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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204) 그래야 사니까 / 한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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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4,823회 작성일 2022-04-01 01:34

본문

<수필산책 204>
그래야 사니까
 
한화경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병실에 힘겨운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가 흘렀다. “묻지 마세요, 내 나이 묻지 마세요, 흘러간 내 청춘 잘한 것도 없는데, 요놈의 숫자가 따라오네요...”
 
커튼 너머로 노랫소리를 듣던 옆자리에서 “할매요, 오늘은 노래가 나오는겨?”라고 말이 넘어오자 “내가 하도 서글퍼서 노래가 나오네요. 오늘따라 노래 가사가 하나같이 와 이리 다 맞노? 아이고 무서버라.” 이렇게 답하시고는 말했다가 노래하기를 반복하셨다.
 
그날은 그 어떤 말보다도 노래가 마음을 대변해 주었고 서글픔을 노래로 배출하신 환자복 차림의 어머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나이 40을 넘으면 나라에서도 건강검진 안내가 날아오는데 약속이라도 한 듯 흰머리가 나오기 시작하고, 작은 글자를 읽는데 어느 날부터 안경을 올리거나 글자를 멀리해서 보는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시작한다. 미리 몸을 챙기는 사람도 있고, 아프고 나서 몸을 챙기기 시작한 사람도 있다. 우리는 3년째 코로나와 함께 하면서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면역력이나 몸을 챙기고자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바쁘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때는 나이를 잊고 무리해서 살고 있다. 아프거나 몸이 안 따라줄 때 비로소 예전과 같지 않은 몸 때문에 서운하고 나이 탓인가 하고 슬퍼지지 않던가.
 
 
우리 어머님도 나이를 잊고 사신 분이셨다. 내가 처음 뵌 어머님은 50대 이셨고 아직 대학생 세 명에 가정 살림은 물론이고 직장과 지역 봉사활동까지 열심히 하시는 바쁜 삶을 살고 계셨다. 집안에서는 맏며느리를, 동네에서는 멋진 형님을 거뜬히 해내시는 어머님은 무적 같은 슈퍼 부산 아지매셨다.
 
손이 크셔서 음식 나눠주기를 좋아하셨고 버스 요금 아낀다고 네, 다섯 정거장 정도는 즐기면서 걸으셨다. 어머님과 함께 살면서 어깨너머로 많은 것을 배웠고 지금도 생활 방식이나 요리 등 어머님으로부터 받은 지혜가 많이 녹아있는 것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 세월은 어찌할 수 없는지 나이 모르고 사셨던 어머님은 무릎 연골이 달아버려서 인공관절 수술을 결심할 때가 왔는데 혼자서는 쉽게 결정을 못 내리고 계셨다.
 
딸 입시로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갔을 때 그런 상황을 알게 되었고 시누이 부부와 함께 어머님 수술을 진행하기로 했다. 큰 병원에서 예상보다 순조롭게 수술 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수술을 결심해 보니 인공관절 수술은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것처럼 입원 첫날부터 퇴원 날짜까지 체계적으로 스케줄이 정해져 있어 새 다리 얻는 공장 같았다.
 
수술을 받았던 어머님 친구 분이 수술 후 마취 풀리면 통증을 참지 말고 좋은 약이 있으니 조정하면 된다는 것, 3일째에 무릎을 꺾는 게 제일 아프다는 것, 재활 운동할 때 다리 꺾는 기계로 135도까지 잘 꺾어야 한다는 것 등을 알려주셨다.
 
나는 간호해드리고 싶어 어머님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코로나의 여파로 간병인은 입원 중 교대 없이 한 사람만 가능하고 문병은 금지였다. 긴장된 입원 첫날 저녁, 다음날 같은 수술을 받을 환자와 보호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교육을 받았다. 어머님은 나이를 고려해 첫 번째로 수술실에 들어간다고 했다. 병실로 돌아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수술 전날 밤 잠에 들었다.
 
다음날 수술실에 들어가신지 4시간 정도 지나 무사히 병실로 돌아오셨다. 잘 깨어나셔서 다행이었고 안심되셨는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아직은 통증도 없고 뭘 했는지 모르겠네.” 라고 하셨다. 저녁에 수술 담당 교수님이 회진 오시면서 “수술 잘 되셨습니다.”라고 해주셨다. 믿고 맡긴 의사로부터 잘 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자 안도감과 함께 저절로 감사의 인사가 나왔다. 마취 풀리는 오늘 밤 무사히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다리 통증을 관리한 진통제가 어머님하고는 맞지 않았는지 그날 밤 온몸에 심한 가려움증이 나타나 다리 통증과 약 부작용으로 한숨도 못 자는 생지옥과 같은 밤을 보내셔야 했다.
 
하루 사이 안쓰럽게도 얼굴이 반쪽이 되셨다. 부작용을 겪으시고는 아프다던 무릎 꺾기도 재활 운동도 잘하고 계셨는데 지병인 변비가 걸림돌이 되었다. 약을 먹고 며칠을 기다려도 해결되지 않자 얼굴은 노래지고 밥이라도 넘어가야 힘이 나실 텐데 입맛까지 사라지고 기운이 빠져버리셨다.
 
이런 악순환의 반복으로 옆 사람들보다 회복이 아주 더뎠다. 축 처진 어깨로 힘없이 “내가 어디 나가서 빠지지 않았는데 와 이래 몸이 안 따라 주노.” 하며 서러워하셨다. 갑갑했던 어느 날 어머님 노래가 병실에 쓸쓸히 울려 퍼진 것이었다. ‘여기서 웬 노래’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노래는 마음을 달래는 어머님의 처방 약이셨던 것이다. 전문 간병인만큼 좋은 병간호는 못 해 드렸지만 옆에서 배워가며 열심히 간호해 드렸고 어머님 말동무가 되면서 많은 대회를 나누었다. 제일 힘들었던 고비를 함께 넘어갈 수 있어서 보람이 있었다. “너랑 같이 와서 얼마나 마음이 든든한지 모른다.”라고 매일같이 고마워해 주셨는데 나도 어머님께 뭔가를 해드릴 수 있는 시간이 생겨서 감사했다.
 
 
나는 퇴원하시는 것까지만 보고 인도네시아로 돌아와야 했다. 요즘은 전화로 여쭤보면 친구 수술보다 내 수술이 더 잘 되었다고 자랑까지 하시면서 “잘 봐준 덕분에 다리 많이 좋아졌다.”라는 반가운 대답이 돌아온다. “애들이 이리 컸는데 어찌 내가 안 늙겠노.” 대학생이 된 손녀 보고하시는 말씀인데 그 말속에서 늙긴 했어도 세월만큼 쌓인 많은 추억으로 뿌듯해하시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세상에 고생 안 한 어머니는 없다지만 우리 어머님 인생에는 가슴 아픈 사연들이 아주 많으셨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시 또 웃으시는 모습을 옆에서 많이 지켜보고 왔다. 입원 중에 “내도 처음부턴 안 그랬데이, 내성적인 내 성격을 노래하고 밝은 색 옷 입으려 하고 완전 바까뻐따 아이가! 마음을 빨리 풀어뻐야돼, 오래 갖고 있으면 안돼, 그래야 사니까, 안 그랬으면 내도 벌써 우울증 걸렸지.” 그렇게 마음을 스스로 달래며 살아오신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고국에는 어느덧 봄소식이 들려온다. 좋아지신 다리로 봄나들이 즐기시고 노래도 하시면서 오래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가만, 나는 언제 소리 내어 노래를 불러 봤던가. 노래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마음을 달래며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는 어머님께 배워야겠다. 그래야 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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