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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니 문화 연구원 인터넷 문학상 / 나, 너, 우리 (우수상 자카르타경제신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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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기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5,365회 작성일 2017-11-16 11:52

본문

나. 너. 우리 
박미소 (JIKS 9학년 )
 
지금부터 15살 박미소, 10년의 인도네시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처음 아빠께서 먼저 회사 때문에 인도네시아로 출장을 가시고, 영상통화를 하면서 들은, 6살, 그때에 이야기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여기는 집안에 찌짝이라는 조그마한 도마뱀이 사는데 한국보다 덜 깨끗해. 뱀도 많고, 개구리도 많고 바퀴벌래도..”
 
이 이야기를 들은 어린이 박미소는 한 단어만을 연상 시킵니다. 정글. 정글북이라는 동화에 나온 곳에서 나도 살겠구나. 일단 걱정만 태산이였습니다. 당시 해외나 이주 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 몰랐던 이 어린아이는, 서서히 슬퍼지기 시작합니다. 내 유치원 친구들은..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은… 애들이랑 유치원 끝날 때마다 부르던 마법의 성은…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그 행복한 기억은, 유치원에서 끝날때다마 아이들끼리 동그랗게 옹기종기 모여앉아 각자 트라이앵글, 캐스터냇츠, 심벌즈 등 악기를 하나씩 꺼내면 시작됩니다.
 
“믿을 수 있나요 나의 꿈속에서 너는 마법에 빠진 공주란걸~”
 
각자 생각에 맞춘 박자로 마법의 성 리듬을 타면서 노래를 부르다 마지막 한 소절에  ”너무나 소중해 함께라면~” 하고 노래가 끝나는 순간 아이들의 클라이막스가 시작됩니다. “함께라면~” 으로 끝났던 가사를 이어 저와 제 친구들은 “라면~먹자 라면 먹자 라면먹자 먹자 먹자…” 하고 마지막 피날레를 끝냈습니다.
 
저는 그 당시 탬버린 주자로 마지막까지 신나게 흔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즐거웠던 일상들과 이별함으로써, 어릴 때 인도네시아라는 곳을 처음 방문한 저는 몹시 우울했습니다. 환경이 바뀌면서 일상이 깨졌고, 곁에 있던 사람들은 서서히 잊혀져 갔습니다.
 
그 도착한 날엔, 한국과 비교되지 않을 엄청나게 큰 2층짜리 집의 방문이 제 눈 앞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암담한 마음, 넘을 수 없는 벽 이렇듯 인도네시아는 저에게 매우 절망적인 현실이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인니어는 커녕 알파벳의 A도 몰랐던 저는 현지 유치원을 다니게 됩니다. 말도 안통하고 그 당시에 저와는 확연히 다른 피부색과 얼굴을 가진 아이들에게 시나브로 이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현지 유치원에 적응하기 위해 알아야 했고, 어린 나이에 인니어 학원과 영어학원을 다니며 울며 겨자 먹기로 배웠습니다. 실제로 매일이 울상에 학원가기 싫어서 아픈척, 힘든척 울고 다 해봤지만 그때마다 단호하신 엄마께서는 “안돼. 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그 한마디가 정말 원망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께서 그러셨기에 지금 이 나이까지 힘들지 않게 인니어 공부를 하는 것 같습니다. 또 스펀지처럼 빨아들일수 있는 혜택의 나이에 영어를 공부한 때문인지, 지금도 문법을 몰라도 느낌으로 찍어 맞히는 경험을 여러 번 하게 됩니다.
 
 
현지 학교를 다닐 때 어머니께서  ’’너는 그때  거의 웃은 적이 없어.” 라고 하실 만큼 학교에서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한 유모 겸 도우미 한 사람만이 바쁜 부모님을 다음으로 제가 의지할 한 사람 이었습니다.
 
지금와서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도 까까 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저를 아끼고 저도 아꼈던 첫 까까언니는 항상 함께 여러 곳을 돌아다녔는데 그때마다 다른 집 까까들과 웃으며 대화도 나누고 먹을 것을 서로 나누며 수다를 떨었습니다. 까까들 말하는 그 사이에서 저도 껴서 재롱 피우곤 했던 기억이 문득문득 떠오릅니다. 처음에는 한국에 흔하지 않던 유모, 식모라는 존재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지만 그 언니가 저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마음을 알았기에 의지하고 싶은 인도네시아 사람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일순간에 바뀐 혼란스럽고 힘든 환경에서 힘이 되었던 존재였고 인도네시아의 좋은 점을 더 알게 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그로부터 저는 인도네시아 사람의 활발함과 특유에 여유로움을 알게 되었고, 현지 친구들에게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 사귄 선생님과 친구들은 지금 마주쳐도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기억이 뚜렷합니다. 삼(Sam) 이란 친구는, 작고 약간 찢어진 두 눈에 머리는 아프리카 특유의 래게같은 빽빽한 곱슬머리이고 살이 까무잡잡했으며, 항상 할어버지를 연상케하는 배바지 패션의 친구였습니다.
 
운동장에서 남자아이들과 축구를 하며 삼이란 친구와 엄청 웃고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또 알핀(Alfin)이라는 친구는 그때의 킹카로 저를 포함한 여러 여자아이들은 통으로 집어삼켜 헤어나오지 못하게 했던 황금비율에 얼굴천재, 거짓을 좀 보태면 스포츠 머리를 한 요즘 잘 나가는 잘생긴 배우, 지창욱을 닮았었습니다. 보여줄 수 없어 아쉽지만 그의 옆모습에 빠져 그림 그리던 제 모습이 기억 속에 사진으로 인화 되었습니다.
 
또 대머리의 덩치가 큰 우리 체육쌤도 여느 여자아이와 다르게 점심시간마다 남자아이들과 노는 저를 보시고, 운동을 잘하고 좋아하는 저를 예뻐하셨습니다. 이렇게 점점 인도네시아라는 환경과 사람들에게 익숙해질 무렵 까까는 저희 집을 떠납니다.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저에게 인도네시아라는 이미지에 좋은 영향을 줬던 언니가 어떤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더이상 저희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다른 까까가 왔고 저는 그때도 새로운 까까와 놀이터에 가서 그네도 타고 모래로 굴을 만들어 물을 부은 뒤 즐겁게 놀았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집도 이사하고 현지 유치원을 떠나 한국학교 직스를 다니게 되자 현지친구들과 함께 놀 기회가 줄어들고 한국사람들과 더 어울리기 시작합니다.
 
현지 친구의 빈자리를 한국 친구가 채우며 그들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문화를 공감하며 즐겁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초등학교를 입학하여 하교도 늦은 시간에 할 뿐 더러 현지 아이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언니와도 대화를 피하게 되었고 해를 거듭할수록 거리가 더 멀어짐을 느꼈습니다. 그럴 때면 첫 까까언니와 함께 했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합니다.
 
한 살 한 살 더 성장해갈수록 한국의 문화와 인도네시아의 문화가 많이 다름을 느껴가며 가까운 현지인이라도 인사조차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매일 아침, 저희 집에서 동네 밖으로 나갈 때 정겹고 활발하게 ‘슬라맛 빠기’ 하고 인사해 주시고, 저녁에는 정자에서 제가 농구하는 것을 지켜보시다가 같이 공을 던지고 놀았던 우리동네 경비아저씨. 또 농구할 때 제 공이 멀리 날아가면 먼저 가서 주워주었던 또래 인도네시아 친구. 이런 사람들의 쾌활함과 친절함을 뒤로 한 채 좋았던 관계가 멀어져 가는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그 사람들의 친절함과 낙천적인 성격은 변함없지만, 이 사람들을 보는 제 시선이 변하며 멀어지게 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제가 현지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그 사람들은 한국의 민족성을 느낍니다. 첫 까까언니도 저와 놀 때 ‘한국 아이는 즐겁고 쾌활하며 나와 잘 맞는 친근한 아이’ 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의 내 이웃은 ‘인사도 안하고, 잘 웃지도 않는, 어렵고도 먼 사이’ 라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곳에 사는 우리는 각각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관들 입니다. 우리의 행동하나, 말투 하나에서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문화와 생활양식, 그리고 한국인의 됨됨이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제 현지 이웃들은 저를 보고 ‘한국인은 원래 다 이렇게 인사성도 부족하고 친해지기 힘든 사람들이구나’ 라고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요? 이것이 타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더욱 더 신중하고 조심해야 할 이유일 것입니다.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많은 나라에서 피부 색과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무시하는 모습은 한국사람이 인도네시아사람을 대할 때 느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나라의 국민들은 외국인으로 살고 있는 우리에게 굉장히 호의적입니다. 바라기는, 타고난 성품으로 우리나라 국민보다 행복지수가 높은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좋은 감정으로 교류하며 이들에게서 선한 영향을 받아 함께 사는 행복한 인도네시아가 되면 좋겠습니다.
 
2009년, 현지유치원 졸업을 앞두고
 
수상소감
부족한 글솜씨에도 우수상을 받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이 글을 쓰면서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저를 회상하며 추억에 젖을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마감 몇 분 전, 늦은밤까지 계속 썻지만 제 이야기를 풀어놓느라 피곤한 줄도 모르고 열심히 한것 같습니다. 개최의 목적대로 많은 사람들이 글짓기에 참여하고 수상작을 읽으며, 인도네시아의 여러 장점들을 발견하고 인도네시아를 긍정적으로 인식하여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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