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2022년 권두 에세이 > 어떤 숲의 전설 / 최원현 > 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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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특별기고 2022년 권두 에세이 > 어떤 숲의 전설 / 최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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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4,381회 작성일 2022-01-07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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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192> 특별기고 2022년 권두 에세이
 
어떤 숲의 전설
 
최원현/ 수필가(사)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그날은 우리 모두가 움직이는 나무였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누가 그렇게 하자고 선동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그날 우리 다섯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훌훌 옷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쏟아지는 장대비를 온몸으로 받으며 칠흑의 소나무 숲 속으로 뛰어 들어 갔었다.
 
눈으로 코로 마구 흘러드는 빗물 속에서 향긋한 솔 향이 맡아졌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어두운 대도 소나무들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까만 소나무가 어둠과 까망은 다르다는 듯 부딪히지 않게 우리의 눈을 이끌어 주었다. 그렇게 마구 달리길 한참, 숲이 끝났다. 그런데도 우린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미리 약속을 한 것도 누가 어디로 가자고도 안 했지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았다.
 
가속도 상태로 밭으로 뛰어들며 밭고랑 하나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손에 잡히는 고구마줄기를 헤치고 비에 젖어 부드럽게 도톰한 둔덕 깊이 손을 박았다. 흙 속에서 만져지는 딱딱하지만은 않은 감촉, 우린 어둠 속에서도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렇게 몇 개씩 수확한 고구마를 손에 들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비는 더욱 드세졌다.
 
“너네들 나 빼놓고 우리 집 고구마 서리하자고 음모 꾸몄지?”우리 중 하나가 말을 했다. 우린 그걸 듣
는 둥 마는 둥 달리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웃음소리는 빗소리에 잦아들고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소나무 숲, 우린 이 숲에서 자랐고 놀았다. 학교가 끝난 후엔 무수한 갈퀴질로 빨갛게 살점이 보이도록 솔가리를 긁어내었지만 한 번도 미안하단 마음조차 가져보지 않은 우린데도 미워하거나 원망도 안 했다. 오늘의 유혹도 숲이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숲을 핑계 삼아 했던 일이다. 소나무 하나하나가 어디에 어떻게 서있는지를 보지 않아도 다 아는 그런 숲이다. 흙투성이가 되었던 우리 몸도 어느새 깨끗해진 것이 느껴졌다. 쏟아지는 빗속을 달리면서 빗물에 고구마를 씻어 한입 베어 물었다. 빗물과 함께 고구마가 한입 가득 베어졌다. 달큰했다. 아삭아삭 씹히는 아직은 여린 고구마 맛보다 빗속을 달리는 숨 가쁨에 호흡이 가빠져 삼키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럼에도 어둠 속을 달리는 작은 짐승처럼 입으로는 씹으면서 코로는 숨을 쉬면서 발로는 달리는 절묘한 행각을 잘도 해냈다.
 
집이 가까워졌다. 우린 발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맨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비에 젖은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따스한 느낌마저 들었다. 숲이 그대로 가슴에 안겨왔다. 아니다. 숲의 가슴에 우리가 안겼다. 언제나처럼 그는 너른 가슴으로 말없이 우릴 받아주었다. 솔잎에 떨어졌다가 다시 떨어지는 빗줄기가 몸을 간질였다. 헌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옆의 B가 그 순간에도 솔잎으로 간지럼을 태운 것이었다. 맨발로 달릴 때도 느꼈지만 빗물에 젖은 땅에 앉으니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다. 나는 길게 드러누웠다. 이십 분도 채 안 되었을 빗속의 질주였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도 그런 짓을 했다는 것도 유쾌 상쾌 통쾌했다. 온몸으로 떨어지는 빗물을 손으로 만져보며 나도 어느새 한 그루 소나무가 되어있는 것을 깨달았다.
 
드러누우니 빗물이 눈으로 코로 입으로 마구 떨어졌다. 눈을 감아도 코로 들어오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다. 손을 뻗쳐 가까이의 나무를 만져봤다. 축축하게 젖은 나무가 한껏 부드럽다. 아니다. 살갗은 할머니의 손을 닮았다. 그때 푸드득 소리가 났다. 우린 너무나 놀라 후다닥 일어났다. 아마 잠자리를 훼방 당한 꿩이었을 게다. 그제야 나는 달려온 길을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냥 칠흑의 어둠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 속에서 소나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줄을 맞춰 걸어왔다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둠과 까망이 구분되는 분명한 행진, 그러나 앞으로 더 나아오진 못 하는 것 같다. 소나무들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한 발 다시 뒤로 가듯 자기 자리를 지키며 흔들거리고 있었다. 순간 나는 친구의 손을 잡았다. 그도 아마 나처럼 와락 무서움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슬금슬금 뒷걸음을 쳤다. 툭, 뒤에 있던 소나무와 부딪혔다. 앞으로 달릴 때는 부딪히지 않았는데 뒤로 가려다 부딪힌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소나무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몸을 돌리자 켜놓고 나온 등잔불이 창호지 창으로 흔들리며 빨리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다.
 
우린 안방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깨실라 도둑고양이처럼 소리를 죽이며 방문을 열었다.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고 방바닥에 엎드렸다. 손에는 먹다 남은 고구마가 하나씩, 여기 저기 몸에는 긁힌 자국이 보인다. 닫힌 방문 밖에서 ‘잘 들어갔어?’소나무들이 아쉽다는 듯 합창으로 물어왔다. 서로를 쳐다봤다. 비에 씻겼다고는 해도 몸에는 솔잎도 붙어있고 풀잎도 붙어있다. 사람도 동물인 것, 그 본능엔 자연의 일부분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나보다.
 
 
반백 년 전 우리만의 동화요 전설이다. 그때의 그 숲은 지금도 그대로 있을까. 어린 날의 고향이 그립다. 그 숲이 그립다. 그때의 동무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은 한 명도 연락이 되지 않고 있는데 그들 또한 나처럼 어린 날의 전설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그 숲을 잊지 않고 있을까. 숲은 지금도 그렇게 그런 동화를 지어내고 있을까.
 
문득 다시 한 번 그 옛날의 어린 날로 돌아가 그 숲으로 달려가고 싶다. 그래서일까. 요즘도 비가 오는 날이면 가끔씩 그때의 그 숲 생각이 난다. 코 속으로 스며들던 솔향에 빗물 머금은 날고구마 맛, 그렇게 어린 날의 동화는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사람의 숲에서 그 숲을 그리워하고 있다. 내 어린 날의 숲, 솔향 가득한 그 숲을.
 
 
*최원현
《한국수필》로 수필,《조선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사)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월간 한국수필 발행 겸 편집인.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현석김병규수필문학상·조연현문학상·신곡문학상대상 수상 외,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그냥》《누름돌》등 17권, 문학평론집《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2권, 중학교《국어1》《도덕2》등에 수필 작품이 고등학교 《국어1》《문학 상》등에 수필 이론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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