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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77) 추석날의 단상 / 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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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9,601회 작성일 2021-09-24 07:54

본문

< 수필산책 177>
 
추석날의 단상
 
서미숙 / 시인, 수필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장)
 
 
‘코로나 19’ 덕택에 작년부터 한국에서 추석을 보내게 되어 기쁘지만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명절 때면 맏이로서 조상을 모시고 차례를 지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인도네시아에서 우리식으로 제수(祭需)를 구하려면 몇 군데 슈퍼를 돌아야하기 때문에 꼼꼼히 체크하지 않으면 간혹 빠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최근에는 L그룹의 대형마트가 들어와 한국음식이 많이 다양해졌다. 내가 처음 인니에서 차례를 지냈던 이십 여 년 전보다는 한국에서 수입해온 제수음식들이 구실(口實)을 갖추고 풍성해진걸 보면 이제는 외국에서도 차례를 지내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요즘은 국제화 시대다 보니 해외에 나와 살게 되는 경우도 많고 어디에서든 정성으로 조상에 대한 예를 갖추는 사고로 바뀌어가고 있다. 삶이란 선한 타협을 이루듯 변화하는 순리를 그렇게 인정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구가 한 공간처럼 글로벌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타국에서 맞이하는 명절은 서글픈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두고 온 것들에 대한 그리움의 향수라고나 할까.
 
내가 남편을 따라 인니 주재원 생활을 시작했던 20여 년 전만 해도 조상을 해외에서 모시는 일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차례나 제사는 우리나라 고유의 미풍양속(美風良俗)이기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그때는 어머님도 살아 계셨기에 한국에 있는 남편의 형제들이 어머님을 위시해서 차례를 모셨지만 맏이로서의 부담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어머님이 갑자기 뇌출혈로 돌아가신 후 삼우제(三虞祭)가 끝나고 형제들이 모인 자리에서 맏이인 남편은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이제 그동안 너희들이 조상을 모시느라 고생했으니, 내가 부모님 제사를 모셔갈까 해, 대신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부모님 묘소를 잘 돌봐주기 바란다.”
 
“어머나, 아주버님! 그쪽에서는 제수를 장만하려면 쉽지 않을 텐데요……" 동서는 싫지 않은 표정으로 얼른 한마디 한다. 왜, 아니 그럴까, 맏동서도 없는 빈자리로 그 동안 차례를 모셔왔던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아니야, 동서! 그렇지 않아, 오히려 열대지방이라 과일도 풍부하고 한국슈퍼가 있어서 웬만한 한국식품은 다 들어와 있는걸." “제사 때라도 어머님, 아버님이 해외 나들이를 오실 수도 있고, 안 그래? 동서.” 내가 그렇게라도 얼른 남편의 말을 거들어야 내 맘도 편하고 결론도 빨리 날 듯 싶었다.
 
그때서부터 타국에서 지내는 나만의 명절은 시작되었다. 동서들도 없이 홀로 차례 상을 준비해야 하는 맏며느리만의 쓸쓸한 의무로 다가왔다. 명절을 앞둔 며칠 전부터는 잠도 오지 않고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들고픈 생각으로 가득했다. 덥고 습한 기온이라 제수음식은 그때그때 장만을 해야 하기에 밤에 지내는 제사 말고는 아침에 지내는 명절 차례 상은 꼬박 밤을 새우며 음식을 준비했다.
 
 
적막한 밤 시간, 홀로앉아 전을 부치며 갓 시집와서 어색한 손놀림으로 어머님께 음식을 배우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모든 며느리들은 시어머님에 대한 이야깃거리를 간직하고 있겠지만 어머님에 대한 나의 기억들은 좀 특별한 편이다. 해외에 나와 오래 살아온 탓인지, 한국을 막 떠났던 그때의 어머님에 대한 기억과 애틋했던 추억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시집와서 잠시 동안 함께 살았던 어머님의 모습은 무척 부지런하셨다. 무슨 일이든 마음먹으면 그 자리에서 시작했고 집안엔 언제나 흐트러짐이 없는 질서가 있었다. 단아하고 차가운 성품에서 알 수 없는 에너지와 보이지 않는 힘이 느껴지곤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식들이 다 장성했을 때지만 아버님을 여의고 홀로되신 외로움과 막막함을 자식이나 며느리에게 내색하고 싶지 않은 어머님만의 자존심이었으리라.
 
자식들의 혼사를 한 번도 못 보시고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에 가끔 어머님은 벽에 걸린 아버님사진을 올려다보곤 하셨다. “불쌍한 양반, 며느리도 못 보시고……. 그렇게 사진을 바라보며 한숨을 토해내던 어머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그런 어머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철없는 며느리였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도 힘겨워하는 나에게 친정엄마는 제대로 살림을 가르쳐줄 기회가 없으셨다. 그랬기에 나는 어머님이 기대했던 큰며느리는 되지 못했다.
 
부엌일을 해본 경험도 없고 가늘한 외모의 큰며느리가 어머님께는 탐탁지 않은 며느리였음이 분명하다. 친정 쪽은 충청도였기에 매콤하고 얼큰한 경상도 음식을 배우기까지는 어머님과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느리에 대해서 불만이 많을 법도 한데 일도 잘 못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며느리가 답답하고 마음에 안들 때가 오죽 많으셨을까.
 
어머님은 불평은커녕 누구에게나 큰 며느리가 다 잘한다고 칭찬을 하셨다. 특유의 자상하신 미소로 차근차근 가르쳐 주시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때 어머님이 아니었더라면 밀가루를 고운체에 받쳐 엷은 반죽을 만들어 살짝 절인 배추에 입혀서 전을 부치는 경상도식 배추 전 맛을 지금 내가 어찌 알 수 있었으랴. 때로는 잔소리처럼 들리던 말씀들이 이렇듯 삶의 구비마다 긴요한 길잡이가 될 줄은 몰랐다. 지금은 눈감고도 다양한 경상도식 음식을 만들 수 있음에 감사하다.
 
어머님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음식 솜씨를 맘껏 보여드릴 수 있으련만 명절 음식을 만들 때 마다 어머님 생각이 간절해지곤 한다. 타국 땅에서 홀로 명절음식을 만들고 있는 못난 큰며느리를 어머님은 하늘에서 어떤 모습으로 바라보고 계셨을까.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소중한 것들을 잊어버리고 산다. 무심코 받았던 큰 사랑을 부모에게서 물려받았던 소중한 경험들을, 그것들이 우리의 삶에 무한한 힘이 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산다. 삶이란 아마도 자아 중심적으로 돌아가고 부모의 사랑을 쉽게 잊고 사는 본능이 있는 모양이다.
 
오래된 살림 중에 어머님께서 주신 작은 은쟁반이 생각났다. 부엌서랍 한구석에 까맣게 녹슨 채로 오랫동안 보관했던 은쟁반을 찾아내 깨끗이 닦았다. 쟁반 한가운데 어머님의 모습이 아른거려 가슴을 가득 채운다. 눈물이 났다. 쟁반 안에 숨어있는 어머님의 큰사랑이 보이는 것만 같다. 아마도 내가 며느리를 본 후에, 아니 그보다 더 나이가 많이 든 후에도 명절 때가 되면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다. 어머님을 추억하며 음식 맛이 깊어질수록 그리움도 더욱 깊어갈 테니까.
 
알록달록 자연의 색으로 어우러진 고국의 풍성한 채소에 예쁘게 밀가루를 입힌 오색 전들이 프라이팬에서 노릇노릇 익어간다.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깊어가는 고국의 가을도 잎 새마다 제 빛깔의 사연을 안은 채 오색빛깔 곱게 물든 단풍으로 익어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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