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63) 마법의 원탁 / 하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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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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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163>
마법의 원탁
하연수 / 수필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감사)
얼마 전 해외에서 공부를 마치고 온 딸이 또 공부하러 간다는 말을 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던 우리 가족에게 딸의 취업소식은 생명수 같은 선물이었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이 어렵게 들어간 큰 회사에서 윗사람들과 의사소통이 어려워 그만두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말들도 많아서 은근히 걱정도 되었다. 사람들은 요즈음 젊은이들이 인내력 없어서 그렇다고 했고, 나약하게 키운 부모들의 책임이 크다고 말들도 하지만 왜 젊은이들은 소통이 안 되어서 힘들다고 아우성일까? 단순히 세대 차이만은 아니고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른 말 잘하는 딸이 옛날에는 똑똑하다는 소리 들어서 좋았지만 지금은 그 똑똑하다는 말이 싸움닭이라는 소리로 들리는 듯해서 겁이 났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딸 또한 소통능력이 그리 좋지 않다는 말이 된다. 왜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도 소통이 안 된다하고 기성세대도 소통이 안 된다고 불만일까?
이 사회가 아직도 구태의연한 가부장적이고 수직적 직장문화와 상부의 지시는 무조건 복종하라는 식의 문화풍토임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런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세대들도 말이 안 통한다고 분노하고 있을까. 딸은 딸대로 자신의 생각과 너무 맞지 않는 회사를 계속 다녀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아마 네가 모르는 장점도 분명히 숨어 있을 것이야. 그렇지 않다면 그 회사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가 있겠느냐.” 라고 설득하려 했지만 속으로는 딸도 소통능력이 조금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소통이 되지 않는 링 위에서 경기를 해야 하는 젊은이들이 그만하겠다고 대책도 없이 글러브를 집어 던지고 링 아래로 내려온다. 요즈음 내 일상은 링 주위를 열심히 돌아다니며 조금만 더 링에서 견디어 보라고 소리 지르며 도장 출신 선수를 설득하는 일이다.
연습 때는 아주 잘했던 선수가 첫 시합 1회전 후반에서 스트레이트 한 방에 원투를 맞고 비틀거리는데 공이 살려주었다. 정신없이 구석으로 돌아와 앉아있는 제자의 반바지를 호흡에 맞추어 당겨주며 주문을 계속한다. 아무리 강한 적 앞이라도 검객은 일단 칼을 뽑아 들어야 한다. 가장 무서운 것은 적이 아니라 칼을 뽑을 용기가 없는 자신이다. 이렇게 직장생활 포기하지 말고 계속 버티라고 주문한다. 얼굴이 붉은 도깨비가 된 녀석은 코치 말을 믿었는지 클린치로 안고, 상대 얼굴에 머리로 받아 코피를 터뜨리는 버팅 반칙을 하면서도 버티고 있고 코치는 반전이라는 기적을 기다리며 흰 수건을 만지작거리기만 하지 던지지 못한다.
저녁약속을 한 날, 시간에 늦지 않게 서둘러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가랑비가 내리는 차이나타운 구시가지 골목길로 들어섰다. 앞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물 사이로 보이는 빨간 왕새우 그림 네온간판이 비에 젖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약속 장소인 해물식당 마당에 내렸다. 웨이터가 가리켜 주는 오른 편 창가 원탁에는 이미 먼저 온 화교 친구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필립이 내게 손을 흔들어 위치를 알려주었고 나는 그 원탁으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이 친구들은 오래 전 신발용 접착제 공장을 하겠다며 부산에 있는 D사를 방문하게 해 달라고 부탁해서 같이 부산을 다녀오기도 했던 사람들이었다. 떠들썩한 이 원탁에 데워진 중국 전통 소홍주를 마시고 있었다. 늦게 온 벌이라고 ‘호주불취인’ 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갈색토기에 가득 부은 소홍주 세잔이나 마시게 하고는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딸의 경우도 소통이라는 이름의 회식 자리였지만 맨 아래 다섯 번째 식탁 말단들은 첫 번째 식탁 보스들이 회사가 갈 방향을 어떻게 잡고 있는지, 첫 번째 식탁 보스들은 다섯 번째 말단 직원들이 이 회사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게 멀리 떼어 놓았다. 아마 윗사람들 간 대화를 아랫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멀리 떼어 놓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소통이 아닌 불소통 구조다. 이렇게 전해 준 딸의 말에 모두들 동감한다 했다. ‘헤르만 량’은 내 딸의 이야기가 자신이 부산에서 접착제 공장 D사와 회식 때 경험한 문제 그대로라고 했다. 그때 ‘헤르만 량’은 왼쪽 끝 네모난 식탁에 앉아 있었다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했다.
오른 쪽 끝 다섯 번째 네모난 탁자에 앉아있던 D사 부사장 이야기를 하나도 듣지 못해서 대화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도대체 왜 이런 네모 탁자를 길게 늘어놓아 저녁 겸 회의하는 사람들 간 거리를 멀리 해 놓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렇게 둥근 탁자에 둘러앉아서 대화를 공유하고 소통했다면 인도네시아 합작공장 설립이 바로 진행 되었을 것이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헤르만 량’은 화교사회에서 원탁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설명했다. 화교 어린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가족, 집안 어른들, 친척, 고향 사람들, 동업자, 공동 투자자들 사이에 앉아 의견 차이 절충, 주고받을 것 받고 판 깨지 않고 밀고 당기는 협상, 절충하는 것들을 보고, 듣고 몸으로 익히며 성장해 간다고 했다.
원탁 모임은 화교사회 소통교육의 장소라고 했다. 이렇게 원탁밥상머리 교육을 받으며 협상 전문가로 성장한 화교청년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원탁을 통해 계속 발전해 나간다고 했다.
인도네시아 이억 오천만 인구의 오륙 퍼센트밖에 되지 않는 수의 화교가 인도네시아 경제 칠십오 퍼센트를 차지하는 오늘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 힘의 원천이 바로 이 둥근 식탁이라고 한다. 미래사회 승패는 이 소통능력이 지배할 것이라고 ‘량’이 말하고 화교사회 젊은이들은 전문 기술에는 약하지만 의사소통과 절충협상에는 강하다고 했다. 그 비밀이 원탁에 있다며 두 손으로 원탁을 두드렸다. 화교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원탁에 둘러앉아 어른들과 같은 눈높이, 같은 눈 거리에서 눈의 표정을 보며 이야기를 듣고, 자기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한다. 정당하게 받을 것 받고, 줄 것은 주는 양방향 소통습관을 보고 배우고 익힐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자라기 때문에 청소년기가 되면 벌써 소통달인의 기본을 모두 갖춘다고 했다.
이 땅에 살면서 우리는 동업하면 망한다는데, 화교들은 동업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하는지, 왜 회사 이름에 집단이라는 글이 들어가는지 이해가 되었다. 앞으로도 우리 사회가 구태의연한 조선시대 왕과 신하 간 어전회의 같은 의사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거리유지 관습문화를 고집한다면 우리 젊은이들에게 밝은 미래는 없을 것이다. ‘아서왕’의 원탁은 신하들과 눈높이, 입과 귀의 거리가 같아서 즉석소통이 가능했고, 그것이 서로 이해하고 돕는 힘이 되어 아서왕을 전설적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 사회도 이 원탁의 비밀을 인식하여 원탁이 어릴 때부터 일상화 되고 소통의 마법으로 무장한 수많은 ‘아서왕’이 탄생하는 활기찬 대한민국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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