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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24. 쿠데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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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환의 주간포커스
작성자 jktbizdaily1 댓글 0건 조회 5,473회 작성일 2014-07-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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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참모장인 나수띠온 대령의 ‘국군 감축안’을 재검토하라는 의회의 비토에 반기를 들고 예하 부대장인 께말 이드리스 소령이 포신을 대통령궁으로 조준해 놓고, 나수띠온과 참모들이 수카르노 대통령 집무실에 난입하여, 대통령 하야 청원서를 낭독했던 1952년 10월 17일 사건은 인도네시아 현대사에서 ‘쿠데타’란 용어를 처음 등장시키게 된다. 이후 1958년 수마뜨라, 술라웨시 출신의 고위 군지휘관들이 선포한 혁명정부(PRRI)도 쿠데타의 일종이며, 1957년 수까르노의 목숨을 노린 자카르타 시내 찌끼니 국민학교 수류탄 투척사건도 일종의 모반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골격을 갖추고 자행된 쿠데타는 1965년 10월 1일 중국 최고지도부의 사주를 받은 인도네시아공산당(PKI)이 일으킨, 소위 9.30사태(G30S)가 그 첫번째 사례가 된다. 수하르또 장군의 역 쿠데타에 의해 1일 천하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 정변은 인도네시아 현대사의 흐름을 크게 변형시킨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후 철권정치로 반란의 싹수를 잘라버린 수하르또 집권 기간 내내 잠잠하던 쿠데타설이 다시 등장한 것은, 바로 베니 무르다니 장군이 국군사령관직(Pangab) 임기를 거의 마쳐 가던 1988년 초의 일이다. 수하르또의 장기집권과 정경유착이 극에 달해 군부를 비롯한 민중들의 불만이 팽배하던 시절, 베니 장군이 주축이 된 그룹이 수하르또 전복을 꾀하고 있다는 쿠데타설이 유포되기도 하였다. 이를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당시 대통령의 사위 쁘라보워와 동서인 위스모요 등 대통령의 인척 장성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행동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베니는 국방부장관직에 임명되어 마지막 공직생활을 한가하게 보내게 된다. 그러나 견제세력이 떠나간 뒤 고삐 풀린 대통령 일가의 경제독점은, 10년 후 결국 치욕스런 종말로 귀결되고 만다.
 
지금 시중에는 쿠데타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센투리은행 스캔들에 발목이 잡힌 유도요노 대통령 주변엔 거의 매년 탄핵설, 또는 쿠데타설이 등장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처럼 구체적으로 유포되기는 처음이다. 3월 중순 방영된 알 자지라 방송에 의하면, 일단의 퇴역장성들이 주축이 되고, 강경 회교세력들이 이를 뒷받침하여, 3월 25일을 기해 대학생들의 거리시위를 시작으로 정권을 전복시킨다는 시나리오이다. 퇴역장군 그룹과 종교그룹의 구체적인 인적사항은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지만, 정보기관에선 이미 대통령에게 그 실체를 보고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퇴역장군 그룹이라 하면, 우리는 당장 1968년도 임관생들로서 한때 정권장악 직전까지 갔던 위란또 대장, 자카르타 주지사를 역임한 수띠요소 중장, 교통부장관을 역임한 아굼 구멜라르 중장 3총사를 떠 올릴 수 있으며, 가장 활발한 그룹활동을 벌이고 있는 1970년도 임관생들로는 수석졸업자인 루훗 빤자이딴 중장, 국군사령관을 역임한 엔드리아르또노 대장, 육참총장 출신의 수바기요 대장, 국군부사령관을 잠깐 지낸 화흐룰 라지 대장, 아구스 위조요 중장, 수아이디 중장, 조니 루민땅 중장, 수마르디 중장, 특전사령관 출신의 무흐디 소장 등 기라성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대통령의 동기생들인 1973년 졸업자들엔 현 정치안보조정장관인 조꼬 수얀또 대장, 전 경찰청장 수딴또 대장, 공군 수석졸업자인 또또 리얀또 중장이 있고, 1년 후배인 쁘라보워 중장, 아구스따디 대장, 샤프리 중장 등 1974년 임관생들이 그 뒤를 잇는다. 이들 장성 그룹 중 가장 주목을 끄는 세력은 1970년 임관생으로 그들은 유도요노 지지에서 아브리잘 바끄리 지지로 선회하였다가, 지금은 또다시 유도요노의 임기를 존중한다는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엔드리아르또노 장군은 얼마 전 이 그룹을 이탈하여 지금은 수르야 빨로의 나스뎀당에 몸을 담고 있다.
 
유도요노 대통령은 3월 초 유럽순방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일련의 행보를 서둘렀다. 월요일인 11일 쁘라보워와 그의 최측근 참모인 화들리 존을 대통령궁으로 초치하여 2시간 반에 걸친 공개회의 외에 20분간 둘만의 밀담을 가졌다. 이는 유도요노 대통령이 현재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 중 한명인 쁘라보워와 ‘인권문제’를 담보로 모종의 거래를 하는 게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틀 후인 13일에는 노골적으로 세력과시를 서슴지 않는 1970년도 임관 선배들 7명을 대통령궁으로 초치하여 대화를 나눴다. 쉬지 않고 그 다음날에도 13개 이슬람 종교단체 대표들을 초청하여 정치적인 사안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NU 총재인 사이드 아킬(Said Aqil Siradj)은, “비합법적인 방법에 의한 정부 전복은 있을 수 없으며, NU는 대통령이 임기기한까지 마치는 것을 적극 지지한다.”고 대통령의 원군이 되어 주었다.
 
시나리오 상에 나와있는 D-Day가 3월 25일이면, 본 칼럼이 실린 신문이 배포되는 날이다. 최근 몇 년 간 그래왔듯이 이번 쿠데타설도 또 한번의 ‘설’로 끝나는 해프닝이 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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