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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203) 키높이 구두 /이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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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4,574회 작성일 2022-03-25 10:15

본문

<수필산책 203 >
 
키높이 구두
 
이재민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한 TV 프로그램에서 여성 패널이 180cm 이하의 남성은 루저라는 말을 거침없이 하여 후폭풍이 거셌다. 특히 나처럼 169cm 키로 살아오며 한 뼘 아니 1cm만 더 컸으면 170cm인데 하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여간 듣기 싫은 소리가 아니다. 프로그램 댓글 창에는 남녀가 편을 갈라 아옹다옹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 나 역시 거친 말을 몇 줄 달다가 ‘이 뭐하는 짓인가’ 싶어 쓱 지워버렸다. 분명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고 보니 키 큰 사람들이 많아진 걸 부인할 수 없다.
 
한창 농구에 재미를 붙인 중학교 1학년 아들 녀석이 “아빠 유전자를 물려받아서 내 키가 이래….” 라고 볼멘소리를 늘어놓기에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20대 초반에 우연히 경찰서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민중의 새벽을 노래하다가 붙잡혀 갔으면 떳떳하기라도 했을 텐데 길거리 싸움질을 하여 잡혀갔으니 부끄러워 낯을 들 수가 없다.
 
사연인즉 막 새롭게 연애를 시작하던 때에 겨울 대로에서 낯선 사내와 시비가 붙었던 것이다. 겨울 한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던 여자 친구의 청에 가게 문 닫는 것을 억지로 막고 포장을 하여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부득이 공중전화로 집 앞이니 잠깐 나오라고 전해야만 했다.
 
공교롭게도 공중전화 부스에서 30대 중반의 남자가 술에 취하여 전화를 걸고 있었다. 바람은 쌀쌀한데 이제나저제나 전화를 끊을까 한참을 기다려도 좀처럼 끊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실연을 당했는지 전화기 너머의 사람에게 애처롭게 말하다가 소리를 지르다 울기도 하다가 참 안타까운 목소리였다. 10분, 20분…날은 점점 추워지고 아이스크림은 전해줘야 하는 나로서는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참을성이 한계에 다다를 즈음 결국 용기를 내어 짧은 불평을 털어놓았다.
 
“아저씨, 죄송하지만 제가 전화 한 통 짧게 쓰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너무 오래 기다렸습니다.” 순간 사내는 휙 돌아서서 전화를 끊고 나를 위아래로 쏘아보더니 ‘좁쌀만 한 놈’이 어디서 큰소리냐며 갑자기 내 멱살을 잡아채었다. 나는 놀라서 두 손으로 툭 밀쳐냈더니 사내는 술이 많이 취했는지 벌러덩 뒤로 넘어져 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벌떡 일어서더니 내게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난데없는 주먹질에 놀라 옷깃을 붙잡고 버티어 봤지만 나보다 머리가 하나 더 큰 사내의 완력을 좀처럼 당해낼 수 없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경찰을 좀 불러달라고 부탁을 했다. 경찰이란 소리를 듣자 사내는 갑자기 자기 안경을 땅에 던지고 밟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목을 손톱으로 박박 긋고 자해를 하는 것이 아닌가. 주먹에 맞아 눈덩이가 붓고, 입술이 터져 피가 나오는 와중에 이건 참 무슨 꼴인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윽고 얼마 후 경찰이 출동하고 사내와 나는 경찰서로 나란히 연행되었다. 사내는 자신이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데 뒤에 있던 사람이 대뜸 욕을 하고 자신을 때렸다고 경찰에게 거짓 진술을 했다. 어이없어 자초지종을 내가 얘기해도 경찰은 상황 맥락을 짐작하고는 쌍방폭행으로 조서를 꾸밀 수밖에 없다는 말만을 되풀이하였다.
 
세상에 태어나 그때처럼 어처구니없다는 말이 절실할 때는 또 없었던 것 같다. 머리가 희끗한 형사 계장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 골치 아프니 서로 없던 일로 합의를 보라고 제안하였다. 그것이 서로를 위해 좋다는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 억울함을 쉽게 떨칠 수 없었지만, 혹시라도 내 주민등록에 빨간 줄이라도 갈까 하는 두려움이 더 컸기에 결국 합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커피 자판기 앞에 서서 사내와 서먹하니 커피를 마시며 좋은 게 좋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누그러진 마음으로 대화를 했다. 사내도 술기운이 가셨는지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하며, 자신이 실연을 당해서 제 정신이 아니었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였다. 나는 속도 없이 알았다고 답한 뒤 그때까지 손에 쥐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자고 했다. 날이 추워도 단것을 먹으면 좀 기분이 나아질 것 같다고 말도 되지 않은 위로까지 덧붙였다.
 
그렇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눈물겹게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었다. 새벽녘에 경찰서를 빠져나오며 내가 사내에게 물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왜 저에게 대뜸 좁쌀만 하다고 하셨어요?” 사내는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저보다 한참 작아서요.”라고 말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새벽 공기가 무척 차가웠다. 세상 살아가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게 된다지만, 키 때문에 이런 봉변을 언제 또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했다. “오빠! 내일 우리 엄마 아빠 만날 때, 허리 쭉 펴고, 어깨 쭉 펴고, 눈에 힘 꽉 주고, 말은 또렷하고 다부지게 해야 해. 알았지? 제발 쭈뼛거리지 말고 이것 꼭 신고 나와.” 서른이 될 무렵 장인 장모님께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아내가 구두 한 켤레를 선물해 주었다. “키높이 구두야. 7cm 키 커지는…”그때, 아내가 내게 미안한 듯 건넨 구두는 반짝반짝 광이 나고 있었고 내 자존심은 흐물흐물 뭉개졌다. “내가 여자들처럼 하이힐을 신게 되는구나. 차라리 스타킹도 신을까?” “그렇게 자조 하지 말고, 좋게 생각해 오빠. 문명의 시대잖아.”
 
 
그때 처음으로 어쩔 수 없이 키높이 구두를 신게 되었다. 169cm 키에 7cm가 더해졌으니 느지막하게 키가 자란 격이 되었다. 막상 구두를 신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그리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뿌듯한 감정마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문득 그 겨울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던 사내는 어찌 지내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 나는 꽤 오랜 세월 키높이 구두를 신고 다녔다. 아니 엄밀히 타고 다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갈 때는 10cm 구두로 키를 키웠고, 조금 많이 걸어야 할 때는 5cm 구두로 키를 키웠다. 키를 마음껏 늘이고 줄일 수 있었으니 아내가 선물했던 그때의 구두가 내게는 신데렐라 구두였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발목 부분이 찌릿찌릿 저려오기 시작했다.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발목 아킬레스가 뚝 끊어지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수술 후 치료하고 재활하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발목을 연결하고 있던 줄 하나가 똑 끊어졌을 뿐인데 그 불편함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담당 의사는 아킬레스가 끊어지는 여러 경우가 있는데 내 경우는 키높이 구두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는 진단 소견을 내렸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키를 속여 온 벌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신발장을 정리하다 보니 키높이 구두 몇 켤레가 먼지를 쓰고 우울한 표정으로 나란히 앉아 있다. 그간 내 자존심을 높여준 놈들인데 영원히 이별해야 하는 상황이다. 다리를 다치고 운동을 못 한 탓인지 뱃살이 둥글게 올라오고, 오십견도 마중을 나와서 왼손은 또 제대로 들지도 못한다. 노안은 더욱 심해져 돋보기 없이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삶의 안전장치인 여러 비밀번호를 자주 깜박한다.
 
키는 다시 줄어들었고, 웃자랐던 자존심의 키도 덩달아 줄어들었다. 하지만 조금 줄어든 키로 엄밀히 말하면 내 본래 키로 세상을 바라보니 강아지 똥도 보이고, 들풀의 꼼지락거림도 보이고, 바람의 출렁임도 보이고, 햇살의 바스락거림도 보여 좋다. ‘루저’, ‘좁쌀’이라는 듣기 싫은 소리마저 허허 넘길 수 있는 마음이라면 내 마음의 키가 10cm는 더 자랐으려나, 마이클 조던처럼 키가 커서 덩크슛을 자유롭게 하고 싶은 내 아이에게 모차르트는 피아노 페달이 닿지 않는 153cm 키였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음악가가 되었고, 녹두장군 전봉준은 죽창보다 한참 작은 150cm 키였지만, 가장 큰 민중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말해주면 용기가 되려나. 어쨌든 내 아이는 나보다 키가 좀 더 컸으면 싶고 마음의 키는 더 잘 자라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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