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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아쩨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메가와띠의 책임을 묻다 사회∙종교 편집부 2023-07-05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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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아쩨인동맹(ARA)의 대학생 회원들이 지난 2005년 헬싱키에서 맺은 정부와 아쩨해방운동 간에 맺은 평화협정에서 약속한 아쩨거버넌스를 지원하는 정부규정 및 대통령령을 시행하라고 조코위 정부에 촉구했다.2014.11.11(사진=자카르타경제신문/Aditya)

 

*본 내용은 자카르타포스트 630일자 논설입니다.

 

1999년 인도네시아 총선에서 투쟁민주당(PDIP)이 승리한 후 메가와띠 수까르노뿌뜨리는 1976년 이후 줄곧 반군과 정부군 사이의 무력 충돌이 계속되고 있던 아쩨가 더 이상 고통받지 않게 하겠다고 천명했다.

 

독재자 수하르또가 몰락한 이듬해에 치러진 총선에서 투쟁민주당은 당시 462개 국회의석 중 33.7%153석을 차지했다. 당시 인도네시아 민주주의의 아이콘으로 부상하고 있던 메가와띠는 TV 연설에서 갈등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던 아쩨 주민들에게 더 이상 아쩨가 피흘리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하며 눈물을 뿌렸다.

 

그녀는 쯋냑(Cut Nyak)은 렌쫑의 땅(Tanah Rencong)에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아쩨 주민 여러분, 나를 믿어 주세요!”라며 호소했다.

 

쯋냑(Cut Nyak)이란 아쩨에서 고귀한 기혼 여성을 이르는 칭호이고 렌쫑(Rencong)이란 아쩨의 전설적인 여성 독립투사 쭛냑 디엔(Cut Nyak Dhien)이 즐겨 사용했던 전통 단검이다. 따라서 (쯋냑 디엔의) ‘렌쫑의 땅이란 아쩨를 지칭한다. 메가와띠는 자신을 스스로 쥿냑 디엔에 비견하며 아쩨에 평화를 선사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하지만 많은 아쩨인들은 메가와띠가 과연 그 약속을 지킬 것인지 회의적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수까르노 초대 대통령도 1945817일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선언한 직후 아쩨에 이슬람 율법에 입각한 샤리아법을 정책적으로 시행할 자치권을 주겠다고 한 약속을 보기 좋게 뒤집은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메가와띠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데 그녀가 199910월에 MPR 국민자문의회에서 벌어진 대통령 간접선거에서 무슬림 고위 성직자인 압두라흐만 와히드에게 패배했기 때문이었다.애당초 정책을 주도할 지위에 오르지도 못한 것이다. 그 대신 그녀는 부통령직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다가 2001년 와히드 대통령이 국회로부터 탄핵당하자 메가와띠는 그의 남은 임기를 승계하면서 인도네시아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제 아쩨에서 더 이상 피흘리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위치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메가와띠는 서슴없이 그 약속을 깨고 오히려 지난 수십년 간 계속된 반군 활동을 종식시킨다는 명목으로 2003년 아쩨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 과정에서 메가와띠가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최근 공식적으로 국가책임을 인정한 12건의 중대 인권침해 사건 중 하나에 도덕적 책임을 져야만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12건의 사건들 중에는 아쩨 장보 끄뽁(Jambo Keupok)에서 벌어진 학살사건도 포함되어 있다. 그 사건은 메가와띠가 명령한 아쩨에서의 군사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벌어졌다.

 

아쩨의 군사적 갈등이 종식된 것은 2005년의 일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랜 갈등의 땅에 화해를 가져온 것은 아쩨 주에서만 13만 명 이상, 동남아 전역 기준으로는 4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도양 쓰나미라는 거대한 자연재해였다.

 

조코위 대통령은 지난 627() 아쩨 삐디(Pidie) 지역에서 열린 관련 행사에서 국가가 저지른 12건의 중대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비사법적 해결 방식을 개시한다고 공식 선언했다. 해당 행사가 열린 루모 그동(Rumoh Geudong)은 정부군이 현지 민간인들을 고문하고 살해했던 곳이다.

 

12건의 중대 인권침해 사건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965-66년 사이 전국적으로 벌어진 공산당 사냥을 통해 최소 50만 명이 살해된 이른바 인도네시아 대학살사건이다.

 

또 다른 사건으로는 조코위 대통령 측근인 헨드로쁘리요노(Hendropriyono) 예비역 장군이 연루된 1989년 람뿡 소재 딸랑사리(Talangsari) 학살사건, 1997-1998년에 벌어진 민주주의 활동가들의 실종사건, 1998년 뜨리삭띠 대학교 학생들에 대한 총격사건, 스망기 인터체인지에서 군이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한 두 건의 별도 사건, 1993년 꺼르따스끄라프트아쩨(KKA) 사거리 사건, 1998년 아쩨 루모 그동 학살사건 등도 해당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다.

 

메가와띠가 2001년 대통령에 취임할 때 아쩨 주민들은 그녀가 지난 맹세를 기억해 줄 것을 기원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인 수까르노가 범했던 뼈아픈 약속 파기를 동시에 기억하며 그녀의 진심을 의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아쩨 주정부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수까르노는 19486월 아쩨를 방문해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들과 싸울 수 있도록 헌금해 달라며 아쩨 주민들에게 호소했고 아쩨는 이에 부응해 인도네시아의 첫 비행기인 슬라와(Seulawah)호를 헌납했다.

 

하지만 1953년 수까르노는 보란 듯 약속을 번복했다. 인도네시아의 그 어떤 지역에도 이슬람법의 시행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천명해 아쩨 주민들을 배반하고 만 것이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었다.메가와띠도 아버지의 선례를 따라 아쩨에 대한 자신의 약속을 스스로 깨버렸다.

 

물론 처음엔 그녀도 내전을 끝내기 위해 아쩨해방운동(GAM) 반군 단체들과 협상에 나서 이슬람법에 입각해 완전한 자치권을 가질 수 있도록 아쩨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 동의했고 2002129일 자카르타 중앙정부와 아쩨해방운동 대표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나 적대 행위를 종식하는 휴전협정에 서명하기에 이른다.

 

이를 위해 헨리 듀넌트 센터(Henry Dunant Centre)가 협상 중재에 나섰고 일본 정부도 반군과 인도네시아 중앙정부 사이의 대화의 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당시 유럽에 망명 중이던 아쩨해방운동 지도자와 지리한 협상에서 좀처럼 의미있는 진전을 만들지 못하자 메가와띠의 인내심이 마침내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통일국가로서의 인도네시아라는 기치 아래 아쩨 반군에게 전면전을 선포해버린 것이다.

 

아쩨에 계엄령이 선포된 후 3만 명의 인도네시아군 병력이 반군 소탕작전에 나섰고 경찰도 12천 명이 배치되어 아쩨해방운동을 압박해 들어갔다. 군이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인권침해범죄를 조직적으로 자행한다는 소식이 퍼져나가며 국제사회의 비난이 크게 일었으나 메가와띠는 못 들은 척으로 일관했다.

 

당시 군 자료에 따르면 일년 동안 인도네시아군은 2,439명의 반군을 사살하고 2,003명을 체포했으며 1,559명의 반군이 정부군에게 투항했다. 같은 기간 정부군 피해는 군인 전사자 147명과 부상자 422명뿐이었다.

 

당시 메가와띠의 결정은 수하르또가 말년에 9년간 유지했던 군 비상사태와 유사했다. 계엄령에 비견될 만큼 강력했던 당시 군 비상사태는 1998년 수하르또가 하야하면서 비로소 끝났는데 10여년이 흐른 후 메가와띠가 똑같은 역사를 반복한 것이다.

 

수하르또와 메가와띠 사이의 두 대통령, BJ 하비비와 와히드 대통령은 보다 원만한 접근법을 채택했고 그 기간 동안 아쩨에서 반군들과의 무력 충돌은 그 빈도가 크게 줄어들었던 바 있다.

 

20163월에 나온 국가인권위원회(Komnas HAM) 보고서에 따르면 남아쩨군 잠보끄뽁에서 벌어진 학살사건은 메가와띠가 아쩨에 계엄령을 선포하기 직전인 20163월에 벌어졌다.

 

잠보끄뽁 사건이란 16명이 산 채로 불태워지고 네 명이 근거리에서 총격을 당했고 또 다른 16명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다섯 명의 여성도 심한 구타를 당해 중상을 입었다.

 

2004519일 메가와띠는 아쩨의 비상사태를 6개월 연장했다. 그런데 그 이후의 상황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그해 9월 대선에서 메가와띠는 자신의 안보보좌관이었던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에게 패배해 대통령직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불과 몇 개월 후인 20041226일 거대한 쓰나미가 인도양에 접한 국가들 해변을 초토화시켰는데 아쩨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상 최악의 자연재해로 인해 정부와 반군의 대화는 급물살을 탔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유숩깔라를 위시한 정부측 대표단과 아쩨해방운동 지도자들이 몇 개월간 협상을 계속한 끝에 2005815일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마침내 양측이 평화협정에 서명한 것이다. 그렇게 내전은 끝났지만 치유되기 어려운 후유증은 여전히 남아있다.

 

정부가 인정한 12건의 국가폭력에 의한 중대 인권침해 사건 중 세 건이 아쩨에서 벌어졌고 그 중 하나는 메가와띠가 선포한 계엄령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그녀가 당시의 참혹한 사건에 대해 일말의 책임을 느낀다면 당시 희생자들과 유족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지금이라도 응분의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자카르타포스트/자카르타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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