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기고란 영화 <소롭(SOROP)> 관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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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롭(SOROP)> 관람후기
배동선
소롭(sorop)이란 단어의 뜻을 찾아보면 수룹(surup)에서
파생된 단어로 저녁 땅거미가 지는 시간을 의미한다고 나온다. 그리고 빙의라는 의미의 끄수루빤(Kesurupan)에도 같은 어간이 사용되는 것을 보면 어둠, 빙의
등과 관련있는 단어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는 또 다른 의미가 포함되는데 그것은 뿌아사 소롭(puasa sorop)이라는
주술적 금식법을 말한다. 대개의 뿌아사, 즉 금식이란 뭘
안먹는다는 의미보다 무엇을 선별적으로 먹느냐에 방점이 찍히는데 뿌아사 소롭은 묘지의 흙을 먹는 것이다. 묘지의
흙을 먹으며 거기 스며 있는 혼령들의 정기를 함께 먹어 얻게 되는 주술적인 힘으로 원한을 품은 상대를 40일
안에 죽이는 것이 뿌아사 소롭을 하는 목적. 하지만 40일을
넘겨 대상이 모두 죽지 않으면 원혼들의 저주가 시전자에게 돌아온다.
이 영화는 <무용수마을의 대학생봉사활동(KKN di
Desa Penari)>와 <세우디노(Sewu
Dino)>의 원작자 심플만(@simpleman)의 미완성 트위터 스리드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세우디노>도 1000일 안에 상대방 가문을 멸절시키는 저주였다. 그러니 소롭도
대략 같은 기조인 셈이다.
MD 픽쳐스가 크게 히트한 앞서 두 편의 영화에 이어 또 다시 야심차게 내놓은 것이지만 이번엔 겨우
60만 명을 넘기며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배우와 감독
이 영화는 하나 말라산(Hana Malasan)과 야사민 자셈(Yasamin Jasem)이 자매로 등장하는 여주 투톱의 영화다.
▲동생 이스티 역의 야사민 자셈(왼쪽)과 언니 하니프 역의 하니 말라산
하니 말라산은 조코 안와르 감독의 최근작 <가시언덕 포위작전(Pengepungan di Bukit Duri)>의 여주 출신이고 순악질 여사 눈쌉에 눈꼬리가 조금 처져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야사민 자셈은 <칸잡(Khanzab)>,
<망꾸지워 2(Mangkujiwo 2)>, <혈통(Temurun)>, <름바융(Lembayung)> 등
여러 호러영화의 주연으로 기용되며 차세대 호러퀸 자리를 예약한 여배우. 그런데 심플만의 원작을 사용하고
이런 여배우들을 기용하고도 영화가 그다지 흥행하지 못한 것은 역시 시나리오와 연출의 문제인 것 같다.
심플만 원작이라는 건 그가 시나리오를 썼다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스토리의 뼈대를 제공했다는 의미일 뿐이며 실제로 시나리오를 쓴 사람은
우삐(Upi) 감독이다. 영화판에서는 우삐로 통하는 여감독은
우삐 아피안토(Upi Avianto)라고도 불리지만 사르트리 다니아 술피아티(Sartri Dania Sulfiati)라는 여성스러운 본명을 가지고 있다.
1972년생으로 2004년 감독으로 데뷔한 그녀는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데뷔가 그보다 1년 더 빠르다. 그녀의 커리어 중 알만한 유명작으로는 부미랑잇 로컬
수퍼히어로 유니버스의 두 번쨰 영화 <스리아시(Sri
Asih)>, <내 멍청한 상사(My Stupid Boss)> 1, 2편, 한국영화 <수상한 그녀>의
리메이크 <스위트 20(Sweet 20)> 등이다. 대부분 드라마와 코미디들인데 전작 호러영화로는 <이교도: 사탄의 조력자(Kafir: Bersekutu dengan Setan)>에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로 참여한 것이 전부다.
▲우삐 감독
즉, 긴 필모그래피에도 불구하고 호러영화에는 그리 경험이 많지 않은 것이 독이 되었다. 그러니 무서운 영화보다는 깜짝깜짝 놀래키는 영화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소롭 저주 자체는 꽤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그걸 풀어나가는 과정이 영 석연치 않았다. 스스로를
파괴하면서까지 저주를 건 사람의 의지와 의도도 알 수가 없고 그 저주를 풀어내는 과정 역시 억지스럽다. 영화
중반에 드라쿨라 영화에나 나올 듯한 나무 말뚝이 나오는 장면에선 이걸 계속 봐야 하나 살짝 고민되기도 했다. 재미있는
소재를 납득할 만한 스토리로 풀어내지 못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두 여주의 큰아버지 뻘인 빠데 코이르(pakde Khoir) 역을 에기 페들리 배우가 연기했다. 포스터 속의 그 인물이다.
그는 좁은 어깨와 진지한 마스크로 유명한데 1956년생인 그가 1981년부터 조연으로 출연한 영화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그중 조코 안와르 감독의 <사탄의 숭배자> 1, 2편에서 중후한 기자 역을 연기했다. 하지만 많은 영화에서 그가 등장하는 부분을 보면 중후한 마스크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가볍고 연극적인 억지스러움이 느껴진다. 죽은 교수가 강의실에서 야간수업을 하는 영화 <유령교수>에서도 타이틀 배역으로 나와서도 그는 억지스러웠다.
▲에기 피들리 주연의 <유령 교수>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 계속 웃통을 벗고 나오는 그의 모습이 좀 부담스러웠고 우삐 감독은 공포 분위기를 만든다며 그를 창밖을 이쪽으로
쓱, 저쪽으로 쓱 지나가게 만드는 판에 박힌 연출, 그리고
그게 끝없이 반복되는 시퀀스가 공포보다는 짜증을 불러 일으켰다.
이제 공포영화에서 좀 나오지 않았으면 또는 다른 방식으로 연출되었으면 하는 장면들도 이 영화에서 별 고민 없이 다시 시전되었다. 예를 들면 여주나 출연자들이 빙의되어 눈을 까뒤집는 모습, 입에서
오물이나 흙, 구더기 같은 것은 토해내는 CG, 빙의된 여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 귀신의 염력으로 사람이 이리저리 날아가 떨어지는 것 등.
호러영화가 익숙하지 않은 우삐 감독에게는 새로운 경험이겠지만 호러영화 고인물들에게는 너무 식상하기 짝이 없는 장면들이다.
영화 속 문화와 금기
이 영화엔 숄랏을 막 마치고 여성 기도복인 무끄나(Mukena)를 벗는 모습, 히잡을 쓴 아주머니, 이슬람식 염을 한 시신 등 이슬람적인 배경들이
비치지만 실제로 기도하는 모습이나 기도소리, 아잔, 우스탓
같은 성직자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슬아슬하게 이슬람 호러와 자바 호러 사이의 외줄타기를 하는 듯하다.
오래 전 부모를 저주로 잃은 두 자매가 대도시 수라바야에 나가 살다가 자신의 부모 소유의 집에 살던 큰아버지 코이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 옛집에서 겪게 되는 기괴한 사건들이 영화 속에서 전개된다.
예습이 필요한 특징적인 문화는 앞서 언급한 자바의 뿌아사, 즉 금식인데 경건함과 빈민구제를
추구하는 이슬람의 금식과 달리 자바식 금식은 어떤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주술적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두꾼들 즉 인도네시아의 무당들도 즐겨 금식을 하며 영화 속에서 저주를 걸려는 측 역시 특정한 음식 즉 묘지의 흙만 먹는 특별한 금식을 수행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딱 거기까지다.
그래서 더욱 더 우삐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 때 사용한 것은 특별한 안목이나 경륜이 아니라 ‘관성’이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치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란 슬로건이 뜻하는 것처럼 호러영화는 역시 만들던 사람이 만들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했고 곳곳에 이른바 점프스케어 장면들이 삽입되어 있어 뇌를 빼고 공포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크게 실망하지 않고 이 영화를 볼 수 있을 것 같다.(2025. 5. 6.)
*배동선 작가
- 2018년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
- 2019년 소설 '막스 하벨라르' 공동 번역
- 2022년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번역
- 다음글<가시언덕 포위작전> 관람 후기 2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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