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기고란 인니 영화 <모든 것이 멈춘 순간> - 우리를 위로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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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동선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먼저 가버린 남자.
그를 잊지 못해 깊은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여인.
그녀의 곁을 끝내 지키는 다정하고 과묵한 오랜 친구.
그리고 가상현실 속에 부활한 연인.
<모든 것이 멈춘 순간>의 이 시놉시스는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하기만 하다.그런데 난 우선 제목 번역에 동의하기 힘들었다.
올해 쓴 인도네시아 영화보고서에서 원제 <Ketika Berhenti di Sini>를
거의 직역에 가깝게 <여기 멈추면>이라고 번역해
왔다. 영화가 말하려는 바는 어떤 슬픔이 닥치더라도 거기 멈추지 말고 계속 앞을 향해,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어서 이 제목이 나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멈춘 순간>이란 OTT의 제목은 너무 멋을 부려 오히려 영화의 내용과는 좀 멀어지고 말았다는 인상이 강했다.
사실 종종 이런 경우가 생긴다. 특정 인도네시아 영화가 한국에 소개되기 전에 내가 먼저
보고서에 쓸 경우 최선의 번역 제목을 달게 되는데 몇 개월 후 해당 영화에 한국어 번역이 달릴 즈음엔 의미나 뉘앙스가 완전히 다른 제목이 붙곤
했다.
인도네시아의 첫 넷플릭스 오리지널 <The Night Comes for Us>는
줄곧 <우리에게 깃든 밤>으로 번역해 보고서에
썼지만 어느 날 한글번역에는 <밤이 온다>라는
투박한 제목이 달렸고 바딱 사람들의 다사다난한 가족사를 아내가 남편을 죽이려 만드는 맛있는, 그러나
독이 든 음식에 비유해 풀어낸 영화 <Nger-ngeri sedap>은 최대한 원제를 살려 <무시무시하게 맛있는>으로 번역했으나 넷플릭스 번역에는 <아주 달콤한 작전>이란 전혀 뉘앙스가 다른 제목이 달렸다. 물론 틀렸다는 게 아니다. 번역하는 사람들마다 그만큼 감성과 센스가
다른 것뿐이다.
이런 경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어차피 인도네시아 영화 평론을 쓰는 이유는
어쩌면 생소할 수도 있는 현지 영화 속 문화-역사적 배경을 설명해 독자 관객들의 이해를 도와 영화를
좀 더 즐길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인 만큼, 내가 번역한 제목을 고집해 혼선을 주기보다는 빨리 패배를
인정하고(?) OTT 제목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의 반 타의 반, <모든 것이 멈춘 순간> 번역의
손을 들어 주기로 한다.
죽은 애인이 증강현실 속에 AI 캐릭터로
등장하면서 벌어지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틀어지거나 강화되는 내용을 담은 이 영화는 161만 명의 관객이
들어 11월말 당시 로컬영화 흥행순위 9위를 달리고 있었다. 오늘 확인해 보니 <172일>이 2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모든 것이 멈춘 순간>이 10위로 내려 앉았다. 하지만
일단 제목 번역에서부터 마음 상해 삐졌으니 미리 어렵게 만들어 놓은 위의 표는 그냥 쓰기로 한다. 내
맘이다ㅠ
몇 년째 호러영화들이 강세를 보이는 가운데 올해도 10편의 호러영화 속에 다섯 편의 드라마
장르 영화가 3, 4, 9, 11, 12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2023년 11월 14일(화) 거행된 2023년 인도네시아 영화제(FFI 2023)에서 이 영화는 <주제가 작곡상> 부분 후보에 올랐으나 본상 수상엔 실패했다. 상당한 흥행을 했지만 영화적으로는 평가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 여주인공인 쁘릴리 라뚜콘치나는 영화 <캐릭터(Budi Pekerti)>로 여우조연상을 남주인공 레팔 하디(Refal
Hady)는 이 영화로 관객이 뽑은 남자배우상을 수상했다. 최소한 배우들은 좋았다는 얘기다.
1996년생 쁘릴리 라투콘치나는 여러 면에서 특이하다. 2015년에 솔로 가수로 데뷔한
이력이 있고 여러 권의 소설과 에세이집을 발간했으며 10개 이상의 음식 브랜드도 출시하는 등 다방면의
재능가진 배우다. 영화에는 17살이던 2013년에 데뷔했고 2017년부터 센세이션을 일으킨 <다누르> 3연작에 내리 출연하며 호러퀸에 등극했지만 그간
드라마 장르 출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멈춘 순간> 남녀 주인공들 - 왼쪽부터 브리안
도마니, 쁘릴리 라뚜콘치나, 레팔 하디
<모든 것이 멈춘 순간>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상실감 트라우마를 겪는
젊은 여성 디타 역을 큰 무리 없이 연기했다.
1993년생 레팔 하디는 남성미 넘치는 잘생긴 외모 덕에 2017년 데뷔 이래 출연한 영화들
필모그래피 대부분이 로맨스물이다. 이 영화 속에서도 과묵하면서 인내심 강한 매력적인 캐릭터로 등장한다.
증강현실 속 AI로 등장하는 불운의 연인 에드 역의 브리안 도마니는 2000년생이다. 이 영화만 봐서는 그의 연기를 뭐라 평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가 2023년 한-인도네시아
영화 페스티벌(KIFF 2023) 개막식 스타로 초대받은 것을 보면 최근 각광받는 젊은 배우인 것은
분명하다.
이 영화를 만든 우마이 샤합 감독은 이들 주요 배역의 배우들보다 더 어린 2001년생이다. 인도네시아 영화제가 선호하는 드라마 장르의 영화이고 흥행에서도 상대적으로 성공했지만 FFI 2023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것은 감독이 너무 젊은 신인이란 점, 제작사가 시네마쿠 픽쳐스라는 별로 이름없는 곳이라는 사실이 작용했을
공산이 크다.
하지만 그의 감독 데뷔작인 <집에 있는 줄 알았어(Kukira
Kau Rumah)>(MD 픽쳐스 제작)가 222만
명의 관객을 불러들여 2022년 로컬영화 흥행순위 8위를
달린 것을 보면 그는 앞으로 내로라하는 흥행감독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우마이 샤합
감독
영화 초반에 디타와 에드가 대화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두 사람은 영어를 많이도 섞어서
말한다. 그런데 그게 꼭 배우나 작중 인물이 자기 영어실력을 뽐내려 하는 건 아니다. 자카르타의 젊은이들 사이엔 그런 식의 화법을 ‘남부 자카르타 사투리’라고도 부르는 모양인데 나도 일찍이 1990년대 말부터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 보았다.
그중 미국에 유학을 가
9년을 살았던, 수하르토 정권 당시 장관을 지냈던 분의 딸이 딱 그랬다. 그런데 유학을 가지 않고도 그런 식으로 따라 말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걸 보면 다들 그게 꽤 있어 보이는 화법이라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 화법의 특징은 ‘가버먼트 인게이지먼트는 레귤레이션’이라는 식의 촌스러움 대신 혀를 최대한 굴려 원어에 가깝게 발음하다가 마지막을 완벽한 (그러나 짤막한) 영어 문장으로 끝마치는 것이다. 그러니 영어를 어느 정도 하는 젊은이들끼리의 대화법인 셈이다.
이 영화를 본 후 나도 사람이 아닌 어떤 존재, 예컨대 이 영화 속 AI 캐릭터 같은 것에 의해 삶의 위로를 받거나
속아 넘어가 실망한 적이 있는가 잠시 생각해 보았는데 나를 기쁘게 또는 슬프게 만든 것은 역시 사람들이었다. 이
영화의 결론 또한 그렇다.
이 영화가 나름 꽤 많은 관객을 불러들일 수 있었던 것은 챗GPT에서 영감을 받은 AI 캐릭터를 등장시켜 다양한 시추에이션을 만들고 그때마다의 배우들 감정기복을 통해 젊은 관객들의 감정마저 물결치게
만들었다는 부분 외에도 영화 속 젊은 배우들의 풋풋함이 동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의 풋풋함을 영화 속에 살려낸 것은 우마이 샤합 감독 스스로의 풋풋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배동선 작가
- 2018년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
- 2019년 소설 '막스 하벨라르' 공동 번역
- 2022년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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