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띠 꾸말라 작가의 『시가렛 걸』 한국 출판에 붙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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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띠 꾸말라 작가의 『시가렛 걸』 한국 출판에 붙여
배동선
▲『시가렛 걸』 표지 (사진=배동선 촬영)
라띠 꾸말라 작가의 2012년 작 『시가렛 걸(원제: Gadis Kretek)』이 2026년 2월 한국에서 출판되어 서점에 깔렸다. 한세예스24문화재단이 기획한 동남아문학총서의 일곱 번째 책, 인도네시아 문학으로는 함까의 『판데르베익호의 침몰(원제: Tenggerlamnya Kapal van der Wijck)』이 2022년 1월 출판된 후 4년만의 두 번째 작품이다.
한 문화권, 언어권의 문학이 다른 지역에 출판되기 위해서는 출판권 확보의 줄다리기가 끝난 후 상당기간 번역가의 손에 머물다가 출판사에 넘어간 후 교정교역과 책 디자인, 출판 등의 후작업의 과정을 거친 후 비로소 책이 되어 서점 서가에 오르게 된다.
『시가렛 걸』 번역출판이 결정된 것은 2024년 초, 그리고 번역 계약은 2025년 초에 맺어져 7월에 번역 원고가 출판사에 전달되었고 그로부터 반년 후 비로소 책이 되어 나왔다. 책을 번역해 출판한다는 것은 확실히 아기를 낳는 것보다 더 지난하고 많은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하지만 국제무대 정상회담의 위태로운 언어의 외줄타기로 아슬아슬 균형을 잡으면서도 절대 대놓고 앞에 나서지 않는 통역사들처럼 번역가 역시 태생이 조연이라 저자 다음으로 책과 본질적으로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지만 일단 번역된 책이 서점에 깔리면 무대 뒤로 숨어 모든 조명을 저자와 출판사에게 모아 주는 것이 번역가의 적절한 처신이자 상도의다. 재단이 오는 3월 라띠 꾸말라 작가를 한국에 초청해 진행하는 『시가렛 걸』 출판 기념회에, 그래서 번역가는 참석하지 않는다.
그래도 인도네시아 문학이 또 한권의 책을 통해 한국에 소개되는 이 시점에 번역가로서의 소회를 우리 교민들에게만 살짝 나누고 싶다.
난 이른바 인도네시아 근대소설 전문 번역가가 되고 싶었다. 약 160년 전에 출간된 『막스 하벨라르』와 대략 90년 전에 나온 『판데르베익호의 침몰』을 번역했으니 그 기조로 계속 나가고 싶어 다음 번역할 책으로 인도네시아 최초의 현대소설이라 말하는 100년 전의 『시띠 누르바야(Sitti Nurbaya)』를 마음에 두고 복수의 인니어 판본과 영문판본을 모아놓고 있었다. 그런데 작가가 아직 생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시가렛 걸』로 전격 결정되었다. 근대소설 전문 번역사는 무슨. 냉큼 하기로 했다.
여류 작가와 여성 감독
『시가렛 걸』은 2023년 11월 동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5부작 시리즈로 만들어져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은 바 있다. 그리고 보면 ‘맬맬’이란 활동명을 쓰는 일러스트 전문가가 그린 이 책의 표지의 의상과 머리 모양에서 왠지 넷플릭스 드라마의 분위기가 엿보였다.
▲넷플릭스 <시가렛걸> 포스터 (출처=IMDb)
『시가렛 걸』을 번역한 후 이 넷플릭스 드라마를 다시 보며 글로 되어 있는 세상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그리고 시청자들의 직관적인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많은 각색이 들어가고 때로는 이야기를 생략하거나 새로 만들어내기도 했다는 것을 알았다.
원작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이 드라마를 보며 감동을 받았던 때와 달리 드라마를 자꾸 원작과 비교하게 되고 곳곳에서 느껴지는 각색자, 영화감독의 손길이 과연 적절한 것이었는지, 나라면 저 부분을 어떻게 표현했을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영화평론가들이 비판적이고 냉소적이 되기 쉬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라면 어떤 영화를 볼 때 원작 소설이나 전편을 보지 않고 그 영화 자체에 집중해 즐길 것을 권한다. 사전 지식과 기대가 선입견을 낳을 뿐이고 결국은 실망과 혹평으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시가렛 걸』을 주도적인 여성이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페미니스트적 관점의 작품이라는 일각의 평은 책보다는 넷플릭스 드라마의 감상평에 가깝다. 책의 내용은 식민지시대와 독립전쟁 시기에 여주인공 정야의 태어나기 오래전 그의 아버지 이드루스 무리아와 그의 평생의 대적 수자가드가 인생과 담배사업을 걸고 맞서는 대결로 전반부가 점철되고 후반부는 이드루스가 쟁취한 여인 루마이사의 딸 정야의 이야기가 1965년 9.30 쿠데타와 인도네시아 대학살 시기 등 실제 역사속의 격변기를 거치며 현대로 진행된다.
그 이야기는 긴장감 넘치고 떄로는 참혹하지만 작가 라띠 꾸말라는 대결과 파국보다는 우연 속에 필연적으로 엮여가는 사람들 사이의 인연과 청춘들의 시리도록 절절한 사랑을 따뜻한 이야기로 풀어냈다.
넷플릭스의 <시가렛 걸>이 이 책의 후반부의 이야기만을 담았고 각색으로 인해 스토리 자체가 많이 바뀌어 사실상 원작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지만, 책은 책대로,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대단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아름다움 그것은 상처』와 『호랑이남자』로 한국에도 잘 알려졌고 맨부커상 후보에도 올랐던 유명 소설가 에까 꾸르니아완의 아내이기도 한 라띠 꾸말라의 이 책과 인도네시아 영화계 거장 가린 누그로호 감독의 고명딸로 담담한 페미니스트 세계관의 영화들을 독특한 분위기로 만들어 온 까밀라 안디니 감독은 각각 부각시키려 한 부분이 조금 달랐던 것 갔다. 책과 드라마를 오가며 그들의 탄탄한 역량과 세계를 보는 시선을 살짝 엿볼 수 있다.
▲라띠 꾸말라 작가(왼쪽)과 까밀라 안디니 감독 (출처=인스타그램 @gadiskretek과
@moviezy.id)
주술의 그림자
인도네시아 소설 속에서 무속과 주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인도네시아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무슬림이지만 이슬람의 수면 밑에 펼쳐지는 무궁무진한 무속의 세계를 인도네시아인들이라면 상당부분 공유하며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10여년 전 광산사업을 하던 필자의 오랜 친구가 뻴렛주술(ilmu pelet)에 당해 거의 파산지경까지 간 적이 있다. 뻴렛주술이란 상대방의 마음에 나를 사랑하도록 만드는 마음을 억지로 심는 것이다. 그게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것이 그 주술의 목적이 상대방을 내게 종속시켜 내가 원하는 것을 뜯어내거나 종국에는 파멸시키겠다는 악의를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의학은 이를 최면, 암시, 향정신성 약물 등의 영향이라 하지만 현지인들은 이 주술의 배후에 강력하면서도 음습한 어떤 존재의 힘이 작용한다고 믿는다. 문제의 그 친구는 실제로 큰 피해를 당했고, 그 후유증에서 회복하는 데에 6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 친구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자발적으로 무속과 주술의 세계를 깊이 파고들어 공부하면서 다행히 나 스스로 두꾼(dukun-무당)이 되진 않았지만 그때 본의 아니게 세세히 알게 된 무속 지식은, 이후 인도네시아의 생활 곳곳에서 전엔 몰랐던 주술 흔적들을 알아볼 수 있게 했고 최근엔 영화 속에 나타나는 주술 코드를 읽고 영화평을 쓸 수도 있게 되었다. 『시가렛 걸』에도 묘사된 주술 이야기에서 그 뒤에 살짝 숨겨진 뒷이야기가 읽힌다.
넷플릭스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이드루스 무리아는 갓 태어난 딸의 태반을 넣은 항아리를 도난당한다. 태반을 지키는 것도, 그것을 훔치는 것도 지극히 주술적인 행동. 그리고 이제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닥칠 액운을 막기 위해 신기가 있는 산파가 필요한 재료들을 모아 오랜 시간을 들여 방어 주술을 시전한다. 상대방의 소중한 것을 훔친다는 것은 절도 자체로 끝나는 게 아니다. 방어 주술에도 재료들이 필요하듯 아이의 운, 가문의 운명이 서려 있을 태반을 어떤 이가 훔쳤다는 것은 그것을 핵심 재료로 사용해 저주술을 쓸 것임을 시사한다.
살(煞)을 날리는 주술이란 화살(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 시위를 떠난 살은 공중을 날아 반드시 어딘가에 도달하기 마련이고 날카로운 촉이 달렸으니 표적이 된 사람이나 물건이 상하기 마련. 주술을 건 사람만이 그 주술을 취소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건 궁수가 자기가 이미 쏜 화살을 황급히 달려가 막으려는 것만큼 사실은 이미 주워담기 힘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책 속에서는 그 사건의 이후 경과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지만 이 책의 후반부는 사실상 그때 온갖 악의를 담아 날린 살이 결국 그 과녁에 도달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 살을 어떻게 극복하고 어떻게 모든 것을 회복해가느냐의 서사다.
로맨스 드라마일 것만 같은 이 소설은 수면 밑에서 몇 겹의 주술이 켜켜이 쌓이며 스토리의 변곡점을 만든다. 그걸 얼마나 의도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런 산똇 저주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풀어간 챕터 몇 개를 보다 유려한 이야기 흐름을 위해, 그리고 장르를 지키기 위해 작가가 몇 번 쓰다 지웠을 거라고 감히 추측해 본다.
인도네시아 문학은 감춰진 보고
지금까지 인도네시아에서 문호로 통하는 쁘라무댜 아난따 뚜르의 일부 작품을 비롯해 에까 꾸르니아완, 아유 우따미, 함까, 안드레아 히라따 같은 이들의 작품이 일부 번역되어 한국에 출판되었지만 한국 독자들의 인도네시아 문학에 대한 수요는 사실상 제로에 가까워 이 책들은 그리 많이 팔리지 않았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의 서점을 가득 채운 내로라 하는 현지 작가들의 작품들은 보석 같은 것들이 많다. 개인적으로 난 차기 번역작으로 수하르토 정권 독재가 극에 달했던 마지막 10년 동안 벌어진 활동가들의 사망, 실종사건을 다룬 레일라 S. 추도리의 『바다 이야기(Laut Bercerita)』를 마음에 두고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 디 레스타리의 『종이배(Perahu Kertas)』도 유력한 후보로 생각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는 이외에도 도니 디르간토로, 아흐맛 푸아디, 뜨레 리예, 극작가를 겸한 삐디 바익 등 수많은 작가들의 훌륭한 작품들이 넘친다. 하지만 그 작품들의 아우라도, 영미문학에 익숙한 한국 독자들의 관심도, 적도를 좀처럼 넘지 못한다.
더욱이 인도네시아어를 곧바로 한국어로 번역한 것보다 영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아무리 훌륭한 번역가가 붙어도 한 다리 건널 때마다 어딘가의 맥락과 뉘앙스가 누락되거나 소멸하는 것이 ‘문학번역’이란 작업인데 말이다.
지금까지 한국 도서들은 소설과 자기계발서를 중심으로 400편 이상 인도네시아 시장에 번역본이 출판되었지만 인도네시아 문학 도서의 한국 출판은 20편도 채 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던 『막스 하벨라르』는 심지어 인도네시아 문학이 아니라 네덜란드 문학작품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에 라띠 꾸말라 작가의 『시가렛 걸』이 조금은 2023년 넷플릭스 드리마의 후광의 덕을 받아서라도 한국 시장에서 선전해 인도네시아 문학의 한국 진출을 위한 물꼬를 터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100년 전의 작가들에겐 역부족이었을지 몰라도 1980년생 매력적인 젊은 작가 라띠 꾸말라로선 충분히 가능하지 아닐까? /2026. 2. 20
*배동선 작가
- 2018년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
- 2019년 소설 '막스 하벨라르' 공동 번역
- 2022년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번역
- 2026년 '시가렛 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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