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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64) 풍장 (風葬) / 김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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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681회 작성일 2021-06-25 11:11

본문

< 수필산책 164 >
 
풍장 (風葬) 
 
김준규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운영위원) 


인도네시아에서 지낸 세월이 어느덧 40년이나 되었다. 오랜 해외생활을 이유로 선산에 모신 부모님의 묘소를 참배한지가 몇 년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날 큰 형님으로부터 부모님의 묘지 문제로 상의할 일이 있으니 급히 귀국하라는 소식을 접하였다. 질곡의 세월을 사시는 동안 자식의 안위를 소중히 여기시던 부모님은 죽어서도 영면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끌려 다니며 여러 번의 장례를 치루는 수모를 겪으셨다.
 
연로 하신 아버님이 숙환으로 돌아가시자 우리는 집안에서 관리하는 종중산에 장례 지를 배정받아 모시게 되었다. 비좁은 종산에 집안의 여러 조상 들을 모시다보니 공원묘지는 진즉 부터 만원이었다. 할아버지 시대만 하더라도 공원묘지는 꽤 넓은 야산이었다고 한다. 전쟁으로 혼란기를 겪으면서 집안 형제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동안 우리의 종손 되는 6촌 형님은 종중 땅의 절반을 은밀히 팔아 넘겼다고 했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실상을 알게 되었고 집안 형제들은 성묘나 시제 때 모이게 되면 덕담이나 친교를 나누는 대신 멱살 잡고 싸움하느라 집안 행사는 엉망이 되기 일쑤였다.

우리 형제 중 집안 대 소 사를 결정하는 큰 형님의 집안에 우환이 끊이질 않았다. 어쩐 일인지 처음 결혼하여 3년도 안되어 형수님이 폐결핵으로 돌아가시더니 두 번 째 맞이하신 형수님도 몇 년 안 되어 암으로 돌아가시게 되었다. 맏아들의 불행을 늘 걱정하시던 어머님은 어느 날 용하다는 무속인 집에 들려 점을 보고 오시더니 아버지 산소를 이장해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우리는 어머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하고 집안에 이름이 알려진 지관을 동원하여 현재의 위치에서 좀 떨어진 외진 언덕에 장소를 정한 후 이장 절차를 밟았다.
 
유골에 심한 훼손이 있을 거라던 무속인의 예언을 전해 들은지라 왼지 불안한 마음이었으나 아카시아 나무뿌리가 관위를 지나간 흔적 외에는 아버님의 유골은 다행이도 큰 변화 없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상태 였다. 새로 모시게 될 묘 터에는 봉분을 넓게 하여 장차 어머님이 돌아가실 경우 합장을 대비 하기로 하였다. 아버님의 묘소를 이장한 뒤 5년이 지난 후 어머님도 노환으로 타계 하셨다.
 
예정했던 대로 어머님의 장례를 합장으로 모신 후 몇 년이 지났을까? 우환이 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기대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큰 형님 집안에 또 큰일이 닥쳤다. 세 번째 형수 밑에서 눈치를 보며 자란 장조카가 가출한지 몇 달 만에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된 것이다. 단 하나뿐이던 아들까지 잃게 된 형님은 기구한 운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형님은 어느 날 동생들을 모아 놓고 돌연 부모님 산소 문제를 거론 하였다.
 
 
매일 꿈속에서어머님이 나타나 답답해 죽겠다고 하신다며 아무래도 산소를 잘못 모신 것 같다고 하였다. 온갖 불행을 짊어지고 사는 큰 형님의 제의를 거부할 수 없는 터라 우리는 부모님의 묘지를 다시 파 보기로 하였다. 집안 어른이 잡아준 손 없는 날을 정하고 인부들을 동원하여 묘지를 개봉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큰 형님의 꿈속 얘기가 실제로 눈앞에서 펼쳐졌다. 부모님의 유골이 물속에 잠겨있질 않는가? 실로 참혹한 광경 이었다. 고향 근처에서 꽤나 유명하다는 지관이 지정한 명당자리가 이토록 험악할 줄이야! 우리 형제들은 아연실색하여 부랴부랴 유골을 수습하고 물기를 제거한 뒤 햇빛에 말리는 과정을 거치며 즉석에서 대책 회의를 진행 하였다.
 
집안 어른들은 선산에 자리를 마련하여 다시 모시자고 했고 형님 세 분 역시 어른들의 뜻에 따르자고 했다. 그러나 막내인 나는 극구 반대 의견을 제시 하였다. 장례의 관습상 사후관리에서 불을 보듯이 뻔한 고인에 대한 무례를 언제까지 되풀이 할 것인가.  
 
수대에 걸쳐 생성된 공원묘지는 여기저기 파헤쳐져 장지는 만원이고 무덤으로 변한 산세는 흉물처럼 훼손되고 있었다. 집안 형제들은 수십 년이 지난 종중산의 이권을 놓고 만나면 술판에 다툼까지 이어지고 가문에 우환이라도 생기면 묘지 탓으로 돌리며 조상을 거론하기 바빴다. 돌이켜보면 부모님의 묘지를 두 번씩이나 파헤치게 되는 동기 역시 여러 명의 연출자가 동원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큰 형님의 불행을 아버지의 묘지 탓으로 생각한 어머니, 그리고 인간의 나약한 심상을 부추기는 무속인, 좋은 명당자리를 고르느라 동원된 지관과 큰 형님의 꿈자리 까지, 이들은 모두가 전통적 장례 문화의 틀 속에 갇혀 움직이는  연극배우와 다름 있을까? 다시 선산에 부모의 유골을 모신다면 불효를 되풀이하는 원상 복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네 의견은 뭐냐? 큰 형님이 핀잔하듯 말씀 하셨다. "파묘 한 후 풍장 하는 겁니다."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우리의 묘지 문화는 아직도 수 십대의 조상이 안장된 묘지에 매년 가을 시제를 올리며 전통을 지키는 가문도 있다.
 
 
2500년 전 공자는 신멸( 神滅)을 주창했고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하라,”고 설파하였다. 시대는 많이 변하여 자식은 하나 아니면 둘이고 묘소를 돌보고 관리 하는데도 엄연한 한계가 있다. 우리세대 역시 그런 묘지 속에 묻힌다면 후일 잡풀이 무성하고 이름 없이 버려진 묘지가 되거나 자식들은 고인에 대한 미안함으로 평생을 후회하며 살게 될 것이다. 납골당도 일정기간이 지나고 회비가 납부되지 않으면 자동으로  페기처분 된다고 한다. 조상을 태우고 남은 잿가루 조차 마음 놓고 모실 곳이 없자 이제는 수목장이 유행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무 밑에 땅을 파고 묻어놓은 유골이 자식과의 물리적 관계가 단절 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자식은 부모의 유골이 묻힌 나무 밑을 걱정해야 한다. 세월 앞에 자연은 늘 변화 한다. 나무는 죽거나 훼손되고 짐승이 땅을 파거나 홍수에 씻겨 어디론가 유골이 떠나려 갈수도 있다, 죽은 자와 산자는 가상의 교감과 기억이 존재 할뿐이다.
 
설득으로 진땀을 흘린 보람일까? 끝내 파묘와 함께 풍장으로 장례를 모시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 우리 형제들은 모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묘지자리를 평평하게 고르고 그 위에 잔디를 심었다. 그리고 수습한 유골을 화장한 후 숲 속의 크고 작은 나무사이에 날려 보냈다. 비로소 편안한 영혼과의 이별이었다. 그날따라 소슬한 바람이 불고  달빛도 휘영청 밝았다. 바람을 타고 날아가시는 부모님의 생전 얼굴 모습이 수국처럼  환하게 웃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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