다. 나도 당연히 그 학교로 갈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온 가족이 모인 곳에서 엄마와 아빠는 내가 외국학교로 입학을 할 것 이라는 제안이 아닌 통보를 내렸다. 엄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도아야, 엄마는 네가 외국학교로 가서 공부하며 언니와 오빠와는 다르게 특별한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어.”“..응” 나는 특별하다는 단어가 좋았다. 남들 보다 더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언니와 오빠를 챙기느라 쏠린 부모님의 관심이 나한테 올 것만 같았다. “거기서 공부를 하면 영어도 더 늘 거야. 당연히 인니어도 늘겠지.”나의 대답은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 생각들에 잠겨있었다. ‘이제 친구들과 떨어지게 되는 건가..’,  ‘왜 나만 혼자 떨어지는 걸까..’ 하며. 그렇게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자고 일어나 정신차려보니 나는 이미 그 학교로 들어가기 위한 시험과 면접을 보고 입학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 학교를 면접시험 보러 처음 들어갔을 땐, 정말 너무 낯설고 어색했다. 그때부터 내가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을 구별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나와는 다른 언어로 대화를 하는 사람들. 나를 보며 한국이랑 인도네시아 중에 어디가 더 좋냐는 질문들. 그런 것 들이 나를 내가 사는 나라와 내가 속한나라를 구별하게 만든 것 같다.
 
드디어 그 학교로 처음 전학 가는 날이었다. 첫날부터 최악 중에 최악이었다. 첫째, 나는 바로 초등학교 로 들어갈 줄 알았지만 신청이 늦어 유치원을 다시 다녀야 된다고 했다. 그러니 나는 나보다 한 살 이나 심지어 두 살 어린 아이들과 지내야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뭐 괜찮은 것 같지만, 그 당시에는 푸른 하늘에서 나에게만 날벼락이 떨어지는 듯 한 느낌이었다. 둘째, 나는 첫날부터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이 인니어로 무엇인지를 몰라 화장실을 못가고 있었다. 그때 우리 반에 한국인 남자애가 있어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야, 나 화장실을 가고 싶은데 말을 못하겠어. 네가 선생님께 좀 말해주라” “그냥 조금만 기다려 그럼 이 시간 끝나고 화장실 갈 수 있을 거야.” “나 너무 급한데..” “조금만 참아.“ 그 친구는 전혀 나에게 무관심 이였다. 그래서 나는 어쩔 줄을 몰라 몇 분 동안 최대한 숨도 참아보고 최대한 신경을 안 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종이 쳤을 땐 이미 늦어버렸고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내 어릴 적 기억에서 절대 지울 수 없는 일이 전학 첫날부터 생겼다. 셋째, 난 낯선 사람들이 말하는 낯선 언어를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누가 말을 걸어도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같은 반에 한국인 남자아이가 있었다. 난 대화할 사람이 그 아이 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 나를 스스로 외국인들 사이에 나를 외톨이로 가둔 것 같은 느낌이 든 것 같다 .그렇게 난 남들과는 좀 다른, 비극적인 새 학기 첫날을 맞이하였다.
 
나는 그 학교로 전학을 간 이후, 나랑 다른 것은 전혀 없어 보였던 사람들이 나와는 무언가가 달라보였고, 나와는 전혀 다른 나라의 사람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나는 외톨이가 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정말 힘들게 버텨왔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매일 내가 전학 온 이후로부터 날짜를 샜다. ‘5일째야, 조금만 더 힘내자’ , ‘6일째야, 오늘 하루만 버티면 주말이야’.. 이렇게 아침마다 등교를 하며 날짜를 샜지만 시간은 야속하게도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리게 가는 것만 같았고, 날짜는 아주 느리게 더해졌다. 그렇게 나의 외국에서 살아가는 삶이 시작이 됐다.
 
나는 바람을 느끼는 것과 바람과 함께 걷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만 되면 교실 창문 밖을 바라보는 것이 내 일상이었고 나에게는 유일하게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바람도 많이 불고 바람의 세기도 하루하루마다 다른 인도네시아가 좋았다. 하지만 난 전학 가서 처음부터 창문 밖을 바라보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창문 밖의 바람과 친해진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 부터였다.
 
나는 하루하루 학교를 힘들게 버텨서 집에 도착했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1학년. 다른 아이들은 학교에서 즐겁게 지낼 시기에 난 매일을 힘겹게 버텨왔다. 한 시간 한 시간씩 버티다 보면 어느새 하교시간이 다가와서 좋았다. 집은 나에게 은신처와도 같은 곳이다. 힘든 나를 세상으로부터 숨겨주고 내일의 걱정은 내일로 미뤄두게 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집에는 부모님이 맞벌이 부부여서 안계셨고, 우리와 10년 넘게 함께 생활한 도우미 아주머니가 계셨다. 내가 학교를 다녀오면 나를 반겨주고 오후 때까지 같이 시간을 보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 오면 누군가가 날 반겨준다는 생각에 항상 학교 끝나고 일분이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난 초등학교 때 가족들과의 추억은 별로 없다. 언니와 오빠는 학교가 나와는 다르고 학교가 멀어 항상 늦게 오고, 학교를 갖다오면 레슨을 하기 때문에 난 말을 걸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엄마도 일하고 오시면 피곤하신지 나에게 관심이 없으셔서 적응하기 힘들다고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장난기가 많은 오빠는 불난 집에 불붙이듯 왜 그런 학교에 다니냐며 오빠의 학교와 내 학교를 비교해가며 놀렸다. 나도 다니고 싶어서 다니는 게 아닌데.. 그래서 학교의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감은 점점 커져갔다. 학교에 있는 사람들도 다 싫었고 특히나 수업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래서 난 학교에 갈 때면 항상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쿵쾅거리고 땀이 났다. 그래도 죽지 말라는 법은 없는지 나에게도 친구들이 생겼다. 그래서 나는 조금씩 학교에 대한 마음을 열었다. 수업시간에도 열심히 들으려고 노력을 하고, 또 많이 웃었다. 난 웃는 게 너무 좋았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선생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선생님이 농담을 하시면 다른 아이들보다 더 크게 웃었다. 그리고 2학년 때, 나는 반장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뭐든지 열심히 하고 친구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외국생활을 즐겼던 것 같다.
 
어느 날 아침, 반에서 아이들이 읽다가 정리를 안 한 너저분한 책들을 책꽂이에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떄 선생님이 다가오셔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학교에서 처음으로 담임선생님에게 진심이 담긴 칭찬을 들었다.
“도아야 넌 아주 굉장한 아이야, 항상 아이들을 섬세하게 챙기고 책도 정리해주는 모습이 너무 좋아. 넌 지금처럼 뭐든지 열심히 하면 앞으로 더 좋아질 거야. 네가 아직 표현이 서툰 거 알아. 하지만 선생님 눈에는 네가 모두를 사랑하는 게 보여.”
 
난 그 칭찬에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학교생활도 , 외국에서의 생활도 더욱 재밌어졌다. 그러나 시간은 야속하게도 빠르게 흘러갔고, 2학년을 마치게 되었다. 나는 2학년이 끝나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담임선생님이 멀리 떠나시거나 친구들이 떠나는 것도 아닌데 나는 어린마음에 헤어지는 게 싫었는지 방학식을 마치고 집에 와서 침대에 누워 베개를 얼굴에 덮고 베개에 물이 흥건해 질 때까지 울었다. 그러자 도우미 아주머니가 와서 나를 위로 해주셨다. “도아야 사람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야.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고, 아니면 새로운 사람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거야. 학년이 바뀐다고 선생님이 어디로 사라지시는 건 아니잖아. 항상 그곳에 있을 거야.” 라고 인니어로 나에게 위로해준 그 말이 정확히 한 글자 한글자 내 머리 속에 새겨졌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3학년은 그럭저럭 적응한 것처럼 지내왔다. 그래서 나는 점점 외국생활에 적응을 조심씩 한 것 같아 기뻤다. 그러나 3학년이 지나고 4학년이 되었을 때, 나랑 가장 친한 친구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정말로 난 반쪽을 잃는다는 느낌을 이때 처음 안 것 같다. 일상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이 떠나가니 정말 모든 게 공허해 진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되도, 수업시간이 되도, 그 친구와 함께했었던 것이 지금은 다른 친구들과, 혹은 혼자 해야 돼서 매우 슬펐다. 항상 점심시간이면 강당에서 뛰어놀거나 도서관에서 함께 책 읽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젠 다른 친구들과 해도 재밌긴 하지만 뭔가가 비어있는 느낌이 크게 들었다.
 
그래도 학교생활을 그럭저럭 버티며 하고 있었으나 며칠 후, 설상가상으로 도우미 아주머니가 집을 나가셨다. 내가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평생 내 곁에 일을 것 같았던 분이 나를 떠나갔다. 그래서 난 그때부터 조금씩 다시 외국인들과 나 사이에 벽을 만들어 나를 또 혼자 가둔 것 같다. 그 무렵 즈음 나는 교회나 같은 동네에 사는 한국인 언니들과 친해져 더 한국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이 생겼다. 그래서 일까, 학교에서 외국인들과 소통하는 게 더 어려워 졌고, 집에도 새로운 아주머니가 오셨지만 몇 달만하고 관두셔서 이제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항상 나 혼자 뿐이었다. 그래서 난 더 동네 언니들과 놀러 나갔고, 그러면서 점점 외국인들과 의 접촉이 없어졌다, 그리고 외국학교에 다니고 있는 내가 너무 싫었다. 그래서 외국 친구들 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외국 생활이 너무 힘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외국생활을 하는 것이 싫어 진 계기는 바로 5학년 내생일 이었다. 난 아침에 혼자 눈을 떠야 했고, 혼자 학교를 갈 준비를 하며 혼자 차가 올 시간을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혼자 집 키를 들고 집을 나와 집 문을 잠그고 학교로 가야했다. 그날은 어떤 외국인 아주머니가 나의 등하교를 도와주셨다. 등교 할 때 까지만 해도 그냥 그럭저럭 기분이 조금은 우울한 정도였다. 그리고 학교에서 몇몇 친구들에게 생일을 축하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 까지만 해도 기분이 괜찮았다.
 
그러나 하교시간이 되자, 날 데리러 오시는 외국인 아주머니와 내가 하교 문제로 의견 갈등이 생겼다. 난 최대한 그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이해하려고 했으나 그 아주머니의 사투리가 섞인 인니어는 정말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그 아줌마가 계속 말을 하고 있는데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그게 싫으셨는지 같이 타는 많은 친구들 앞에서 나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셨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쏘리” 라고하고 내리긴 했지만 너무 서러웠다. 다른 날도 아닌 내 생일에 그것도 내가 못 알아들었다는 이유로 무조건 사과해야 되는 게 싫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그날 난 집에 와서 왠지 모르는 서러움과 우울감 때문에 침대에 누워 배게를 얼굴에 덮고 울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집에는 날 위로해주는 사람하나 없었다. 가족들은 다 학교로 가거나 직장을 가고 도우미 아주머니는 안계시기 때문이다.
 
난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억울하게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 너무 억울하고 서러운 감정이 들어 충돌 적으로 살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뭐라고 그러나 싶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내 속에서 몇 년 동안 힘들어왔던 내 감정들이 내뿜어져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말았다. 나는 커터 칼을 들고 손목을 베었다. 하지만 역시나 나도 겁쟁이 이었는지라 첫 번째로 그을 때는 그렇게 세게 긋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서러움을 무의미하게 끝낼 거냐는 말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아서 난 다시 한 번 더 세게 그었다. 그러자 커터 칼은 내 손목을 거쳐 내 허벅지에 깊이 통과해 멈추었다. 그래서 난 당황스러우면서도 너무 되는 일이 너무 없는 게 서러워서 그 자리에서 더 울었다. 근데 그때 때마침 엄마가 집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그래서 나는 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가 화장실 문을 잠그고 소리가 최대한 안 나게 울었다. 그런데도 내 울음소리가 들렸는지 엄마가 무슨 일 있냐면서 화장실문을 조심히 두들겼다. 나는 그 순간 엄마에게 솔직하게 다 털어놓을까 아니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할까 고민을 하다가, 엄마도 일하고 오시느라 힘드신데 내가 더 힘들게 할까봐 그리고 그런 사소한일로 이런 일을 저지른 것 같아 그냥 엄마한테 넘어져서 상처가 나서 울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힘든걸 아는지 모르는지 내게 소독약을 주며 상처에 소독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나 5학년이 끝나고 6학년이 될 때, 난 학교 창문 밖을 바라보면서 이 학교에만 평생 갇혀 있는 듯 한 느낌이 싫어서 용기를 내어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나는 집에 가서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했지만 말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그동안 힘들었던 것이 내 머릿속에 필름처럼 지나갔다. 그래서 난 울면서 가족들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전학을 가게 되었다. 전학을 가면서 우리가족은 나 때문에 많은 비용이 필요해서 집을 팔고 이사를 하게 되었고, 난 이층집 주택에 내방이 생겼고 뭔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몇 주후, 나는 한국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고 그 학교에서는 전학 첫날부터 모든 것이 좋았고 한국인들이 많아 한국어로 대화를 많이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외국학교에서의 기억들은 모두 내 허벅지에 있는 흉터처럼 보고 싶지는 않은 아픈 기억들 로 남았다. 그러나 뭔가가 끝난 듯 한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그렇다. 내가 한국 학교로 전학 오고 나서 나의 외국 생활은 그렇게 끝이 난 것 같았다. 아무리 외국에 살고 있어도 항상 한국인들과 접촉을 하기 때문이다. 학교를 가도 한국인, 집에도 한국인, 식당을 가도 교회를 가도 한국인뿐이었기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외국학교에서 같은 반 이였던 친구들과 연락이 닿았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답해야 될지를 몰라 되도 않는 영어를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메시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친구가 말하기를 친구들 모두가 나를 그리워하고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심지어 몇몇 여자 아이들은 내가 전학을 가고 나서 울었다는 것이다. 그때 난 깨달았다. 외국 친구들은 다 마음을 열고 있었는데 나 혼자서 나를 꽁꽁 감추고 마음을 열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정말 외국에 사는 것 같던 나의 외국생활들이 그리워졌고 정말 좋은 다시는 겪어보지 못할 경험이라는 걸 느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쓰면서 외국 생활을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 하게 됐는데 그건 바로 그 나라의 현지인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인들과만 소통하려고 하고 정을 쌓으려고 했던 내가 너무 어리석었고 부끄러웠다. 다시 시간을 돌린다면 난 더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조금 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만, 지금부터 더 좋은 외국 생활을 즐기면서 살면 되는 게 아닐까 싶다.
 
*** 수상 소감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 제2회 적도문학상 청소년부문 에서 장려상을 받게 된 김도아 입니다. 일단 가장 먼저 드리고 싶은 말은 이번 공모전을 통해 저 같은 글 쓰는걸 좋아하지만 용기가 안 나거나 실천하기가 어려운 사람에게 글을 쓰는 것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말 엉성한 실력으로 솔직한 이야기만 썼을 뿐인데 이런 귀한 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제가 쓴 이야기는 저의 초등학교 시절에 대한 이야기 인데, 그 시절에 제가 인도네시아에서 살면서 느낀 것들 과 경험한 것에 대해 쓴 글입니다. 왜 굳이 초등 학교때 이야기를 중심으로 썼냐하면, 저는 초등학교때 외국학교에서 생활을 하며 가장 외국에서 산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인이 많은 지역에 살다보니 어딜 가도 한국인이 보여서 여기가 타지가 아닌 한국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주제에 걸맞은 외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외국인들과 함께 타지에 교류하며 생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외국학교를 다니며 외국인들과 가장 교류를 많이 했던 초등학교 시절 중심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외국학교를 다니면서 겪은 경험들 중에 행복한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너무 힘들었고 홀로 외국에 동떨어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초등학생 때의 생각과 이기적 이였던 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이 글을 쓴 목적중 하나는 솔직하게 제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어릴 적 가족들에게도 이야기 하지 못했던 그때의 경험을 솔직하게 적었고, 글을 쓰면서 마음속이 후련해지고 어릴 적에 내가 이런 사소한 것 때문에도 많이 힘들었구나 라며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 그리고 제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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