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오늘은 죽기 좋은 날 > 인문∙창작 클럽

본문 바로가기

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사이트 내 전체검색

73c27ae0295d5ccfd060ed5825f883ca_1671375260_4225.jpg

인문∙창작 클럽 (151)오늘은 죽기 좋은 날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7,862회 작성일 2020-08-10 16:33

본문

"오늘은 죽기 좋은 날"
 
김은미 / CEO SUITE 대표
 
 
오늘은 죽기 좋은 날
 
모든 생명체가 나와 조화를 이루고
모든 소리가 내 안에서 합창을 하고
모든 아름다움이 내 눈 속에 녹아들고
모든 사악함이 내게서 멀어졌으니
오늘은 죽기 좋은 날
 
나를 둘러싼 저 평화로운 땅
마침내 순환을 마친 저 들판
웃음이 가득한 나의 집
그리고 내 곁에 둘러앉은 자식들
그래, 오늘이 아니면 언제 떠나가겠나
 
-어느 인디언의 시 - 
 
                                                                                                 
서울 출장 중 주말 아침에 비보를 받았다. 내가 자카르타를 떠나기 전까지도 정정하시던 시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단다. 사방팔방 문의 끝에 자가격리를 피하기 위한 코로나 음성검사증명서를 하루 만에 받았지만, 월요일에 뜨는 비행기가 없었다. 간신히 장례식을 하루 남기고야 돌아올 수 있었다. 시어머니 손에서 자란 보스턴의 아들은 장례식을 맞출 방법을 끝내 찾지 못했다. 인륜도 무시하는 코로나다. 정부의 지침에 따라 직계 가족과 친지들에게만 부고를 보내 문상객도 줄여야 했다. 그런데 빈소를 여러 번 덮을 만큼의 조화가 끝도 없이 배달되었다.
 
장례식은 자카르타 장례식장과 시어머니 고향에 있는 성당, 그리고 오래전 시아버지께서 중국 고향에 지으신 성당 - 이렇게 세 곳에서 동시에 진행이 되었다. 중국, 미국, 호주, 아시아 곳곳에 사는 친지들과 아들은 온라인으로 실시간 참석을 했다. 좋아하는 꽃과 사랑하는 이들에 둘러싸인 시어머니는 관 속에서도 미소를 짓고 계셨다.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로 평생을 보낸 가정주부가 아니라 어느 유명 인사의 장례 같았다. 재물을 쌓기보다 나누시고, 누가 찾아와도 버선발로 환영하는 시어머니 주변에는 늘 잔칫집처럼 사람들이 북적였는데, 돌아가신 날도 변함이 없었다. 코로나조차 문상객들의 애도를 멈추지 못했다. 진정한 '성공'을 이루신 것이다. 그 성공의 비결은 나눔과 사랑이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나니 더 놀랄 일이 있었다. 오래전 마련된 시아버지 묘소에 합장하지 말고 화장을 해서 바다에 뿌리라 유언을 하셨단다. 자식들에게 조금도 폐를 끼치기 싫다는 이유셨다. 인근 바다에 배를 띄워 붉은 장미 꽃잎과 함께 시어머니를 보내드렸다. 평생 순종, 희생하셨던 시어머니셨는데 떠나실 때는 시아버지보다 더 큰 믿음으로 육신의 허무함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신 것이다.
 
늘 그렇지만 시간만큼 좋은 약이 없다. 슬픔이 조금씩 가라앉아서 시어머니 유품을 정리할 정신이 든다. 시어머니 방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우리 결혼사진이 나온다. 대머리가 되기 전 남편은 상당히 동안이어서 연하남 건졌다며 축하를 받았던 날이다. 그 남자가 엄마를 모시고 살 수 있냐고 조심조심 묻기에 겁 없이 OK 했었다. 결혼식 후에야 인도네시아 내 직계 자손들만 140여 명이 넘는 종갓집인 것을 알았다.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방문객들을 피해 사업한다는 핑계로 수시로 출장 짐을 쌌다. 빵점 며느리가 생존하는 방식이었다. 덕분에 은혼식을 순탄히 넘길 수 있었다.
 
임신이 안 되어 불임 치료를 받던 기간에도, 아들이 사춘기를 심하게 하던 때도, 돈벌이에만 연연한 나와 남편이 수시로 집을 비워도 한 마디 염려나 불평이 없으셨던 분, 그 손에는 늘 묵주가 있었다. 천둥 번개가 치는 날도 새벽기도와 일요 미사를 빠진 적이 없으셨던 시어머니시다. 우리 아들도 기도로 키워주셨고, 내 사업의 제일 든든한 백도 그 기도였다. 25년간 시어머니와 한집에서 살면서 한 번도 음성을 높일 일이 없었다. 기 세고 괄괄하던 며느리를 그렇게 기도로 길들이셨던 시어머니께서는 마지막 날 의식을 잃는 순간까지도 묵주를 놓지 않고 기도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고인의 방이 갑자기 위독해져 응급실로 실려 갔던 분의 방 같지가 않다. 마치 떠날 준비를 늘 하고 계셨던 듯 별로 치울 것이 없다. 출장에서 돌아올 때나 생신 때마다 사드렸던 명품백도 옷도 친지에게 미리 나누어 주신 듯 옷장마저 단출하다. 통장에는 딱 마지막 병원비와 장례 비용만큼의 현금이 남아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뒷모습을 본 적이 없다. 웰리빙(Well-living)과 웰다잉(Well-dying)을 곁에서 보고 배울 수 있던 이런 분의 며느리여서 정말 감사하고 행복했다.
 
어머니,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천국에서도 늘 저희와 함께 해주세요.
 
                                                                  
*사진=김은미
 
*이 글은 '데일리 인도네시아'에 함께 실립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PT. Inko Sinar Medi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