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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20) 향기 /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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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5,678회 작성일 2018-09-12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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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산책 20 >
 
향기
 
이영미/수필가,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유년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다름 아닌 담배 냄새였다. 코끝을 찌르는 텁텁하고 알싸한 향, 맡아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금단의 냄새, 공공장소에서 누군가의 옷이나 손에 밴 담배냄새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태우지 않은 담배개비에는 좋은 냄새를 뜻하는 ‘향기’란 단어까지 하사한 이유, 거기에는 어린 시절의 그리움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동전 두 개를 손에 쥔 채 대문 밖으로 달려나가는 양갈래 머리의 어린 소녀가 아직 내 안에 살고 있다. 자라지 않은 모습 그대로. 대문을 나와 백 걸음을 뛰어도 지천으로 깔린 은행나무 조각보 길을 지나면 가을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마지막 춤을 추는 코스모스 길이 있었다. 그 길의 주인은 눈요기거리에나 쓰일 코스모스가 아닌 벼논이었음에도 누런 낟알을 매단 벼는 내 기억 속에서는 배경일 뿐이다. 코스모스가 늘어선 논을 지나면 버스 한 대 지나다닐 정도의 비포장 도로가 나왔다.
 
 
그 길의 끝에 새마을 운동 정신이 새겨진 비석으로 표시된 버스 종점, 그곳이 어머니를 위한 심부름의 종점이었다. 상호명도없는 그곳은 오래 전 행인의 식사와 숙식까지 책임지는 주막이었다는데, 내가 태어난 뒤로도 여전히 '주막'으로 불리는 구멍가게가 있었다. 언제부터 갈색 나무로 짜맞춘 진열장에 과자 몇 개 들여놓은 구멍가게가 마을의 최다 승객이 몰리는 종점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주민들 사이에 불만은 없었다. 도로 사정이 열악한 80년대 시골 버스가 제 시간에 오기란 쉽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정해진 시간에 버스가 도착하지 않으면 주민들은 “오늘은 버스가 안 올라 보네.”란 초연한 말을 주고받으며 종점으로 어슬렁거리며 모여들기도 했다. 마땅히 지난밤부터 장에 나가 볼일을 볼 보퉁이를 꾸렸을 것인데도 조급해 하는 어른들이 없다는 게 어린 나에겐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또 하나, 구멍가게의 나무 문을 열고 들어서는 동시에 안방에서 주막을 지키던 백발의 노인이 귀신같이 안방 문을 열던 것도 미스터리로 남았다. 그 옛날 끊이지 않는 손님으로 시끌벅적 되었을 주막의 흥망성쇠를 기억하고 있을 것만 같은 주인 할머니. 그는 머리 위에 흰 구름을 얹고 사는 신선이었다. 비단 외모뿐 아니라, 노인의 기막힌 청각이 아이들 사이에 떠도는 주인 할머니의 신선설(神仙說)을 뒷받침해 주었다. 나무로 된 가게문을 여는 소리 따위는 습관처럼 틀어져 있던 흑백 텔레비전 소리에 묻힐 법도 한데, 노인은 매번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구멍가게로 연결되는 미닫이 문을 열어 손님을 맞이했다. 입에는 기다란 곰방대를 문 채…손님이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어린 나라는 것을 확인하면 '쯧쯧' 혀를 차며 텔레비전 문갑의 서랍을 열었다. 내 손에 들린 동전을 받아 확인하면 청자 한 갑을 내주었다.
 
 
 
나는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손에 꼭 쥐어 땀에 절은 동전 두 개를 누런 장판 위에 내려 놓고 돌아섰다. 물론 달콤한 유혹을 거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 옆에 걸려 있는 알록달록한 풍선 뽑기와 풍선껌, 조그만 항아리만한 플라스틱 통 속에 들어 있는 왕사탕.
본성이 이성을 앞서던 어린 나를 붙든 것은 엄마의 분 냄새였다. 내가 정말 맡고 싶어하던 엄마의 향기.
 
엄마의 치부를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 품 안에 넣고 온 담배를 받아 든 엄마는 나를 꼭 안아 주셨다. 어떨 때는 말없이 머리만 쓰다듬다가 아궁이에서 알맞게 익은 군고구마를 꺼내 껍질을 까주셨다. 대여섯 살 된 기억 속의 나는 담배를 사 들고 오는 것이 부끄럽다는 것을 어찌 알았을까? 어둑해지는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피우며 저녁을 준비하는 엄마가 몰래 들이켰다 내뱉는 담배연기 때문이었음이라. 하루 농사일을 마치고 텔레비전앞에 누워 저녁의 여유를 즐기는 아빠나 할머니, 조롱조롱 박처럼 엄마 허리 춤에 매달린 네 아이들을 위해 무쇠솥에 밥을 앉히던 엄마,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며 고단한 하루를 토닥거리던 나의 어머니.
 
 
훗날, 구멍가게 노인의 입에 문 곰방대에 욱여넣은 담뱃잎이 타들어가는 냄새를 맡으면 머리가 노래졌던 이유를 알았다. 담배 속 니코틴 성분에 의한 어지러운 현기증이었다. 뭉게구름 속의 노인은 그저 담배를 태우던 할머니였다는 것도, 하지만 한 손에 밥 짓는 부지깽이를, 한 손에는 담배를 든 채 삶이 애환을 태우던 엄마의 모습에 다른 이유를 붙일 수 없다. 어린 딸에게 당신에게서 나는 담배 냄새마저도 분 향기로 승화시키는 어머니라는 존재.
 
비행기로 7시간 거리의 이국땅에서 살며 일 년에 한 번, 그것마저 여유롭지 않다면 한 해 걸러 한국에 들어간다. 거대한 과학기술의 집약체가 이륙하기 전부터 비행기 좌석에 앉은 나는 엄마의 향기를 떠올린다. 감은 눈 앞에 부연 담배연기처럼 아른거리는 기억의 아지랑이, 거기 머리가 하얗게 센 엄마가 한쪽 무릎을 세운 채 정갈히 앉아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동맥경화에 걸려 반 나절에 걸친 수술 끝에 다시 숨쉴 수 있게된 나이든 여인.  '절대 금연'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하루 아침에 절연한 의지의 여인이 꼿꼿이 앉아 웃는다. 새끼 얼굴 하루라도 더 보다 가려는 의지로 40년 간의 흡연 습관을 금연으로 실천한 엄마의 노년의 삶이 솜털처럼 가벼워서일까? 담배연기 덮을 아궁이 속 생가지 타는 연기가 없어서일까?
 
몽실몽실 눈앞에서 춤 추던 담배연기를 가슴 속 나이테로 새긴 노쇠한 몸뚱이. 어미의 젖무덤을 찾는 젖먹이처럼 그녀의 팔에 얼굴을 묻은, 늙어가는 딸이 킁킁대는 늙어버린 엄마의 살내음, 그녀의 살에서 베 어나는 세월의 향기에 코를 묻는다. 울컥, 뜨거운 눈물이 기도에 걸린다.
 
아아, 나의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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