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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인니 지부 (6) 지키고 싶었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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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5,741회 작성일 2018-04-04 10:32

본문

<수필산책 6 >

지키고 싶었던 약속
 
하 연 수 / 한국문협 인니지부 감사
 
 
늦겨울, 고향으로 가는 길은 쓸쓸하게 느껴지는 저녁비가 산에도 길에도 나무 위에도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새들은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날 저무는 이 시간까지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내가 어릴 적, 마을 앞 개울에서 코흘리개 친구들과 장보러 떠난 어머니를 기다리다 큰 바위 산 근처까지 오게 되었다. 아이들끼리 스스로 이곳까지 내려 와 보기는 모두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계곡을 따라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바위 산들에 범들이 다닌다는 누군가의 말에 아이들은 병아리들처럼 엉덩이 마주하고 모여들어 겁에 질려있는데, 세상이 어두워지고 우리가 내려 온 길 뒤로 검은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신발을 벗어 들고 발 소리를 죽이며 조심조심 걸어도 범들이 등 뒤에서 가만가만 다가오는 듯 해서 아래 마을 입구까지 돌아 보지도 못하고 내내 가슴 졸이며 돌아갔던 길이다.
 
 
그 날 이후, 이 고향 길은 내가 성인이 되어서도 내 꿈들과 다짐을 모두 들어 준 길이고 신이 날 때도 가슴 아플 때도 항상 내 마음들을 어루만져 준 이 길이야 말로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내 마음의 친구다. 특히 내가 지키지 못한 어머니와 약속에 얼마나 죄스러워하고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길이다. 이제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두 달도 채 안되었지만 어머니 49제를 보려고 열대의 나라인 인도네시아에서다시금 먼 길을 날아와서 날 저문 이 시간, 고향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차를 타면 더 빨리 쉽게 갈 수 있는 길이지만 오늘만은 걸어서 가기로 했다.내가 어머니 손을 마지막으로 잡아본 날은 몇 해 전, 가을 오후의 해질 무렵이었다. 그날은 내가 소식도 없이 늦은 오후 불쑥 고향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께서는 집 대문 앞 담장 아래, 황매화 나무에 겨울 옷을 입히고 계셨다. 
 
다른 해 보다 더 자주 오는 나를 보고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혹시 올해 가족들을 데리고 귀국 하려는가 물으시는 어머니께 나는 환한 웃음으로 답해드렸다.그냥 서울 출장 온 김에 잠깐 인사드리려 왔다고 했다. 어머니 당신께선 이제 한국으로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냐고 넌지시 물으셨다. 큰 아이 중학교 갈 때 꼭 돌아 오겠다던 처음 약속이 고등학교로 변경되었고 이제 그것이 대학교 입학으로 쉽게 넘어갔다. 그 거짓말들이 내 가슴을 누르고 있는 짐이 되어있음을 눈치 채셨는지 “그래, 어디서던 네 식구들 살뜰히 챙기며 같이 잘 살면 된다” 라고 하셨다.
 
내년 봄 다니러 오면 이 황매화들이 대문 밖 담장 아래 무더기로 펴서 나를 반겨 줄 거라고 하셨던 당신께선 그 해 겨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이웃 동네 소년의 오토바이를 피하려다 뇌를 다치신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나는 밤새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고 대문 앞에서 어른들은 나를 집 담장을 돌아 문중 밭 흰 천막으로 안내했다. 마을 앞에서 당한 사고였지만 객사라서 집안으로 모시지 못했다고 했다. 추운 날 문중 밭 흰 천막 아래 마련 되어있는 빈소에서 주무시는 듯한 모습의 어머니의 모습을 대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환하게 웃으며 대문을 들어서는 내 모습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던 어머니를 위해 내 얼굴 근육을 비틀어서라도 어머니의 영정에 웃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를 썼다.
 
약속을 어긴 마음의 짐도 있는 나는 어머니 손을 잡을 때마다 언제나 이번이 마지막이 아님을 하늘에 감사 드렸고, 다음날도 이런 모습으로 어머니를 뵐 수 있기를 기도하며 고향 길을 오고 갔었다.그런데 이제는 다시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 속에 남아 있었던 죄스러움이 왈칵 목구멍을 넘어 눈으로 몰려왔다.
이제 입관 식을 치르면 다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만져볼 수도 없기에 나를 업어 키우신 어머니의 가늘어진 팔 다리도 만져 보고 온화하고 인자하셨던 어머니의 얼굴도 쓰다듬으며 똑 같은 거짓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는 자식 없는 편안하고 좋은 곳으로 떠나시라고 눈물로 어머니와 작별을 했다.
 
이 추운 날, 밖에서 입관을 기다리게 만든 고지식한 집안 어른들에게 법도와 예의는 무엇이고 그것을 고집하는 가문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항의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옳고 그름을 따지던 집안 어른들도 이 때만은 슬픔이 복받친 내 행동을 못 본척하며 격한 감정이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어머니께서 즐겨 다니셨던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만들어 드리고 그곳 지신과 나무들에게 소주를 뿌려주며 어머니가 외롭지 않게 좋은 친구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날 이후, 인천공항 로비에 보이는 중년남자얼굴들에서 내가 처음,인도네시아 행 비행기를 오를 때 내 옛날의 얼굴이 오버랩 되어 눈에 들어 온다. 아무 것도 모르고 천방지축 뛰어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서 지난 시절,내 아이들을 보는 것처럼 가슴이 아리다. 
 
내 꿈 욕심에 가족들의 생활무대를 이역만리 낯선 땅으로 송두리째 옮겨놓는 일이 과연 올바른 선택일까? 그렇게 성공했다 한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지키지 못했다는 허무함과 내 세속적 성공은 그저 허접스럽기까지 느껴진다.
 
어머니를 기다리다 범이 나올까 두려워하며 돌아간 어릴적 그 날처럼 길 건너편 가파른 산 비탈에 있을 바위들을 바라보았다. 빗줄기와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는 않아도 그곳에는 아마 옛날처럼 바위들이 비를 맞고 있으리라. 이제는 기다리는 어머니도 안 계시고 사람들도 없는 텅 빈 곳으로 가는데, 시간이 늦은들, 범이 나온들 무슨 대수랴. 무서운 것은 범 바위가 아니고 알 수 없는 사람의 길이런가.
 
‘사람이 살면 천 년을 살더냐? 어디에 살던 가족과 같이 근처근처에 모여 행복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 아니냐?’ 
 
지금도 어둠 속 길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빗 줄기에 담아 조용히 내게 전해 준다.
‘그래요 어머니! 내년 봄 고향 집 담장 앞에는 어머니가 이 못난 아들을 위해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던 황매화들이 나를 맞이해 주겠지요?' 
 
이끼 낀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그 동안 살아오며 무거워진 내 마음도 젖은 풀섶에 가만히 내려 놓는다. 내 얼굴을 스치며 살포시 지나가는 바람이 어머니의 숨결처럼 다정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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