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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선택, 왜 미국 아닌 인도네시아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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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손인식 느낌과 새김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5,599회 작성일 2019-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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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왜 미국 아닌 인도네시아였나?
 
해외에서 전업작가로 살기 ①
 
산나루 서생
 
 
 
안녕하세요? 산나루 서생입니다. 오늘은 제가 인도네시아에 이주하게 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인도네시아를 이야기하려면 그게 순서인 것 같아서요. 그동안 인도네시아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구독자의 댓글이 몇 번 있었습니다. 초기 몇 년 때 같으면 얼씨구 기회다 싶어 미주알 고주알 인도네시아 이야기를 터트렸을 겁니다. 이삿짐도 도착하기 전 싸들고 온 붓과 벼루를 꺼내 야자수를 그린 저였으니까요. 도착한 다음 달부터 한인뉴스와 교민신문에 예술과 작품 이야기를 기고했고요. 6개월 후에는 동아일보의 요청으로 <해외에서 살아보니>란 제목으로 기고도 했고요. 그때부터 오마이뉴스 시민 기자 역할도 나름 충실히 했습니다. 근데 벌써 인도네시아 살이 20년을 바라보는 입장이 되니 오히려 할 이야기가 줄어듭니다. 그렇지만 이번 유튜브 활동을 계기로 보는 눈도 생각도 다시 새로워졌습니다. 이미 올린 영상 열대 과일 이야기나 이웃과 살아가는 이야기 외에 제가 느낀 인도네시아 이야기를 영상 몇 개로 간추리려고 합니다.
 
 
제가 인도네시아에 이주한 것은 아주 예외에 속합니다. 제가 투자자도 아니고 주재원도 아니니까요. 굳이 분류하면 자영업에 속하나요? 하여튼 서예가의 인도네시아 이주 매우 특수한 경우죠. 2003년 4월 떠나는 것을 보는 한국 서단의 동료작가들이나 오는 것을 보는 자카르타 지인들 양쪽 다 염려는 같았습니다. 흔히 하는 말 있잖아요. 도대체 “뭘 해먹고 살려고 그러지?” 그때 주변에서는 말렸죠. 한국 서단에서 나름 다져 놓은 것도 있고 맡은 일도 몇가지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 때 제 답 한마디 뭔 줄 아세요? “사람은 문화 생산자입니다. 사람 사는 곳 어디나 문화가 있어요. 거긴 거기대로 제 일이 있을 겁니다.” 제가 이 말에 근거를 두는 것은 1950년 한국 전쟁시 피난지의 중심이었던 부산에서도 작품 전시와 시 낭송회가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뜻이 있다면 어디서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세상사, 또 인간사라는 생각을 합니다.
 
최근 한국에는 동남아 이주를 타진하는 분들도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국내 상황이 여러모로 뒤숭숭한 때문인가요? 하긴 한국인들이 해외로 눈길을 돌리는 것은 어제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니지요. 해외 한국인 700만 시대니까요. 그래서 만약 어느 분이 제게 인도네시아 이주 건에 관해 묻는다면 저는 한마디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원하시면 언제든지 오세요. 하고 싶은 것은 해야 나중에 후회 안 하니까요.” 사람 사는 곳 어디나 장단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거주도 꽤 장점이 많습니다. 단점도 꽤 많지만요. 하여튼 원하신다면 아주 상세하게 살피고 이주를 하셔야 합니다.
 
이때 살피는 것은 인도네시아 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현재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이 의지라고 생각하는 거죠. 언어에 문제가 없음에도 적응에는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을 보고 들었기 때문이죠. 그만큼 타국생활이 만만치 않다고 봐야겠죠. 그러니까 어떤 상황이 닥쳐도 이겨내겠다는 의지, 할 수 있다는 신념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자기를 대변할 특기도 필요합니다. 내세울 것은 아니지만 저는 붓을 다룰 줄 안다는 특기 하나로 살아냈거든요.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12년 전이네요. 인도네시아 국비 장학생으로 6개월 또는 1년 과정으로 인도네시아에 온 젊은이들을 환영식 겸 해서 만난 때입니다. 그들 중에는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도 있었고, 재학생도 있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자기소개를 할 때 유난히 인도네시아 사랑을 외치더군요. 자기는 한국의 지방대학 졸업생이지만, 이 기회에 반드시 인도네시아에서 취직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두루 친화력을 발휘하고요. 그 젊은이는 학교 수업기간이 끝나기도 전 취직을 확정지었습니다. 무엇을 전공했는지 어떤 능력이 있는지 보다 의지력이 결실을 맺은 한 예라 생각합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끊이지 않은 불균형 말입니다. 한쪽은 취업난이고 한쪽은 구인난이잖아요? 바로 그 틈을 매울 것은 결국 사람의 의지와 긍정성이라고 봅니다. 저는 지금 순전히 문화생산자인 작가로서 인도네시아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 비하면 다소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인도네시아 한인들 중 능력을 가진 분들이 적극 나서주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물론 그 분들이 다 영상을 제작해 올리는 것은 부담이 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앞으로 요청을 드리려고 합니다. 만약 제가 협조를 부탁드린다면 거절하지 마세요. 저는 한국에서 활동할 때보다 인도네시아에 와서 열배 백배 많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특히 기업인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제가 인도네시아 활동 중 발간한 책 9권 중에는 인도네시아와 또 한인들의 사는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전년도에 진행한 프로젝트 경영탐문이야말로 꽃이었고요. 그간 수십 회 문화 이벤트를 기획 진행했는데, 그 또한 제게는 다양한 체험이었지요. 이 모두가 제 인도네시아 이야기 토대입니다.
 
인도네시아는 정말 가능성이 많은 나라입니다. 다만 선진국들과는 달리 의외성이 많습니다. 인도네시아 한국인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지요. ‘인도네시아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다’는 말이죠. 저는 이 말이 한국인들이 느끼는 인도네시아의 의외성, 문화의 차별성을 대변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가족처럼 믿는 사람의 말을 들었다가도 현지 상황으로 인해 일이 잘 못되는 경우가 생기니까요? 저도 처음 와서 바로 그런 상황을 겪었습니다. KITAS 즉 1년짜리 외국인 임시 거주 허가증명서를 진행할 때인데요. 원래는 제가 한국에서 떠나기 전 주한국 인도네시아 대사관으로부터 비자를 발급받아 들어온다는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미루고 미뤄졌어요. 비행기 예약된 날자, 렌트한 집 입주 날짜 등으로 인해 그냥 관광비자로 비행기를 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헌데 이주를 하고 나서도 진행은 여전히 더뎠습니다. 관광비자 만료기간인 2개월을 넘기고 말았지요. 제 지인이 분명 괜찮은 사람으로 소개한 컨설터인데도 마감 3일 전부터 연락조차 끊더군요. 갖은 사정을 이야기하며 비용은 거의 다 받아간 상태였습니다. 결국 세 식구가 벌금을 내고 다시 싱가포르를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 사람의 컨설터를 거치고 나서야 외국인 임시 거주 허가증명서를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처음부터 예상 못한 황당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주변 많은 분들도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로 이주하려면 6개월이나 1년을 오가며 살아보거나 살피고 나서 스스로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현명한 방법일 것입니다. 어쨌든 주재원이 아니라면 본인이 파악하고 결정하는 것이잖아요? 빠르건 늦건 이주가 괜찮다는 결론이 나오면 바로 실행하세요. 그 다음은 현장에서 경험하며 견뎌야죠.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안 담그면 간장을 먹지 못합니다. 어차피 공짜는 없잖아요? 하고자 하면 못 이겨낼 것도 없고요.
 
▲ 2000년 11월 인도네시아 국립대학 UI 중문과 강의
 
저는 처음엔 미국을 겨냥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계시는 지인 한 분이 적극 말렸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미국에서 활동을 할 경우 전업 작가 생활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반인도 아니고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분이 그렇게 안내를 하니 수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작가활동을 할 수 없다면 미국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직업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요. 그 다음은 뉴질랜드를 알아봤어요. 거긴 미국보다 제가 작가 활동을 하면서 살기에는 더 어려운 상황이더군요.
 
인도네시아가 제게 운명이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주를 하기 3년 전 아주 우연하게 자카르타 남부 중심 Hotel Mulia에서 초대전을 열었습니다. 그보다 먼저 빈탄섬을 통해 인도네시아와 인연을 맺었고요. 1999년 12월 말 새천년맞이 여행지가 싱가폴을 경유한 빈탄섬이었거든요. 그게 인연일까요? 그로부터 11개월 후 2천년 11월 자카르타에서 전시를 하게 된 것이죠.
 
전시는 제게 놀라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첫째 미디어의 반응이었습니다. 신문과 방송에서 한국에서는 겪어보지 못했던 관심을 보였어요. 대서특필했습니다. 자카르타 유명 화랑의 큐레이터와 컬렉터 모임에서도 저를 초청해서 워크숍을 개최하는 거예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동양 예술에 관해 엄청 관심이 많구나 하고 착각할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초대전 주관자의 기획이 빛났던 겁니다. 어쨌든 제가 놀란 것은 인도네시아 상류층의 예술품 소장 규모나 질이었습니다. 제가 책에서만 보던 세계적인 작가들 고가 작품들이 즐비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최고 국립 우이대학 중문과 강의도 참 신선함이었습니다. 짧은 1시간이었지만 한국국제학교 JIKS의 교사 연수도 좋았고요. 특히 저는 그때 인도네시아 한인들의 친절함에 놀랐습니다.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여유로운 모습들이었어요.
 
어쨌든 전시와 관광까지 마치고 국내로 돌아간 저는 인도네시아란 강력한 미끼를 문 셈이었습니다. 일을 할 때도 쉴 때도 인도네시아 생각이 솟구쳤어요. 아~ 그런데 이야기는 이제 시작인 것 같은데 시간을 벌써 10분을 훌쩍 넘겼습니다. 너무 길어지네요. 다음 영상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시청하시는 분께는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얼른 다음 영상을 준비해서 찾아뵙겠습니다. 이상 산나루 서생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덧붙이는 말 : 이 글은 아래 https://youtu.be/upqw3eKDcdU영상 내용을 고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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