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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66) 내 마음 속의 담석 /하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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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7,742회 작성일 2019-08-08 11:38

본문

< 수필산책 66>
 
내 마음 속의 담석
 
하연수 / 수필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감사)
 
 
이른 아침 안개 자욱한 낙동강 다리를 건너 김해 공항에 도착했다. 나와 같이 인도네시아로 출국하게 되는 김주석이와 그를 배웅 나온 가족이 김해 공항 오른편 구석에 보였다. 부산 사무소 윤 소장 말에 의하면 김주석이 인도네시아 가겠다고 했다가 취소했던 이유가 노모의 반대가 심해서였다고 했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고 친절하게 인사를 드렸는데 노모께서 나를 경계하며 유심히 살폈다. 노모는 공항 안벽을 향해 돌아서서 두 손 바닥을 비비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조상님, 신령님께 비나이다. 우리 대주(大主)가 인도진(인도인 일본 말)땅에 가도 아무 탈 없게 비나이다. 산에 가면 산 귀신 물에 가면 물귀신들, 잡귀들은 썩 물러가라 라고 손으로 물 뿌리는 시늉을 했다. 노인이 가끔 하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말아 달라고 김주석 큰 누나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내가 노모께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지나갔다. 이 가족들이 작별 인사를 하고 있는 동안 나는 잠시 뒤로 물러 서 있었다.
 
낙동강 다리
 
탑승 시간을 알려 주려고 김주석에게로 돌아서는데 김주석의 노모가 갑자기 등을 돌려 급히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김주석의 둘째 누나가 노모의 뒤를 급히 따라가서 팔을 잡았다. 어디서 나오는 힘인지 노모는 딸이 잡은 팔을 뿌리치고 매점을 향해 바쁘게 갔다. 김주석 둘째 누나가 노모의 옷자락은 잡은 채 이끄는 데로 따라가고 있었다. 노모가 매점 앞에서 무슨 말을 하고는 치마 속 돈 주머니를 꺼낸다고 허둥거렸다. 김주석의 둘째 누나가 급히 돈을 지불하고 노모를 덥석 둘러업었다. 매점 여인과 배턴터치 하듯 플라스틱 봉지를 넘겨받은 김주석 둘째 누나는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인 채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가을 운동회 가족 이어 달리기 마지막 주자처럼 빠르게 달려서 노인을 가족들 앞에 내려놓았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김주석의 아버지가 허 참, 허허 참 한숨을 쉬며 안타까워했다. 노모는 구부러진 허리에 왜소한 그 몸으로 나를 가리고 돌아서서 박카스 담은 봉지를 아들 손에 쥐어 주며 저 순사 모르게 마시라고 했다. 노모는 나를 가린답시고 했지만 전혀 가려지지 않았고, 김주석의 귀에 대고 나를 순사라고 한 노모의 말도 모두 들렸다. 김주석 큰 누나가 두 손을 모으고 이해를 해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노모는 가끔 현실과 환상 구별을 못하고 낯선 남자가 집 주변에 보이면 날카로워 진다고 했다. 대동아 전쟁 때 학도병으로 끌려가는 큰 오빠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던 여덟 살 소녀로돌아간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을 데리고 가는 나를 무서운 순사로 보았던 모양이라고 했다.
 
김해 국제공항
 
내가 시계를 자주 보게 되자 김주석 큰 누나는 동생을 출국장 쪽으로 밀었다. 어렵게 오른 비행기는 김주석의 가족을 남겨두고 김해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다. 비행기를 처음 타 본다는 김주석은 창 아래로 눈을 고정 시키고 저기가 사상공단, 낙동강이라며 이삿짐 차에 앉은 어린 아이처럼 중얼거렸다. 멀리 낙동강이 사라지고 난 한참 후에 김주석이 창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나도 육 개월 전 부산신발 해외 첫 공장 PT.GI 창설 선발 대원으로 이렇게 떠났다. 내가 처음 PT.GI사 선발대로 떠나던 날도 이렇게 가슴이 울렁거리더냐고 김주석이 물었다.
 
부산 신발인의 꿈을 펼쳐 보라는 신발 원로 O사장님의 제안을 받았을 때 나도 김주석 이상으로 고민을 했고, 비행기 창 아래로 멀어져 가는 낙동강을 보며 꼭 성공하겠다는 다짐을 수 없이 반복하며 그 슬픔을 견디어냈다고 했다. 내가 그때 일자리를 애타게 찾고 있었던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도 이 땅에는 내가 심어 놓은 것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다만 그때 이후 부산 땅에 나의 미래가 없어서 떠났을 뿐이다. 떠나지 않고 이 땅에 일자리 잃은 사람으로 남아 한 숨이나 쉬고 있기 보다는 일이 있는 해외로 떠나는 것이 차라리 쉽더라고 했다. 내 말에 김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날 내 시야에서 낙동강이 사라져가는 모습은 탯줄이 끊어지고 멀어져 가는 어머니를 보고 있는 듯 했다.
 
부산의 상징-용두산 타워
 
부산신발 산업이 무너져 내릴 때 실직자가 되어버린 나는 사상공단 주변으로 가 보았다. 미래를 꿈꾸며 열심히 일했던 신발공장들이 줄도산을 맞고 주인 없는 묘지가 되어 엎어져 있었다. 내 가슴 속 마른 잎들 위로 겨울바람이 들락거렸다. 공단을 빠져 나와 낙동강 둑으로 올라갔다. 노을 가득한 강둑에 앉아 오래 생각을 했다. 그래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체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 왔다. 다음 날에는 N사 구매담당 유태인 필 즈위블 부장이 살았던 달맞이 고개 언덕 빌라 앞에 앉아 바다를 지겹도록 보고 앉아 있었다. 필 즈위블도 떠나고 가끔 와서 청소도 해 주곤 했던 동래별장 여인도 어디론가 가고 없다. 이곳에 나는 왜 왔는지도 모르고 오후 내내 옷을 갈아입고 있는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해운대 백사장을 걸어가면서도 푸른 동백섬에서 먼 바다 너머 수평선을 보면서도 떠나느냐 마느냐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결국 나는 가족들을 집 근처에 사시는 장모님과 우리 부모님들에게 부탁하고 한국 최초 해외 신발 공장 PI. GI 공장 창설 선발대원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가족을 고향 땅에 두고 온 선발대원들은 자카르타 서부지역 밀림을 밀어내고 공장 건물 올리고 기계 설비들을 설치했다. 첫 생산용 견본, 자재 준비 그리고 인력 수급을 위해 부산에 왔다. 많은 사람들이 인도네시아에 관심을 보였지만 실제로 가자고 하면 “식인종도 산다는 그 위험한 후진국에 무서워서 못 가겠다.” 라고 꼬리를 내렸다. 김주석이도 처음엔 인도네시아 가는 것을 포기했던 사람이었다. 두 번째 와서 만났을 때도 김주석은 가족들 반대가 너무 심해서 갈 수가 없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그 때 내가 김주석을 포기하지 못한 그 인연이 나로 하여금 평생 가슴 속에 남게 될 담석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우리는 온천장 맥주 집으로 자리를 옮겨서 우리가 같이 공유했던 지난 날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나는 AJD(Air Jordan) 프로젝트 개발 시험생산 때 같이 일했고, MJD(Michael Jordan)가 공장 방문 때 안내도 같이 했던 시절 일들을 소재로 많은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 김주석은 자기가 계속 해왔던 전문 분야인 신발 개발 일을 할 수 없게 된 운명을 안타까워했다. 나는 운명(運命)의 운자가 움직일 수 있다는 괴변을 동원해가며 마치 오락프로 진행자처럼 김주석을 설득했다.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인도네시아에 온 김주석은 자기 일에 철저한 사람이었고 일에 대한 책임감은 누구 보다 강했다. 현지인 폭동 사고 일어나서 모두들 피신 할 때도 김주석은 개발실로 뛰어들어 문을 잠그고 창문 쇠창살 틈으로 날아오는 불들을 끄며 바이어 제출용 샘플들을 지켜냈다. 옛 국제상사 기차표 공장 화재 때 불 속으로 뛰어 들어 주요 자재를 메고 나오다 큰 화상을 입은 김OO씨와 함께 신발업계 가장 충성심이 강한 사람이라는 내 말을 듣고 사장님도 김주석의 진면모를 그때서야 인정했다.
 
몇 년 후 바이어 사무실에 신발 샘플을 전달하고 공장으로 돌아오던 밤길에 김주석이 타고 오던 승합차 앞에 대형 트럭이 갑자기 멈추는 대형 사고가 났다. 그 사고로 기사는 운명을 달리했고 김주석은 목을 심하게 다쳐 말을 잃어버렸다. 산업전사 훈장을 달아야 할 김주석의 목에는 두꺼운 목 보호대가 어깨에서 턱 바로 밑까지 채워져 있었다. 김주석의 손을 잡으니 눈만 껌뻑껌뻑 했다. 갑자기 떠나오던 날 아들을 끌고 가는 순사 보듯 나를 바라보던 김주석 노모의 물기 없는 눈이 떠올랐다. 내가 그만 김주석 노모에게 큰 오빠와 아들을 데리고 간 일본 순사가 되어버렸다. 귀국 전 병원에 찾아가도 김주석을 간호하고 있는 그의 아내의 눈을 바로 볼 수도 없었다.
 
 
내게는 집안 먼 친척 동생인 그녀는 내가 밉기도 했을 텐데 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부산신발의 인도네시아 진출 개발 책임자로 큰일을 해낸 김주석이 휠체어를 타고 아내의 도움을 받으며 비행기에 올랐다. 김주석이 부산을 떠나 올 때 김해 공항 상공에서 사상공단, 낙동강이라고 중얼거리며 멀어져 가던 부산을 바라보았듯이 아마 지금쯤 멀어져 가는 수카르노 공항 앞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김주석이 떠난 공항에서 동료들은 살아서 돌아가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말했다. 김주석 운명의 운자가 다시 움직여주면 내 마음 속에 남아 있게 될 회한의 담석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 질 수도 있을까. 나도 명멸하는 공항의 불빛을 바라본다.
혼자의 시간 속에 그를 불러들여 깊은 회한에 잠겨본다.
 
용두산 가는 길-애환의 사십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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