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기고란 탈식민지 시대 신호탄을 쏘아 올린 문학의 힘! -「막스 하벨라르」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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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지 시대 신호탄을 쏘아 올린 문학의 힘!
「막스 하벨라르」를 읽고
유진숙 (前 한-아세안센터 아세안홀 관장)
▲「막스 하벨라르」 한국어판 표지, 2019년 출판
시와진실, 2019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2020년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물타뚤리 지음/ 양승윤 배동선 옮김
'커피 중개상 드로흐스또벌은 일어난 적도 없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을 꾸며내는 소설이나 희곡 같은 가상 이야기를 경멸하면서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약속한다'
- 「막스 하벨라르」 제1장 p. 25
식민시대 원주민 착취에 대한 진실을 告하다
「막스 하벨라르」의 첫 문장은 네덜란드인 커피 중개상 드로흐스또벌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장사를 위한 계약서만 써 보았고, 소설이란 것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으며, 읽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고, 진실과 상식만을 신봉한다는 그가 이 소설이 결코 꾸며낸 가상 이야기가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에 대해 독자들에게 미리 일러두기를 단단히 하는 것이다. 그만큼 소설 「막스 하벨라르」는 네덜란드인이나 쟈바인 양쪽 모두에게 감추고 싶은 수치스러운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진실을 외치느라 극적인 혐오감을 쥐어짜는 거친 이야기로 독자를 혹사 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진실은 겅중겅중 뛰어넘어 가도록 놓아두고, 해학 가득한 유모로 살살 달래며 읽는 이에게 대화하듯 말을 걸어온다. 독자는 인간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다가 이내 허풍스런 풍자에 웃기도 하다가 점점 몰아치는 감동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소설의 절정에 이르러, 독자는 마침내 절규하는 양심과 맞닥뜨리고 비극적 진실을 고하는 주인공과 한마음이 되는 것이다.
「막스 하벨라르」는 1602년부터 약 340여 년간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통치했던 식민지배 역사에서, 열대작물 강제재배 정책으로 원주민 착취와 수탈이 극심했던 180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한다. 이 책은 인도네시아가 겪었던 네덜란드 식민지배에 대한 기록이며, 인류 역사의 보편적 주제인 억압과 탄압, 즉 인권에 대한 고발문학이자 정치소설이다.
축복받은 땅에서 벌어진 수탈의 비극을 고발한 실화소설
책 제목이자 주인공 막스 하벨라르는 네덜란드 식민 지배층 행정가로서 르박주 부주지사로 부임한다. 그런데 낙후된 르박주를 정의롭고 풍요로운 마을로 발전시키려는 큰 꿈을 품은 젊은 관리가 목도한 것은 쟈바의 토착민들이 광활하고 비옥한 축복의 땅에서 식량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는 현장이었다.
커피·설탕·담배와 각종 향신 료 등 환금작물 생산을 위한 대단위 커피농장이나 사탕수수밭을 경작하느라 정작 식량 생산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확대와 원주민 착취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바타비아 총독부(네덜란드 정부), 그리고 오히려 수탈의 앞잡이 노릇으로 자국민을 굶주림과 죽음으로 몰아넣는 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 토착 기득권 세력의 횡포에 대항하여 막스 하벨라르는 원주민의 편에 서서 목숨을 걸고 불의를 폭로하는 투사가 된다.
자신의 조국, 문명국 네덜란드가 식민지배지에서 저지른 야만적 만행에 맞서 고독한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Max Havelaar」 네덜란드어판 표지, 1860 초판
「막스 하벨라르」에는 식민지 수탈의 현장을 낱낱이 폭로하는 한없이 거칠고 척박한 이야기들 사이사이에 아름다운 시와 노래, 문학과 예술적 요소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사이쟈와 아딘다'의 이루지 못한 비극적 사랑 이야기는 소설 속에 또 하나의 단편 문학작품으로 학대받는 원주민의 깊은 슬픔을 독백형식으로 담담하게 전한다. 빠랑꾸쟝에 살던 사이쟈와 정혼자 아딘다는 영주의 횡포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다. 고향을 쫓기듯 떠났던 사이쟈는 믈라띠꽃 향기 가득한 마을로 몇 년 만에 다시 돌아오지만, 람뿡에서 온갖 고초를 당해 죽은 아딘다에 이어 사이쟈까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그들의 죽음 얼마 후, 바타비아에서는 '반역의 땅 람뿡'이 네덜란드 깃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는 낭보에 축제가 벌어지고, 이에 국왕 폐하는 원주민 봉기를 진압한 이들에게 작위와 훈장을 하사하고, 수많은 교회에서는 감사 기도가 울려 퍼진다. 막스 하벨라르는 네덜란드 시인 헨드릭 톨렌스 시구로 외친다. “하느님! 이 통절함을 동정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제발 그날의 제물만큼은 받아들이지 마옵소서!”
막스 하벨라르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는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이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려와도 양철북 같은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는 올곧은 사람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막스 하벨라르는 자신의 조국, 문명국 네덜란드가 식민지배지에서 저지른 야만적 만행에 맞서 고독한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전통문학을 뛰어넘는 독보적 구성의 전기소설
「막스 하벨라르」는 물타뚤리, '엄청난 고통을 겪은 자'라는 필명으로 1860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주인공 막스 하벨라르는 지은이 물타뚤리 자신이고, 또한 실존 인물로서 에두아르트 다우어스 데커르(1820-1887) 이다.
그는 1839년부터 수마트라, 술라웨시, 암본에서 총독부 관리로 일하다가 동인도 바땀주(현 반뜬주) 주지사로 실제 복무(1856.1월~4월)한 네덜란드 관리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인 제39장에서 막스 하벨라르가 바로 자신이라고 밝히며 지은이 물타뚤리가 직접 펜을 들고 등장한다. 이같이 전통문학의 구성과는 거리가 있는 독특한 형식의 이 소설은 '인슐린더 원주민들이 학대받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걸고 세상에 외치는 그의 절규인 것이다.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악과 죄악, 범죄가 있다면 그것은 양심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가짜만을 쫓는 양심 없는 사이비들의 거드름에 가차 없이 일격을 날리고, '진실은 바로 이것이다'라고 외치는 물타뚤리에게서 순교자의 모습이 보인다.
「막스 하벨라르」를 읽는 동안 일제통치시대 일본인들에 의한 식민지 수탈의 역사와 일본 국왕의 작위와 훈장에 혈안이 되었던 우리의 토착 기득권 세력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에, 한국인으로서 아물지 않은 상처 부위가 더 아프게 부어오르는 감정에 자주 휩싸였다.
탈식민지 시대 신호탄, 네덜란드어로 쓰인 최고의 소설
「막스 하벨라르」는 소설이라는 허구 세계를 뚫고 실재 세계로 넘어와 역동적인 세찬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막스 하벨라르는 졸고 있는 지식층을 일깨우고, 수탈의 식민정책에서 윤리정책 시대로의 변환을 이끌어 내며, 탈식민지 시대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이다. 또한, 그의 정신을 바탕으로 탄생한 ‘막스 하벨라르’ 커피는 공정무역의 상징이 되었다.
당시 그토록 악랄했던 토착 세력도, 무자비한 바타비아 총독부도 이제 모두 사라져 버렸지만, 오직 물타뚤리만은 삶의 품격과 향기, 인류애, 정의로움으로 진실을 전하며 지금도 살아있는 것이다. 1910년, 「막스 하벨라르」 출판 50주년을 기념해 암스테르담에 그가 태어난 집을 '물타뚤리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2002년, 네덜란드 문학학회는 네덜란드 문학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막스 하벨라르」를 선정했다.
「막스 하벨라르」는 “식민주의를 종식시킨 최고의 책이며, 물타뚤리를 모르는 사람은 정치할 자격이 없다. 인도네시아 역사와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인도네시아 大문호이며 42년간 정치범으로 고난의 세월을 산 故쁘라무댜 아난타 뚜르(1925~2006)의 모습을 오늘날에도 유튜브에서 쉽게 만나 볼 수 있다.
지그문트 포로이트, 알베르트 카뮈, 아나톨 프랑스, 헤르만 헤세, D.H. 로렌스, 토마스 만과 하인리히 만 형제 등 수많은 철학자와 문호들도 이 책에 대한 찬사의 대열에 있다. 퓰리쳐상 수상 작가 제임스 A. 미치너는 「작가는 왜 쓰는가」에서 '소설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가슴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자신이 「막스 하벨라르」를 읽지 않았더라도 작가는 되었겠지만, 지금과 같은 작가는 되지 못했을 것이며, 이 책이 네덜란드어로 쓰인 가장 훌륭한 소설이라고 했다. 「막스 하벨라르」 출판 160년이 지난 지금, 물타뚤리의 바램대로 전 세계 46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그가 외친 진실의 가치는 문학을 통해 계속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에필로그, '물타뚤리의 흔적을 찾아서’
2019년 여름, 직장 동료 자녀의 결혼식 참석차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던 중, 사공경 한인니문화연구원 원장님의 초대를 받았다. 장소는 다름 아닌 자카르타 멘뗑거리에 있는 쿤스트끄링 빨레이스, 물타뚤리를 기리는 특별한 방을 갖춘 복합 문화예술 공간이다. 이 건축물은 네덜란드 식민시대 말엽에 지어져 유럽의 문화예술과 사상을 전파하는 산실 역할을 한 곳이라고 한다. 홀 벽의 한 면 전체를 덮고 있는 대형 유화작품 「쟈바의 몰락」과 물타뚤리 특별실에 대한 원장님의 열정적인 설명을 무지함으로 무덤덤하게 들었던 나의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린다. 사공경 원장님이 집필한 에필로그, '물타뚤리의 흔적을 찾아서'를 읽고 나서야 아! 그때, 물타뚤리에 대해 좀 더 귀 기울여 듣고, 좀 더 자세히 눈에 담아 두었어야 했는데, 후회가 밀려온다.
막스 하벨라르가 복무했던 르박 군청 소재지 랑까스비뚱은 그 시절 권력자들이 어떻게 정의를 짓밟았는지 잘 보여주는 곳이라고 한다. 사이쟈-아딘다 도서관(2017년 개관)과 동상, 물타뚤리 박물관(2018년 개관)과 동상, 그리고 물타뚤리가 살았던 관사의 흔적, 물타뚤리 거리(JL.Multatuli) 외에도 오늘날 인도네시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물타뚤리의 흔적을 에필로그를 통해 만나게 된다. 다시 인도네시아에 가면 그의 발자취를 모두 따라가 보리라. 혁명가 모습이 아니라, 큰 책을 읽는 형상의 물타뚤리 동상 앞에서 ‘지식과 깨달음으로 다시는 식민지배를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외침을 생생하게 듣고 마음에 새기리라. 코로나 펜데믹 시대로 오가는 길이 막히니 더욱 그립다.
▲큰 책을 읽으며 ‘배워야 한다’를 외치고 있는 물타뚤리 동상
(출처: Yovita Siswati)
大學者의 열정으로 재탄생된 한국어 완역판
'세계사 물줄기를 바꾼 고발문학'이라는 부제와 함께 「막스 하벨라르」 한국어 완역판이 2019년 <시와진실>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다. 1800년대 중반 식민시대의 역사성이 담긴 대화체 소설을 입에 딱 붙는 순박한 우리말로 옮긴 양승윤 교수님과 배동선 작가님, 물타뚤리의 흔적을 생생하게 안내한 사공경 원장님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평생 인도네시아를 깊게 사랑하고 폭넓게 연구해온 大學者 양승윤 교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역량과 열정을 불어넣어 탄생시킨 또 하나의 생명력 가득한 문학작품 「막스 하벨라르」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막스 하벨라르」는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2020년 교양부문 세종도서에 선정되어 공공도서관, 전문도서관, 작은도서관 및 초중고 등 전국에 보급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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