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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119) 편안함에 대하여 /이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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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0,515회 작성일 2020-08-13 16:22

본문

< 수필산책 119 >
 
편안함에 대하여
 
이태복 / 시인 (한국문협 인니지부 부회장)
 
 
내겐 마음 편한 현지인 두 친구가 있어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들은 모두 도시에 나갔다가 싫어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이고 돈은 없지만 마음이 넉넉한 사람들이다.
첫 번째 친구가 10억을 한국 사람에게 떼였다. 그것도 빌린 돈이다. 10억을 떼이고도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 친구, 욕심이 없었던 친구는 이제부터 돈을 벌기 위해 고통의 세월을 감내하며 빚을 갚아야하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 원인을 내가 제공했고 내가 소개한 사람을 그는 믿었던 것이다. 그는 나를 사랑했기에 원망보다는 나를 잃지 않아 감사다고 했다. 그가 큰돈을 빌릴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쌓은 덕 때문이다. 그동안 쌓은 덕을 도둑맞은 것이다. 투자를 한 것도 아니고 한국사람 사업을 도와주었는데 한국으로 돌아간 후 전화를 차단하고 소식을 끊은 것이다.
 
친구의 특징은 문명의 세계보다는 자연 속에 살면서 행복해 했다. 그것이 나와 공통점이다. 사람들에게 문명은 편하자고 입은 옷과 같지만 벗을 때도 있다는 사실도 모른 체 화려한 문명을 입고 누리면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행복은 문명의 혜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문명을 누리며 함께 살아가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기에 문명의 혜택이 없다고 사람이 불행한건 아니다. 요즈음 코로나로 국내외 항공편이 줄어 불편하다고 한다. 교통 뿐만은 아닐 것이다. 코로나로 문명의 혜택이 감소해서 체감되는 모든 것이 불편하다. 여기 문명을 멀리하며 행복한 이들의 예가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 측 사람들이 돈을 사용하지 않는 인도네시아 밀림의 미개한 사람들을 사람답게 살도록 해주겠다며 문명사회로 끌어내어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돈이라는 것으로 행복을 누리게 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실직하고 쓰레기 더미를 뒤지다가 지금은 다시 밀림으로 돌아가 살면서 행복해 하는 영상을 보았다.
 
 
문명의 수혜를 누린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행복의 매개체라 생각하는 돈 공장을 운영하는 사업체들이 요즈음 코로나의 영향으로 경기가 침체되면서 궁핍해졌다. 문명을 누리는 데는 분명 돈이 필요했다. 돈이 없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세상이다. 그것도 문명의 첨단을 달리는 한국의 젊은이들이다.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수단이 돈 뿐일까? 아님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문명세계에 손발을 담고 살아온 나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반년 가까이 일을 못해 불편한건 부인할 수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불편한 것이지 불행한건 아니다. 안 그래도 코로나로 힘겨운데 내가 소개한 한국 사람에게 내 현지인 친구가 10억을 떼이는 일까지 벌어졌으니 이 일을 어찌할까? 이곳 시골사람들에게 10억의 무게가 어떤지는 상상이 갈 것이다. 모두가 내 어리석은 불찰로 일어난 일이다. 낭패 본 일에 다리가 되고 조연을 한 내 마음이 불편하고 아팠다. 불행하다고 걱정하는 분들이 동정을 했다. 이런 진행형 상황의 시간 속에서 기분 전환도 할겸 문명의 혜택을 못 받고 사는 또 다른 현지인 친구의 간청으로 깡촌 마을을 찾았다. 하룻밤 민박을 하며 타임머신을 타고 나의 50년 전 환경에서 하루를 살고 왔다. 내가 그 친구를 좋아 하는 건 그가 편하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그 친구도 이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어 나를 간청한 것이다. 그 친구의 집은 문명의 혜택을 조금밖에 못 받는 자바의 고산 머르바부산 중턱 깡촌 마을이다. 
 
 
그 깡촌에 가장 흔한 것이 대나무였다.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친구의 집은 애벌구이 토기 기와지붕에 대나무 기둥과 서카레 그리고 대나무를 엮은 돗자리 벽채 땔감까지 온통 대나무였다. 흙바닥 부엌에 토기화덕이 있어 시커멓게 그을린 양은 남비에 염소 물을 끓여 주고난 후 나의 목욕물을 데워 주었다. 부엌 안에 있는 욕실을 겸한 문과 부엌의 경계 벽은 배꼽만 가릴 정도로 화단의 울처럼 낮았다. 손님인 나에게 샤워 우선권을 주었고 이어 어린 아들이 들어와 일상을 마무리하는 시간이었다. 친구는 음식을 먹으며 자녀를 교육하는 부엌의 밥상머리 교육과 함께 restroom 교육이라는 처음 보는 진풍경이 경이로웠다. 우리네 가을 날씨만큼 쌀쌀한 깡촌 마을, 외양간 거실이 일체인 다목적 오피스텔 같은  부엌에서 친구의 따뜻한 마음으로 데워준 물로 상체만 보이는 채로 바가지 목욕을 했다. 선녀같이 아름답고 착했다던 아내가 나무꾼 같은 친구에게 시집와서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고 이곳에서 목욕을 시키며 키우다가 먼저 하늘나라로 갔단다. 친구의 인생사가 담긴 부엌이었다.
 
새카맣게 그을린 다목적 양은 남비에 차도 끓이고 목욕물도 데우고 염소 줄 물도 데우고 나를 위해 특별한 소고기 요리를 했다. 요리 중에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유네스코에서 인정한 소고기 른당을 이 산골 부엌에서 대접 받았다. 른당의 원조라 믿고 싶었다. 부엌의 외양간에는 친구가 움직일 때마다 염소들이 엄마처럼 “음매 음매” 부르며 토를 달았고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 형제들이 화덕 온기에 졸고 어미닭이 또 한 가족 탄생을 꿈꾸며 알을 품고 있었다.
부엌의 낡고 어수선한 창고에는 조상의 손때 묻은 칼과 돌아가신 어머니가 사용 했는 듯 청록꽃이 핀 ‘단당’이라는 놋 솥이 있고 먼지 앉은 농기구들, 그리고 대나무를 쪼개 만든 봉새미에 조금의 쌀이 있었다. 외양간 여물통 앞에는 염소들의 풀과 까맣게 그을린 나무토막 탁자 위에는 화덕 아궁이에 장작 화염이 꺼지면 구우려고 카사바를 대기시켜 놓았다. 화덕 앞에는 아내가 살았을 때 찬거리를 다듬고 밥을 먹기도 하고 이웃 아주머니들이 쪽문으로 들어와 수다를 떨었음직한 대나무 평상이 있었다.
 
한기가 도는 한국의 가을 날씨같이 쌀쌀한 밤이다. 나는 화덕에 앉아 커피 한잔을 식혀 놓고 어릴 적 추억속의 친구들을 불러와 고구마를 구워먹으며 밤 깊은 줄 모르고 있었다. 부엌은 아내가 죽고 친구가 아이를 키워낸 곳이다. 젖먹이 아이를 두고 아내가 떠나자 외양간 착한 염소들은 정성으로 베어다 준 꼴을 먹고 아내 대신 불린 젖통을 내어 주었다. 염소젖을 짜서 모유를 대신했고 지금은 연로하신 부친의 보양식이 됐다. 친구에게 부엌의 의미는 철모르는 아들에게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며 사랑을 나누는 곳이다. 부엌 뒤에 텃밭이 있는 뒷마당에서 쳐다보는 하늘은 보름달과 총총한 별들이 큰 왕대나무 숲 위로 떠 있고 대숲에 부는 바람이 고국의 가을처럼 느껴져 고산마을 밤에 마시는 부북 커피 맛은 스타벅스 커피보다 깊고 향기로웠다. 친구 집은 내실과 부엌으로 이루어진 우리네 옛날 초가만큼이나 좁아 방 하나에 거실이 전부였지만 내게 특별히 방을 내어 주고 할아버지와 친구는 거실에서 잤다. 방에는 까뿍 솜을 넣어 만든 우리네 두터운 솜이불 같은 전통 매트가 전부였다. 친구의 10살 아들을 품에 안고 잠들었다. 코로나에 대한 기우와 결벽증으로 빛바랜 매트가 꺼림칙했지만 막상 눕고 보니 냄새하나 없었다.
 
 
오히려 공기 맑고 깨끗한 시골에 그들보다 외부인을 한사람이라도 더 만난 내 자신이 미안했다. 잠자리가 바뀌어 잠시 뒤척였지만 품에 안은 아이와 나누는 서로의 따뜻한 체온과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수면음악처럼 잠을 유도했다. 대나무 숲에 부는 바람소리까지 효과음이 되어 단잠에 빠져 들었다. 마음 편한 깡촌의 밤이었다. 다음날 친구는 자기 집을 찾아 준 것이 기뻤던지 이웃집을 다니며 teman korea (한국친구)라고 노래를 부르며 다녔고 가는 곳마다 차 대접을 받으며 그들의 소박한 정을 가슴으로 느꼈다. 친구는 그렇게 하루의 삶을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자바로 이주한 후 지난 3년은 이러한 자바 친구들을 많이 만났고 많은 것을 느끼며 배우고 정을 나눴고 아낌없는 그들의 사랑을 받는 사랑의 빚쟁이가 됐다.
 
자바의 생활은 향기가 있어 편하고 행복했다. 인도네시아 27년차 내게 남은 건 사람들의 사랑이다. 불과 한 달 전에 10억을 떼인 내 파트너 친구도 그랬다. 그는 내 기우와 달리 자신이 떼인 돈보다 괴로워 할 나에 대한 걱정이 먼저였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내 아들 같았고 친구 같았고 그도 나를 양아버지처럼 생각해 우리는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살았다.
 
그는 나와함께 한국 지인을 만날 때면 나를 늘 가족이라는 걸 강조했다. "우리는 가족이다." 가족끼리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어려움을 당할 때 한마음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그가 나에게 항상 감사하며 살기를 간곡히 당부했고 감사하며 사는 사람은 울지 않는다며 따뜻한 미소와 함께 내게 용기를 주었고 어떤 일이 닥쳐도 기뻐하자고 했다. 우리는 이 일로 서로를 더 이해하고 가까워졌고 만나야 편하고 행복했다. 편하다는 건 이런 것이었다. 나는 사랑의 빚진 자다.
그의 사랑에 빚을 져서 행복하고 기쁘다. 나는 이제 존재의 이유가 있다. 현지인인 그들,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마음으로 이웃을 위해 살 것이다.
 
 
내 인생에 지금처럼 편하고 행복한 적은 없었다. 사람이 빚을 안고도 행복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기가 났다. 사람이 살다가 물질의 시련이 있을 때 물 따라 내려가는 죽은 고기처럼 물질이 주는 시련 따라 흘러 내려가지 말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기쁨이다. 기쁨이 샘물처럼 솟아올랐다. 솟아오른 기쁨이 강이 되어 흐르고 솟는 기쁨은 이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는 편안한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시대 문명의 부산물인 돈에 문제가 생겼을 때 돈을 따라 가는 것은 수단의 종이 되는 것이다. 시류를 따라 흘러가다 강가에 멈췄다. 인생의 강가에 앉아 산천도 보고 문명에 역행하는 기차를 타고 시골로 가는 것도 방법이겠다. 깡촌의 두 친구가 있는 투박한 문명의 시골은 편하다. 지식도 돈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욕심 없는 마음에 행복과 평화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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