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회 적도문학상 소설 부문 우수상] 당신의 신호등은 안녕하신가요?/김보미 >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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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제 7회 적도문학상 소설 부문 우수상] 당신의 신호등은 안녕하신가요?/김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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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2회 작성일 2025-09-2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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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신호등은 안녕하신가요? 



“이 대리,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뭐야? 입사한지 벌써 5년 차인데 고객사한테 나갈 PPT 자료를 이따위로밖에 못 만들어? 내가 일부러 이 대리한테 믿고 맡긴 건데, 이제 짬 좀 찼다고 대충하는 거야?”


조용한 사무실 안, 김 과장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다들 아무것도 못 들었다는 듯 모니터에만 시선을 집중했다. 승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자리로 돌아온 승희는 직장 동료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좋게 말해도 다 알아 듣는데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거야? 하여간 성질 더러운 꼰대라니까.’


마음속에 있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어금니에 힘을 꽉 주고 반려 당한 PPT를 서둘러 수정하기 시작했다. 출근 전에 먹은 몸살 감기약 때문에 머리가 몽롱해서 쉬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PPT를 기한 내에 다시 끝내려면 잠깐의 휴식은커녕, 물 한잔 마실 시간도, 화장실 갈 시간도 아껴야 했다.


“대리님, 식사하러 안 가세요?”


갑자기 귀 옆에서 들려온 민지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승희는 그제야 시계를 확인했다.


“뭐야, 벌써 12시네? 어휴, 민지 씨, 오늘은 나 빼고 먹고 와. 난 아침부터 과장님한테 혼났더니 입맛이 뚝 떨어져서 말이야.”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민지에게 어서 가라는 손짓을 한 후 두 팔을 모아 책상 위에 엎드렸다. 순간 지난 주말에 길을 걷다가 본 바람 빠진 행사용 풍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풍선에게 자아가 있다면 지금 나와 같은 기분이 아니었을까? 승희는 너무 피곤하고 지쳐서 이대로 바람이 빠진 채 축 늘어져있고 싶었다.


삐빅- 삐빅-


10분으로 맞춰 놓은 타이머가 울리자 승희는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키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손바닥으로 두 뺨을 때렸다. 탕비실에 있던 믹스커피를 3개나 타서 홀짝 홀짝 마시자 조금은 졸음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단 1분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고 일에만 몰두했더니 다행히 꼴찌로 퇴근하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승희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퇴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에서 무리를 한 탓인지 오늘따라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다리는 퉁퉁 부어서 부서질 것 같고 발바닥에는 불이 나는 것 같았으며,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있는 팔은 아래로 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게다가 허리는 어찌나 아픈지 몸을 똑바로 세우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리려면 아직 40분이나 남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앉을 자리가 없었다. 승희는 바로 앞에 편하게 앉아 이어폰을 꽂고 자는 척을 하는 남자가 괜히 얄밉게 느껴졌다.


‘저 체격이면 1시간은 거뜬히 서서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나처럼 힘든 사람한테 양보 좀 해주면 안 되나?’


하지만 차마 앞에 있는 남자를 깨워 비켜달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임산부도, 노인도, 장애인도 아닌 승희가 다른 사람에게 비켜달라고 하기엔 너무 큰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노약자석을 꽉 채우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한테 가서 “제가 나이는 젊어도 지금 상태는 송장이나 마찬가지거든요. 그러니까 비켜주시면 안될까요?”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그런 짓을 했다간 젊고 멀쩡해 보이는 승희의 겉모습만 보고 누군가가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을 테니까.


아픈 다리를 배배 꼬며 겨우 버티던 승희는 문득 억울한 마음과 함께 대학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무거운 전공책을 몇 권이나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버스에 탔는데, 막걸리 냄새를 풀풀 풍기는 등산객들이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어서 서서 갈 수 밖에 없던 기억들. 평발 때문에 족저근막염을 달고 살던 승희는 등산이 가능한 그들의 튼튼한 발이, 그리고 굳이 사람 많은 등하교 시간에 자리 차지를 하는 그들의 행동이 미울 때가 많았다. 큰 병은 없지만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를 자주 하던 자신의 허약한 몸을, 척추측만증 때문에 한때 운동치료를 해야만 했던 자신의 허리를 그들이 알아주길 바랐다. 나이가 젊어도 서있는 게 힘들 수 있다고, 당신들이 취미로 하는 등산을 나는 발이 아파 꿈도 못 꾼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성격이 소심했던 승희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한 채 그저 일어날 수 없는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상상하기만 했다. 공상과학 영화처럼 사람들의 머리 위에 신호가 뜨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당장 런닝이라도 뛸 수 있을 것처럼 팔팔한 사람은 초록색, 그렇지 못한 사람은 노란색, 지금 바로 쉬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사람은 빨간색으로. 마치 사람이든 차든 초록불에선 가고, 빨간불에선 멈추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에 그런 게 있다면 지금 내 상태는 빨간불일 텐데. 그럼 그 빨간불을 본 사람들이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주겠지?


승희는 순간 너무 허무맹랑한 상상이라는 생각에 피식 웃고 말았다.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아마 50년 후에도 그런 건 안 생길 걸?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젓고선 다시 정면을 바라봤는데, 앞에 앉아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바로 그 자리에 앉으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임자는 따로 있었다.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어유, 이거 고마워서 어쩌나? 총각, 내가 가방 들어줄 테니까 가방 이리 줘요.”


잠깐의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자 기분이 저 아래로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틀렸다고 생각하며 돌덩이 같은 다리를 힘겹게 움직여 다음 칸으로 이동했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빈자리를 찾아서.

----


“어휴, 하마터면 늦을 뻔했네. 얼른 씻고 나가야지.”


승희는 알람이 5분 간격으로 4번이나 울린 후에야 허겁지겁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어제 지하철에서 오래 서있었더니 온 몸이 근육통으로 말썽이었고, 자기 전에 먹은 감기약 덕분에 몸살기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머리가 무겁고 목 안쪽에서는 통증이 느껴졌다. 오늘이 주말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거울을 바라본 그 순간, 승희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만 입에 물고 있던 칫솔을 세면대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이게 도대체 뭐야?”


승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두 손을 정수리에 갖다 댔다. 손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 곳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마 끝에서 반 뼘 정도 떨어진 그 곳에, 라임색이 살짝 섞인 밝은 노란 빛이 선명하게 일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내 눈이 이상한 건가? 이런 게 왜 내 머리 위에 있냐고!”


마음 같아서는 이게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내고 싶었지만, 시계를 보니 출근 준비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 말도 안 되는 불빛 때문에 늦었다고 얘기했다간, 또 김 과장한테 한바탕 혼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승희는 급하게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와중에도 주변에 보이는 다른 불빛들을 외면하며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지금 피곤해서 그래. 컨디션도 안 좋고 잠에서 덜 깨서 헛것이 보이는 걸 거야.’


하지만 지하철에 탄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승희와 똑같이 형형색색의 불빛들이 일렁이고 있었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 눈에도 그것이 보이는 건지 불빛이 덜 붉은 사람이 더 붉은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해주고 있었다. 승희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스마트폰을 켜고 인터넷에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승희는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 하루에 10분만 따라하면 누구나 녹색불이 될 수 있는 운동 루틴 세 가지!

- 인간적으로 초록불은 병원에 좀 오지 마라. 안 그래도 대기시간 긴데 건강한 사람들이 왜 자리 차지를 하고 있냐?

- 건강 밥상 추천! 노란불이던 제가 식단을 바꾸고 점점 녹색불이 되어가고 있어요!


잠깐 검색했을 뿐인데 인터넷 커뮤니티와 유튜브에 머리 위 불빛과 관련된 컨텐츠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는 일주일 전에 올라온 글도 있었고, 심지어 한 달 전에 올라온 것도 있었다.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 불빛 따위 없었는데, 승희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민지 씨! 이거 지금 내 눈에만 보이는 거 아니지? 민지 씨 눈에도 내 머리 위에 있는 이 노란 불빛이 보여?”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친한 민지를 붙잡고 허겁지겁 물었다. 민지는 고개를 갸우뚱 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대리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요새 일이 너무 많아서 깜빡깜빡 하시는 거예요? 어휴, 그러고 보니 대리님 머리 위의 신호등이 어제보다 조금 더 노랗게 변했네요. 어제는 갓 움튼 새싹처럼 파릇파릇한 연두색이시더니.”


“뭐라고? 어제는 연두색이었다고? 민지 씨, 그게 무슨 소리야?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 거 없었잖아! 나 이런 거 재미없으니까 장난 그만 해!”


“장난이라뇨? 저번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 현상이라고 정부에서 공식 발표한 뉴스도 저랑 같이 보셨잖아요. 그 때 대리님이 상상만 하던 일이 현실로 벌어졌다고 엄청 좋아하셨던 거 기억 안 나세요?”


승희는 자신만 모르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에 민지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민지의 말에 의하면 이 현상이 처음 일어난 게 벌써 두 달 전이고, 정부에서 정한 복잡한 명칭은 따로 있지만 사람들은 이 불빛을 그냥 ‘신호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처음에는 신호등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동요하고 심지어 음모론을 펼치는 사람들까지 등장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자신과 타인의 컨디션을 한 눈에 알 수 있어 편하다는 사람이 대부분이란다. 승희는 얘기를 다 듣고도 이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나를 속이려고 짜고 치는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날, 퇴근 후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승희는 생각에 잠겼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잘 된 거라고 생각하자. 어차피 이게 바로 내가 바라던 거였잖아.’


오랜만에 지하철에 자리가 하나 났길래 얼른 가서 앉은 후 탄탄하게 엉덩이를 받쳐주는 지하철 좌석의 편안함을 만끽했다. 비록 좁고 딱딱한 좌석이었지만 서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했다. 


‘그래, 바로 이거지. 나 같은 사람이 앉아서 가야 맞는 거잖아. 안 그래도 회사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몸까지 힘든데 내가 굳이 서서 가야겠어?’


하지만 그 행복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지 겨우 5분밖에 안 지났는데 앞에 있던 어떤 아줌마가 승희에게 말을 건 것이다.


“아가씨, 좀 일어나 봐요. 더 힘든 사람한테 양보도 하고 그래야지.”


고개를 들어 아줌마를 바라본 승희는 아줌마 머리 위에 있는 완두콩색 불빛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나보다 컨디션도 좋구만 왜 나보고 비켜달래?


“아주머니, 죄송하지만 제가 오늘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서요. 잘못 보신 것 같은데, 제 신호등 색깔 좀 다시 봐주시겠어요?”


“어유, 아가씨 신호등은 참 예쁜 레몬색이네. 그런데 여기 이 학생이 아가씨 대신에 좀 앉아야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어쩜 나이도 어린데 저런 색깔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내 딸 같아서 챙겨주고 싶어서 그러니까 이해 좀 해 줘요.”


순간, 아줌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앳된 얼굴의 여고생이 미안해하는 얼굴로 서있었다. 저 나이 때는 돌도 씹어 먹는다는데, 어디 다친 데도 없어 보이는 그 학생의 머리 위에는 이상하게도 선명한 주황빛이 돌고 있었다. 마치 잘 익은 홍시를 보는 것 같았다.


“어…? 아니, 학생 머리 위의 색깔이 왜….”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학생에게 자리를 양보하자, 학생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했다. 승희는 자신보다 10살도 넘게 어린 학생이 왜 자신보다 상태가 안 좋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나이 때는 남의 돈 버느라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고, 부모님이 주는 용돈 받아가며 공부만 하면 될 텐데 뭐가 힘들지? 혹시 신호등에 오류가 있는 건가?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내려야 할 정거장이 세 정거장 남았을 때, 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승희는 궁금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학생을 따라 내렸다.


“저기, 학생. 내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는데, 잠깐 나랑 얘기 좀 할 수 있어요?”


“네? 저한테 궁금한 게 있으시다고요…?”


승희는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하나 뽑아 학생에게 건넨 후, 대합실 벤치에 학생과 나란히 앉았다. 혹시 어디가 아픈지, 아니면 기분이 안 좋은지 조심스레 물어보자, 학생은 처음엔 우물쭈물하며 얼버무리더니, 진심으로 궁금해 하는 승희의 눈빛을 보고 마음을 터놓기 시작했다. 학생의 침울한 목소리를 듣자 곧 가라앉을 것 같은 난파선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냥….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만약에 아프지 않게 죽을 수만 있다면 그냥 죽고 싶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엄마, 아빠가 슬퍼하시겠죠…? 전 가끔 엄마, 아빠가 미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저 때문에 슬프게 만들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그냥 버텨 보려고요.”


“학생이 죽긴 왜 죽어요?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그나저나 도대체 왜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하는 건데요?”


“그냥 하루하루 제가 무능력하고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서요. 저희 부모님은 제가 항상 1등이길 바라시는데,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잖아요. 그래도 실망시켜드리지 않으려고 하루에 잠도 3시간씩 밖에 못 자고 공부하는데, 이번 중간고사에서 그만 전교 1등을 놓쳐 버렸어요. 그래서 엄마가 학원을 하나 더 등록 시켰는데, 그것까지 다녀오려니까 몸이 부서질 것 같아서요…. 원래는 학원에서 더 늦게 끝나는데, 오늘은 속도 안 좋고 너무 힘들어서 조퇴하고 집에 가는 중이에요. 아마 조퇴한 거 엄마한테 들키면 엄청 혼날 거예요.”


학생은 잠도 잘 못 자고 학업 스트레스 때문에 소화불량에도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오늘은 밥 먹는 시간도 아끼려고 급하게 먹다가 전부 다 토하고 말았다는 얘기에 너무 화가 나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소심한 성격의 승희였지만, 이번만큼은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공부도 적당히 시켜야지 자기 딸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공부를 시키는 부모가 어딨어요? 학생, 내가 부모님하고 얘기 좀 해볼 테니까 부모님 연락처 좀 줘 봐요. 나도 오지랖인 건 아는데, 이러다가 학생 쓰러질까봐 그래요. 어쩐지, 한창 팔팔해야 할 나이에 주황색 불빛이 떡하니 있더라니. 지금 나도 이렇게 온 몸이 뻐근하고 피곤한데, 주황불이면 도대체 몸이랑 마음이 얼마나 힘든 거야?”


“아니에요, 저희 부모님도 다 저를 위해서 그러시는 건데 제가 참아야죠. 그리고 저 이런 얘기 밖에 가서 한 거 들키면 엄마, 아빠가 속상해하실 거예요.”


반항심이라도 좀 있으면 좋으련만, 너무 착해빠진 학생을 보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생판 모르는 남의 가정사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승희는 그저 아무 말 없이 학생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학생이 집에 간다고 하길래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에 지하철 역사 내에 있는 죽집에서 죽을 한 그릇 포장해서 학생의 손에 들려주었다.


“학생, 공부하려면 체력이 있어야 되니까 밥은 꼭 챙겨 먹어요. 오늘은 속이 안 좋을 테니까 이거 가져가서 먹을 수 있는 만큼만 천천히 먹고요. 아 참, 모르는 사람이 사주는 죽 넙죽 받아왔다고 하면 엄마한테 또 혼날 수도 있으니까 같이 학원 다니는 친구네 언니가 사줬다고 해요, 알았죠?”


“고맙습니다. 아, 그리고 아까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해주신 것도 정말 감사해요. 아깐 정말 어지러워서 쓰러질 것 같았는데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학생은 몇 번이나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를 하더니 버스를 타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승희는 세 정거장이나 일찍 내린 탓에 다시 지하철을 타야 했지만 전혀 귀찮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그저 학생을 만나 대화한 일이 꿈처럼 느껴져 신기할 뿐이었다.


---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승희도 머리 위의 신호등에 완전히 적응하게 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모님과 친구들의 신호등 색깔을 확인해봤지만 다행히 걱정할 만한 색깔을 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 무슨 색깔을 지니고 있는지 구경하는 것도 하나의 재미로 다가왔다. 


그런데 단 하나 의문이 드는 건, 평소에 회사에서 큰소리만 떵떵 치는 김 과장의 신호등이 하루하루 진한 주황색이 되어가고 있다는 거였다. 며칠간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곧 민지를 통해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대리님, 모르셨어요? 김 과장님 요새 퇴근 하고나서 대리운전 뛰고 계시대요. 게다가 소문으로는 주말에도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 하신다던데요?”


“뭐? 아니, 과장님이 무슨 대리운전에 세차장 알바까지 해? 그거 그냥 헛소문 아니야?”


“헛소문 아닐 걸요? 대리운전 뛰는 건 과장님이 지난번에 직접 얘기하신 거고요, 주말에 세차장에서 알바하는 건 구매팀 현수 씨가 지나가다가 봤대요. 그리고 요새 대표님이 과장님 엄청 쪼시잖아요. 요즘 우리 팀 실적 안 나온다고 과장님이 대표로 욕 엄청 먹고 있어요. 그러니까 신호등이 저런 색깔일 수밖에 없죠.”


승희는 세 아이의 아빠인 김 과장이 대출금을 갚고 생활비를 충당하느라 고생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괜히 죄송스런 마음이 들었다. 가끔 회사에서 조는 모습을 보여주길래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피곤해서 그런 거였다니. 게다가 부하직원들 대신에 대표님한테 혼자 혼나고선 내색도 안 했던 것에 그동안 없었던 존경심마저 생길 것 같았다.


‘난 맨날 나만 제일 힘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승희의 편협했던 생각을 깨준 건 지하철에서 만난 학생과 김 과장 뿐만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주말에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탔는데, 그 곳에서 승희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를 만나게 되었다. 안 그래도 버스에 자리가 없는데, 등산복을 갖춰 입은 한 중년 부부가 승희 앞에 나란히 앉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등산을 할 만큼 건강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 부부의 신호등은 노을처럼 붉은기가 가득한 주황색이었다. 색깔이 거의 비슷해 누가 더 상태가 안 좋은지 가리기 힘들 정도였다. 또 다시 궁금증이 생긴 승희는 그 부부에게 말을 걸었다.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어떻게 등산을 가는 거냐고 묻자 아저씨가 인상 좋은 얼굴로 허허 웃으면서 흔쾌히 대답을 해주었다.


“아, 사실 우리 집사람이 한 달 전에 암 때문에 자궁적출수술을 했거든요. 그냥 가만히 누워있는 것보단 살살 움직이는 게 회복에 더 좋다고 해서 날씨 좋은 날 한 번 나와 봤죠. 사실 뭐 옆 동네에 있는 자그마한 뒷산 가는 거라 등산이라고 하기엔 거창한데, 그래도 남들처럼 높은 산은 못 올라가니 기분이라도 내보려고 쫙 빼입고 나온 거예요. 그치, 여보? 비록 살살 걷다가 금방 와야 되지만 이렇게라도 바람 쐬면 기분 좋잖아.”


아저씨가 그렇게 말하자 옆에 있던 아줌마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야 기분 좋지만 당신이 걱정돼서 그렇지. 안 그래도 무릎이며 허리며 다 안 좋은 사람이 무슨 산에 간다고 그래? 당신 그러다가 또 무릎 수술하게 되면 나 가슴 아파서 못 살아. 평생을 처자식 먹여 살리겠다고 고생만 하느라 손도 이렇게 다 갈라졌는데, 이제는 나이 먹고 하나씩 고장나고 있는 것 같아서 내가 얼마나 속상한 줄 알아?”


“속상하긴, 다 내가 좋아서 한 건데 뭐.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우리 애들 키우느라 정말 고생 많이 했지. 30년 전에는 그렇게 고왔던 얼굴이, 나 만나서 고생만 하느라 이렇게 거칠어져 버렸잖아. 여보, 그래도 내 눈에는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거 알지?”


“어휴, 됐어. 젊은 아가씨 앞에서 주책맞게 왜 이래? 아가씨, 미안해요. 이 사람이 원래도 사랑꾼이었는데, 내가 암에 걸리고 나니까 더 이러네요. 요새는 암 걸렸다고 무조건 죽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주책을 떠는지 모르겠어요.”


승희는 서로에게 애정이 가득해 보이는 그 부부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생각이 짧았는지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등산복을 입었다고 건강할 거라는 착각은 도대체 왜 한 건지. 여태까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겉모습만 보고 튼튼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너무 억울했는데, 사실은 자신도 똑같은 시선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힘들면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있을 거라는 걸, 뭐든지 상대적이라는 걸 그 때는 왜 몰랐을까? 승희는 버스 창문에 비친 자신의 노란색 불빛을 바라보며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지고 방금 전까지 아팠던 다리에 따뜻한 온기가 돌았다. 살면서 이렇게 몸이 가벼웠던 적은 처음이라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삐빅- 삐빅-


승희는 갑자기 들려오는 알람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잠에 든 기억이 없어 어리둥절해 하며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한 사무실 풍경이 보였다. 모니터에는 지난번에 수정하던 PPT 화면이 띄워져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스마트폰을 확인한 승희는 기겁을 하고 말았다. 분명히 PPT를 수정하던 날로부터 열흘이 지났었는데, 다시 그 날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잠시 후, 점심을 먹고 돌아온 직장동료들의 머리 위가 너무 허전했다.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걸 깨달은 승희는 손으로 자신의 정수리를 가리키며 다급한 목소리로 민지에게 물었다.


“민지 씨, 왜 다들 여기에 신호등이 없는 거야? 분명히 방금 전까지는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날짜가 왜 6월 23일이 아니라 13일인 건데?”


그러자 민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대리님, 오늘 날짜 6월 13일 맞는데 왜 그러세요? 그리고 신호등은 대체 무슨 얘기에요? 혹시 꿈 꾸셨어요?”


“뭐? 꿈이라고…?”


“어휴, 대리님 오전부터 너무 무리하셔서 이상한 꿈 꾸셨나 보다. 안 그래도 제가 대리님 걱정돼서 샌드위치랑 피로회복제 좀 사왔어요. 점심 안 드셔서 배고프실 텐데 이거라도 좀 드세요.”


“어? 어…. 고마워…. 내가 뭘 착각했나보네….”


승희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민지가 건넨 음식들을 받았다. 아직도 생생한 그 열흘간의 기억이 전부 다 꿈이었다니. 하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리가 없지. 한편으로는 신호등이 없어졌다는 게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꿈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쩌면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초자연적인 일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마음 속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나 신기한 건, 그 말도 안 되는 꿈에서 깨어난 이후 자꾸만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는 것이다.


“대리님, 뭐 좋은 일 있으세요? 오늘따라 되게 기분이 좋아 보여요.”


“아, 그냥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아 참, 나 수영이나 한번 배워보려고. 내가 그 동안은 발이 아프다는 핑계로 운동을 하나도 안 했었거든. 그런데 수영은 발바닥에 무리가 안 가니까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수영이요? 오, 수영 좋죠~ 수영하면 다이어트도 되고 건강에도 좋겠네요.”


“그치, 그리고 뭔가 새벽에 딱 수영하고 나오면 개운한 마음으로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 이제는 컨디션 관리 좀 잘 하면서 살고 싶거든.”


승희는 자신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도 티를 내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던 꿈속의 그들처럼 씩씩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남 탓을 하지도,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지도 않은 채 녹색불을 향해 달려갈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녹색불이 주어지기를 바랐다. 승희는 그 마음을 담아 사무실 안에 있는 직장 동료들, 창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가족과 지인들 모두를 생각하며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신호등은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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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김보미 

제28회 관세사 시험 합격 후 관세사로 약 7년 근무

웹소설 2질 출간

유튜브 시나리오 작가 근무

2025 인도네시아로 이주, 현재 자카르타 거주


<수상 소감문>

올해 5월 중순, 남편을 따라 자카르타에 온 후 현지 생활에 적응하고 인도네시아어를 배우느라 정신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제7회 적도문학상 공모를 보게 되었고,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꼭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소 소설 쓰기를 좋아하던 저는 단편소설 부문에 출품하기로 했지만, 주제를 정하지 못해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어릴 적부터 자주 상상했던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습니다. 바로 ‘사람 머리 위에 신호등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이 현실이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이 아이디어는 제가 초등학생 때 과학의 날 발명 아이디어로 냈던 것이었는데, 당시에는 실현 불가능하다며 선생님께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불가능한 게 없으니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습니다.


짧은 기간 안에 쓴 작품이라 미흡한 점도 많았고 ‘조금 더 고민할 걸 그랬다’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제 작품이 우수상에 당선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큰 선물을 받아 정말 기쁩니다.


아직 자카르타 생활 초보인 저에게 이번 수상은 더 좋은 글을 쓰라는 격려이자, 앞으로 두고두고 기억할 소중한 활력소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귀한 상을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더 많은 분께 공감과 울림을 전할 수 있는 작가가 되도록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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