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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기고란 인도네시아 여성영웅의 전형 - 쭛냐디엔 (Cut Nyak Dh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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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9,907회 작성일 2021-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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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여성영웅의 전형 - 쭛냐디엔 (Cut Nyak Dhien)

배동선 /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
 
▲쭛냐디엔
 
오늘은 어쩌면 인도네시아를 특별히 공부하는 게 아니라면 교민들이나 본국 한국인들이 관심을 가질 이유가 거의 없는 인도네시아 근현대사의 여성 영웅의 이야기를 현지 영화산업 이야기와 덧붙여 살짝 버무리려 합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독립 이후 국가영웅으로 지정한 인물들은 근현대사를 망라해 백수십 명이 있고 매년 특별한 날을 기해 시의성 있는 인물들을 추가로 선정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30일엔 인도네시아 영화의 날을 맞아 현지 영화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우마르 이스마일(Umar Ismail)이란 인물을 국가영웅으로 선정해 달라는 청원이 현지 영화계에서 크게 일었으나 성사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백수십 명의 인도네시아 국가영웅들 중 여성들은 사실 한 줌도 되지 않습니다. 나름 이름을 알린 사람으로는 여성교육의 선구자 까르티니(R.A. Kartini),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의 영부인(세 번째 부인) 파트마와티(Fatmawati), 인니 교육계 국가영웅인 끼 하자르 데완타라(Ki Hadjar Dewantara)의 할머니 뻘로 족자 일대에서 네덜란드군과 맞선 니 아긍 세랑(Ni Ageng Serang), 오늘 여기서 다룰 아쩨 술탄국의 쭛냐디엔(Cut Nyak Dhien), 아쩨의 또 다른 여성영웅 쭛 므티아(Cut Meutia)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영화계는 코로나로 입은 괴멸적 타격에서 회복하려 애쓰는 가운데 정부차원에서 ‘극장으로 돌아가자’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2021년 5월 관심을 끈 인도네시아 영화는 비시네마 픽쳐스(Visinema Pictures)의 신작 환경 다큐멘터리 <플라스틱 섬(Pulau Plastik)>과 1988년 작품의 복원판 <쭛냐디엔{Tjoet Nja' Dhien)>입니다. 특히 <쭛냐디엔> 시사회에는 무하지르 에펜디 인류문화조정장관, 에릭 토히르 국영기업부 장관 등이 공식 참석해 독립투쟁 영화에 대한 응원과 영화산업 지원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낸 바 있습니다.

생소하기만 한 인도네시아 독립투사들, 그것도 머나먼 수마트라 북단에서 <쭛냐디엔>이란 여성의 투쟁사를 일단 수박 겉핥기 식으로 큰 줄기만 짚어 보기로 합니다. 이 사람이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1998년 발행본 1만 루피아 지폐인물이라면 좀 친근감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1998년 발행 1만 루피아 지폐

어린 시절
쭛냐디엔은 정통 이슬람이 전파된 아쩨의 무킴 제6지구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Mukim은 아쩨의 행정구역 단위. Kecamatan(구)의 하위 개념이나 ‘지구’, ‘권역’ 정도로 번역, 그 행정구역의 수장을 뜻하기도 함)

아버지 뜨꾸 난타 스티아(euku Nanta Seutia)는 무킴 제6지구 훌루발랑(hulubalang – 술탄국의 총리, 울리발랑 uleebalang과 같은 뜻으로 간주됨)이자 미낭까바우 출신 이주귀죽 다뚝 마쿠둠 사티(Datuk Makhudum Sati)의 후손이기도 했다. 다뚝 마구둠 사티는 빠리아만 왕국시절 술탄 이스칸다르 무다(Sultan Iskandar Muda – 1593~1636. 아쩨 술탄국 전성기의 술탄) 시절 아쩨 술탄국을 대표하는 해상제독의 후손이었다. 그가 아쩨 술탄국에 온 것은 술탄 자마룰 바드룰 무니르(Sultan Jamalul Badrul Munir)가 제위 중이던 18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한편 쭛냐디엔의 어머니는 람빠그(Lampageu) 지역 훌루발랑의 영애였다.

어린 시절 그녀는 예쁜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부모와 종교선생에게 종교를 배웠고 집안에서는 요리와 신부수업, 일상생활을 위한 지혜를 배웠다. 그녀에겐 청혼자들이 줄지었고 12살이 되던 1862년 부모가 정해준 정혼자 뜨꾸 이브라힘 람응아와 혼인했다.

아쩨 전쟁
▲렌쫑(rencong)은 아쩨 족 전통 검이다.

쭛냐디엔은 네덜란드 왕국군이 1873년 아쩨를 침공해 라야 바이투라흐만 사원(Masjid Raya Baiturrahman )을 불태울 당시 렌쫑 검을 들고 그들과 맞서 싸웠다. 1873년 3월 26일 아쩨 술탄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네덜란드군의 전함 시타델 판 안트베르펜(Citadel van Antwerpen) 전함이 해상에서 아쩨 해안을 향해 함포사격을 가했다.
 
▲1873년 4둴 6일 쯔르먼 해안(Pantai Ceureumen)에 모습을 드러낸
시타델 판 아트베르펜 호와 다른 네덜란드 전함들
 
아쩨 전쟁의 시작이었다. 1차 아쩨 전쟁은 1873~1874년 기간 중 불타올랐다. 아쩨 측은 마흐무드 샤 술탄(Sultan Machmud Syah. 아쪠 술탄국 제34대 술탄. 재위 1870~1874)이 총사령관을 겸해 군대를 통솔했고 네덜란드군은 요한 하르만 루돌프 쾰러(Johan Harmen Rudolf Köhler) 장군이 사령관을 맡았다.
 
▲마흐무드 샤 아쩨 술탄(왼쪽)과 네덜란드군은 요한 하르만 루돌프 쾰러 사령관(오른쪽)

네덜란드 측은 3,198명의 병력을 투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아래 1873년 4월 8일 쯔르먼 해안에 상륙해 파죽지세로 짓쳐 들어가 곧바로 라야 바이투라흐만 사원(Masjid Raya Baiturrahman)을 불태웠지만 쾰러 사령관은 그 과정에서 심장에 관통상을 입고 전사했다. 아쩨 술탄국은 1차 전쟁에서 전반적으로 방어에 성공했고 쭛냐디엔의 남편 이브라힘 람응아도 최전선에서 네덜란드군과 싸웠다.

여담이지만 쾰러 장군의 시신은 코닝 드 네덜란덴(Koning der Nederlanden) 증기선에 실려 싱가포르를 거쳐 바타비아로 운구되어 따나아방 묘지에서 대대적인 군대식 장례식이 치러졌다. 하지만 1976년 자카르타 주정부가 이 묘지를 허물자 네덜란드 대사관이 2년간 항의한 끝에 당시 아쩨 주지사 압둘라 무자키르 왈라드(Adbullah Muzakir Walad)의 동의를 얻어 반다아쩨 소재 커르코프(Kerkhoff) 묘지로 이장되었다.

이후 1874~1880년 기간 동안 쾰러 사령관 후임인 얀 판 슈비텐(Jan van Swieten) 장군이 지휘권을 잡았다. 한편 쭛냐디엔의 고향인 무킴 제6지구가 1873년 네덜란드군에게 점령당하고 술탄의 끄라톤 왕궁도 1874년 함락되었다.

쭛냐디엔은 아기와 다른 부인들과 함께 1875년 12월 24일 피난길에 올랐고 남편은 무킴 제6지구를 되찾기 위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브라힘 람응아는 1878년 7월 29일 글레 따룸(Gle Tarum)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쭛냐디엔은 남편의 전사소식에 격분하여 네덜란드를 멸망시키겠다고 신에게 맹세했다.

전황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아쩨의 투쟁영웅 뜨꾸 우마르(Teuku Umar)가 쭛냐디엔을 찾아와 청혼했다. 쭛냐디엔은 처음엔 거절했지만 나중에 전장에 출정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후 1880년 뜨꾸 우마르와 재혼했다.
 
▲동료들과 함께. 앞줄 가운데가 뜨꾸 우마르 (Teuku Umar)
 
▲쭛냐디엔과 뜨꾸 우마르는 실물보다 강인함이 강조된 이 초상화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의 결혼은 네덜란드 이교도들과 싸우는 아쩨 저항군의 사기를 크게 북돋았다. 전투는 게랄라전 위주가 되었고 만족투쟁의 요소에 종교적 저항의 색채를 더했다.

1875년경부터 뜨꾸 우마르는 네덜란드과 관계를 대결일변도가 아닌 유화적 해결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 점차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93년 9월 뜨꾸 우마르는 네덜란드의 뒤통수를 칠 작전을 세우고 250명의 병사들과 함께 꾸따라야(Kutaraja – 현재의 반다아쩨)로 들어가 네덜란드에게 투항했다.

네덜란드는 강력하고도 위험한 적이 항복해 결과적으로 네덜란드군의 입지를 강화하자 이에 고무되어 뜨꾸 우마르에게 '뚜꾸 우마르 요한 빨라완(Teuku Umar Johan Pahlawan)'이라는 영웅칭호와 함께 네덜란드군 사령관에 임명하고 전권을 허락했다. 뜨꾸 우마르는 네덜란드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해 그 계획을 비밀로 하고 몸을 낮춘 것이지만 아쩨 민중들은 그를 반역자라고 낙인 찍고 비난을 퍼부었다. 쭛냐디엔 역시 민중에게 돌아오라고 남편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뜨꾸 우마르는 정말 반역자가 된 듯 네덜란드와 더욱 돈독한 관계를 쌓아갔다. 그는 네덜란드군의 전술을 공부하면서 그가 지휘하는 부대의 병력 중 네달란드인 상당수를 로컬 병사들로 대체했다. 이제 병력 대부분을 자기 사람으로 채운 뜨꾸 우마르는 네덜란드군 사령부를 기만할 목적으로 자신이 군대를 이끌어 아쩨 저항군 기지를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 후 뜨꾸 우마르는 네덜란드군의 허락을 얻어 쭛냐디엔과 함께 각종 무기와 탄약으로 중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병력과 물자가 그대로 아쩨 저항군 손에 넘어가게 된 것이다. 네달란드로서 이는 ‘뜨꾸 우마르의 반역’(Het verraad van Teukoe Oemar)이라고 불리는 충격적인 사건이 되었다.

격분한 네덜란드군은 눈에 불을 켜고 뜨꾸 우마르와 쭛냐디엔을 잡기 위해 대대적인 작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제 아쩨 저항군의 게릴라들은 네덜란드군의 최신 무기들로 무장한 상태였다. 아쩨 저항군이 네덜란드군을 공격하는 사건이 빈번히 벌어지는 사이 뜨꾸 우마르에게 보기 좋게 속아넘어간 판 슈비텐 장군이 경질되고 만다.

그의 후임은 요하네스 루도피시우스 야코부스 후버투스 펠(Johannes Ludovicius Jakobus Hubertus Pel) 장군이었지만 네덜란드군이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는 등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상황에서 콜레라까지 창궐하고 있어 이를 수습하던 중 얼마 지나지 않아 동맥파열로 사망한다. (역사가 무하마드 사이드는 펠이 사실은 전사했지만 네덜란드군 사기를 고려해 병사한 것으로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네덜란드군은 이후에도 계속 사령관을 몇 차례 더 교체하는데 그 사이 디엔과 우마르는 네덜란드군을 몰아쳐 반다아쩨(꾸타라야), 믈라보(예전 뜨꾸 우마르의 본부) 등을 공격했다.

네덜란드는 ‘마르쇼세이(Maréchaussée = mashal)’라 불리는 부대를 아쩨에 파견했다. 그들의 전투방식은 매우 야만적이어서 아쩨 저항군으로서는 매우 까다로운 적수였다. 그외에도 ‘드마르소스’(De Marsose)라는 부대는 중국인-암본인으로 이루어진 부대로 훗날 19세기 네덜란드 동인도군 KNIL의 암본 엘리트부대를 떠올리게 하는데 지나는 곳마다 풀 한 포기 남기지 않을 정도로 잔혹한 전투방식을 보였다. 그들의 만행이 지나쳐 네덜란드군이 아쩨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나중에 드마르소스 부대를 해산할 정도였다

물론 부대를 해산해도 다른 곳으로 전출된 그 부대원들은 예전 부대에서 한 짓과 똑 같은 행동을 한다. 그러니 식민정부가 식민지 주민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제스쳐일 뿐이다.

이와 같이 네덜란드 측은 군인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려 하지 않았고 아쩨인들 사이에서도 두려움이 큰 상황이어서 후임 사령관들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계속 교체되었다.
 
▲네덜란드군 후임 사령관들: 왼쪽부터 얀 판 슈피텐 장군, 요하네스 루도피시우스 야코부스 후버투스 펠 장군, 요하네스 베디틱투스 판 훗츠 장군

저항의 추이와 파국
그 중 요하네스 베디틱투스 판 훗츠 장군(Jenderal Joannes Benedictus van Heutsz)은 이러한 두려움을 역이용해 아쩨인들을 저항군 부대에 첩자로 활용했다. 그 결과 뜨꾸 우마르가 1899년 2월 11일 믈라보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네덜란드군이 미리 알게 되었다. 결국 뜨꾸 우마르는 전투 중 피격되어 전사하고 만다. 중부 자카르타에는 그를 기념한 도로 Jl. Teuku Umar가 멘뗑 지역, 베트남 대사관 앞을 지나고 있다.

쭛냐디엔은 뜨꾸 우마르를 애도하며 통곡했고 이제 남편을 대신 해 쭛냐디엔이 믈라보 지역에서 소수의 병력을 지휘하여 네덜란드군과 맞서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네덜란드군이 아쩨 지역에서의 전투에 익숙해지면서 쭛냐디엔의 저항도 1901년을 넘기지 못했다. 더욱이 그녀에게도 노년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점점 시력을 잃기 시작했고 류마티스도 찾아왔다. 더욱이 군량을 구하기 힘들어지면서 병력규모도 점점 더 줄어들었다. 그런 그의 부대 상황을 다른 저항군 부대들도 안타까워했다.

그녀의 부하 중 빵라옷(Pang Laot)이 쭛냐디엔의 위치를 네덜란드군에 밀고함에 따라 브똥 르 사그(Beutong Le Sageu)의 본진이 네덜란드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디엔은 렌쫑을 뽑아들고 네덜란드군에 맞섰으나 결국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러나 거기서 빠져나간 쭛 감방(Cut Gambang)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네덜란드군에게 나포된 쭛냐디엔(가운데)과 일행.
 
쭛냐디엔은 반다아체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시력과 류마티스는 점차 회복되었지만 쭛냐디엔은 결국 서부 자바의 수머당(Sumedang) 지역으로 유배되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아쩨 저항운동의 구심점이었고 그녀도 체포되지 않은 저항군 인사들과 끊임없이 접촉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쩨의 정치범으로서 수머당에 보내졌고 현지 군수 수리앗마야(Suriaatmaja)의 관심과 연민을 받았다. 유배지 수용소의 남자 수형자들도 쭛냐디엔에게 존경을 표했으나 네덜란드군은 그녀의 신분을 드러내는 것을 철저히 금했다. 같은 수용소에 있던 일리야스라는 울라마가 쭛냐디엔이 이슬람에도 학식이 높은 것을 알고 그녀를 ‘뻐르부 부인(ibu perbu)’라고 불렀다.

그녀는 1908년 11월 6일 유배지에서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 아쩨 주지사 알리 하산(Ali Hasan)의 요청으로 그녀의 무덤이 1959년 발견되었다. 그녀는 1964년 5월 2일 수카르노 대통령에 의해 인도네시아 국가영웅으로 지정되었다.
 
▲수머당 소재 구눙 뿌유(Gunung Puyuh)에 있는 쭛냐디엔의 무덤
 
1959년 쭛냐디엔의 무덤을 발견한 것은 네덜란드 측이 보관하고 있던 문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녀의 무덤은 1987년 개축되었고 묘지입구에는 당시 아쩨 주지사 이브라힘 하산이 1987년 12월 7일 서명한 기초석이 놓여있다.

수머당에 사는 아쩨인들은 회합을 가질 때마다 쭛냐디엔의 묘소를 참배하는데 그 행렬이 2킬로미터씩 이어지기도 한다.

영화 <쭛냐디엔(Tjoet Nja' Dhien)>
그녀의 생애는 <쭛냐디엔(Tjoet Nja' Dhien )> 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에로스 자롯(Eros Djarot)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크리스틴 하킴(Christine Hakim)이 쭛냐디엔 역을, 삐엣 부르나마(Piet Burnama)가 빵라옷 역, 슬라멧 라하르조(Slamet Rahardjo)가 뜨꾸 우마르 역을 맡았고 루디 워워르(Rudy Wowor)가 후원했다.

이 영화는 그해 인도네시아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여러 부문을 휩쓸었고 인도네시아 영화로서는 1989년 깐느 국제영화제에 처음 출품된 작품이기도 했다.
 
▲<쭛냐디엔> 포스터와 주인공 역의 크리스틴 하킴

그녀의 이름을 기려
 
▲인도네시아 해군 전함 KRI Cut Nyak Dhien.
 
▲쭛냐디엔 사원 (자카르타 소재)
 
▲쭛냐디엔 생가 박물관 (반다아쩨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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