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거꾸로 가는 시간들 / 김준규 >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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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93) 거꾸로 가는 시간들 / 김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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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3,681회 작성일 2022-01-14 10:07

본문

<수필산책 193>
 
거꾸로 가는 시간들
 
김준규 / 시인, 수필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운영위원)
 
눈에 보이지 않고 손끝에 만져지지 않는 것이 은둔의 꺼풀 속에서 세상을 지배한다. 기저(基低)에 파고드는 조용한 침입자는 이 땅의 도도한 문명 줄기에 일단정지의 붉은 폴리스 라인을 그어 놓았다. 모든 입구의 엄격한 통제와 감시 속에서 길게 늘어선 백색 마스크의 침묵, 포승줄에 묶인 채 억압된 시간이 일상의 라운드에 을씨년스러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제한된 이동 경로, 갖고 싶고 만나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저 멀리 끝 간데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 이라도 맘껏 바라볼 수 있다면, 찌푸린 회색 구름조차 야속하다. 벼르고 바라던 일일수록 기대치는 늘 반역의 함수가 작용한다. 올해는 기필코 화려하게 채색된 가을 단풍을 만끽하려 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던 절기의 여신조차 악몽을 꾸며 경기(驚氣)를 일으켰는지 2021년 가을 동산은 60년 만에 불어 닥친 혹한의 피폭으로 갓 삶아낸 나물처럼 처절하다. 올해의 기대에 부푼 곰 배령 단풍 여행은 이렇듯 가평휴게소에서 비참하게 시들어 버렸다. 처참히 삶아진 이파리들이 산야를 뒤덮고 칡넝쿨과 고추밭은 어깨를 내리고 기절한 채 오색찬란한 가을 잔치의 꿈을 포기하는듯했다.
 
모든 일상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코로나바이러스의 변수에 의하여 일정이 메겨지고 있다. 제한된 외출로 집에서 아내와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일, 오늘은 무엇으로 끼니를 때울까 고민하는 일, 지인들과 어울려 어느 식당을 찾아갈까 의논할 때는 질병 청에서 규정한 인원수 문제로 아내와 티격태격 할 때도 있다.
관리 사무실에서 택배물이 도착했다는 인터폰 연락을 받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그냥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가 돌아와 아내의 잔소리를 듣는 일도 일상이 되고 있다. 근래 들어 건망증이 더욱 심해진 것은 코로나 유행의 잦은 변수로 생활 패턴에 혼선이 야기된 탓도 있으리라.
 
 
아내는 TV를 보다가 문득 연예인 이름을 물어본다. 나보다 다섯 살 아래인 아내가 모르는 유명 연예인 이름을 내가 기억할 리 없다. 늙음이라는 첫 전조 증상이 인지 능력이라고 한다. 그럭저럭 무탈하게 살아온 과거는 나와 무관한 듯, 두 눈을 마주치며 껌벅거리다가 점점 희미 해져가는 기억력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반찬 국물을 흘린다는 아내의 잔소리로 뒤로 하고 서재에서 거울을 보다가 목덜미에 닭 벼슬처럼 늘어진 주름을 보며 목주름 아래를 몇 번이고 문질러 수술 후의 매끈한 모습을 상상해 본다. 어떤 결심을 선택해야 할 때 망설이며 줄자 재듯 세심한 아내의 성격에 반하여 나는 무턱대고 일을 벌여 놓고 수습은 나중에 하는 쪽에 속한다.
 
얼마 후 목주름 제거를 위해 성형외과에 가자고 했을 때 아내는 극구 반대하였지만 나의 무대 뽀 고집을 당할 수 없는 터라 아내는 순순히 따라 나섰다. 능숙한 눈빛으로 안면 스캔을 끝낸 의사 선생이 다짜고짜 "사모님도 눈가에 주름이 많네요. 수술 오래 안 걸려요" 묻지도 않는 말을 하는 바람에 덤으로 아내까지 수술을 받기로 했다. 우리는 얼굴만 마주 보며 긍정도 부정도 아닌 눈만 끔벅거리다가 얼떨결에 예약금을 주고 병원을 나왔다.
 
나이가 들어 질곡의 세월이 남긴 흔적으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얼굴에 남는 주름 현상이다. 때로는 매끈하고 아름답던 젊은 시절을 향하여 미친 척 거꾸로 가보고 싶다. 그러나 나의 성급한 판단은 늘 후회가 따랐다. 이 나이에 수술을 하고 나면 코로나로 이동도 불편하고 붕대 감고 다니기가 남 보기도 민망하다고 아내가 정색을 하며 질책한다.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니 그도 그럴 것이 분명하다. 나의 경솔한 판단이 며칠 못 가서 밑천이 드러날 것이란 예상은 옳았다. 수술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다. 수술 후의 매끈한 내 얼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니다, 잘못되면 병원에서 코로나 감염으로 후회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남자의 자존심을 살리느냐, 엄중한 코로나 시국에 자중의 길을 택하느냐의 갈림길에서 고민을 하다가 하루를 남겨놓고 용기를 내어 병원에 전화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 예약금은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날따라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간호사의 부드러운 답변이 눈물 나게 고맙고 아름답게 들려왔다. 나의 불편한 단점을 절대 놓치지 않는 아내로부터의 공격을 면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스크는 챙겼느냐는 아내의 볼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양재 천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유치원에 가는 아이가 엄마와 함께 승강기 안에서 인사를 한다. 조그만 얼굴을 마스크로 덥고 티 없이 맑은 두 눈과 눈썹만 빼 꼼이 내놓은 아이의 표정이 안쓰럽고 사랑스럽다.
 
길거리에서 아이들 보기가 쉽지 않은 것이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라고 한다. 젊은이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노인 인구가 밀물처럼 불어나는 역주행의 신호, 긴 시간 가난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공자의 지위가 케케묵은 늙은이로 전락하여 자식들의 눈치를 살피며 마음 조리고 살아야 하는 시대는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만혼과 저 출산의 빌미는 살 집이 없고 교육비 충당이 어려워서라고 어떤 연사는 에둘러 말조심한다. 강물이 흐르듯 순환하는 삶과 죽음의 법칙, 대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거역할 것인가?
 
TV를 틀면 유행 가사의 대부분이 사랑을 노래한다. 허구한 날 질러대는 그놈의 사랑 타령은 무엇을 위함인가? 남녀가 만나 사랑하고 자식을 갖는 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최상의 선물이며 본능의 성역이다. 우리의 노여움은 여기서 멈추어야 하는가. 석양이 붉게 물드는 양재 천에 청춘을 되돌려 거꾸로 가고 싶은 노인들이 줄지어 둑 방을 걸어간다. 30대로 보이는 미모의 여인은 유모차에 강아지를 태우고 서쪽으로 가고 있다. 나뭇잎이 따라주는 푸른 공기 한 모금을 받아 마시며 나도 덩달아 그들을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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