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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남자로 태어나 신부로 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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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손인식 느낌과 새김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0,191회 작성일 2018-07-10 00:00

본문

 
-김정렬 모세 신부, 가톨릭 신앙과 사제의 길 -
 
필자 주 :
이 원고는 2005년 2월 김정렬 모세 신부와 나눈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2006년 초 <한 타임즈>가 발간한 책 『아름다운 한국인』의 네 번 째 꼭지다.
당시 모세 신부께서는 자카르타 성요셉성당 사목 중이셨다.
현재는 부산교구의 운영 중책을 맡고 계시다.
오래 묵어도 빛이 흐려지지 않는 것이 진리,
그의 귀한 말씀을 다시 새기는 이유다.
원고는 조금 수정했음을 밝힌다.
  
이 대담을 한 후다. 글을 정리하기 위해 녹음된 대담 내용을 반복해 들었다. 김정렬 모세 신부의 말씀 모두가 금과옥조였으니 환희였다. 아쉬움이 끼어들었다. 혼자 하는 경청이 아무래도 아쉬웠다. 안타까움도 파고들었다. 글의 실마리가 쉬 잡히지 않았다. 풍요 속 선택의 어려움이었다.
 
“남자로 태어났는데도 신랑이 되어보지 못하고 신부(神父)로 삽니다^~^”
 
사제께서 소년처럼 웃었다. 따라 웃을 수 없었다. 단정 지을 수 없는 웃음이다. 섣불리 헤아리려 덤벼서도 안 될 웃음이다. 범인은 그냥 그 울림을 새기기만 해야 할 뿐. “만약 신부가 되지 않았으면 농사꾼으로 살았을 것”이라며 다시 웃었다. 이 해맑은 소탈함 역시 쉬 범접할 경지가 아니다. 마음 가난한 필자에게 한가득 파고드는 말씀의 성찬이 시작되었다. 둔한 필로 어찌 전할지 기쁜 두려움이 앞선다.
 
사목에 관한 한 절도 넘친다고 했다. 일관성에 덧붙여 현장에 알맞는 창의적인 사목을 하신다고 했다. 성요셉성당 교우들 이구동성 그렇게 느낌을 밝혔다. 운동선수와 같이 파워 넘치는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단호함을 존경한다고 했다. 시의 적절한 창의성을 잇는 실행능력을 우러러 따른다고 했다. 실마리가 잡혔다. 그의 창의적이고 실천 분명한 사목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글의 기반이다. ‘믿음도 창의적이면 최선’이겠다는 바탕이 섰다. 사정없이 닥쳐드는 원고 마감 시간을 코앞에 두고서야.
 
하여 정리를 시작하며 감히 독자들께 부탁드린다. 부디 필자의 글을 읽지 마시라. 꼼꼼히 새겨보시라. 김정렬 모세 신부를 통해 피어난 진리의 향훈을. 종교가 다른가? 구원의 길을 달라도 구원으로 나아가는 진리가 하나 아니랴. 잠시 귀 기울여도 낭비 아니리라. 종교가 없는가? 잠시 쉬어가자. 지류를 거부하지 않는 큰 바다 된 느낌이리라. 마침내 상기하시라. 자카르타 성요셉성당의 존재를.
 
▲ 김정렬 모세 신부(2004년)
 
평화를 빕니다
 
2005년 2월 16일 오후 3시, 대담을 위해 성요셉성당 사제 처소에 들어섰다. 사제의 거처답게 소탈하고 담백하다. 처음이 아님에도 조심스럽다. 들어올 자격이나 있는지 송구한 마음 겹친다. 속인의 심상이 들통났을까? 신부께서 이것저것 배려해주신다. 필자의 서예가 한길이나 사제의 한길이 닮은 부분이 있어서 이야기가 서로 통할 것이라 용기도 주셨다. 바람에 문이 열리듯 스르르 대담이 시작되었다.
 
“자카르타 성요셉성당, 큰 은총이지요. 성소가 어딘들 다르겠습니까만 인도네시아라서 유독 특별한 느낌입니다. 누구라도 여기에 오는 순간 모두가 바로 이 집 주인입니다. 부디 많이 오셔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를 바랍니다.”
 
자카르타 성요셉성당은 1978년 재 인니 한인 가톨릭 교우 첫모임을 시작으로 태동하였다. 2001년 2월 성전 축성식 이후 오늘에 이르렀다. 1995년 3월 본당 초대 김옥수 도미니꼬 신부께서 부임한 이래 제2대 김성규 안드레아 신부, 제3대 차성현 암브로시오 신부에 이어 모세 신부께서 4대째 본당 신부로 사목하고 계시다.
 
▲ 자카르타 성요셉성당
 
▲  자카르타 성요셉성당 정원의 성모상 우리 어머니(2005년 제막)
 
“성당에서는 정기 미사 외에도 교우들과 교민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누구라도 영적 평화를 이루는 데 도움을 드립니다. 로마 가톨릭이 교황을 정점으로 무려 2천여 년을 이어온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각 지역에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고 있습니다. 이 본당도 다르지 않습니다. 더러 마리아 교가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천주교는 한 마디로 예수그리스도의 진리를 믿고 실천하는 종교입니다.”
 
자카르타 성요셉성당은 현재 교우 1천여 명이다. 교민들에 의한 교민들을 위한 교회다. 재외 교포 사목에 대한 지침이 따로 있을까? 신앙인의 바른 모습은 무엇일까?
 
“저는 재외 사목이 여기가 처음입니다. 타국의 교포 모두가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신앙생활은 현실이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신앙인은 오늘을 아름답게 삽니다. 그게 신앙의 본질이죠. 예수님은 기득권자들이나 부정한 세상을 향해 진리를 펴셨습니다. 그 의미를 잘 생각해봐야 해요. 예컨대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있지요. 안식일은 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즉, 종교란 속박이 아닙니다. 참 자유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도구죠. 타국생활을 하는 교민 다수의 일차 목적이 경제활동이겠죠? 그렇지만 사람 삶에서 경제가 주인공이 되면 삶이 각박해집니다. 삶에서 욕심을 줄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인도네시아 한인 사회는 정말 다양합니다. 사목 방향도 다양성에 맞춰야 하지요. 지난번에 다녀가신 전 제주 교구장 김창렬 주교께서는 사제 생활 50여 년입니다. 많은 해외 본당을 다니셨지요. 자카르타 성요셉성당이 모범적인 사례로 소개될만하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자카르타 성요셉성당의 신구 조화가 좋습니다. 연륜이 쌓인 분들과 젊은 교우들의 분포가 매우 이상적이에요. 활기 있죠. 생동감이 특징입니다. 무게감도 부족함이 없어요. 제 사목활동의 활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명령에 따라서 부임해왔고 때가 되면 조용히 이임할 것입니다. 다만 이 본당에서 사목하는 동안은 평생 여기서 살 사람의 마음을 갖고자 합니다. 교민들도 그런 마음이기를 간절히 바라지요.”
 
신부(神父), 아! 신부!
 
사람에겐 중요한 동력 하나 있다. 호기심 발동이다. 호기심이 곧 활기다. 소중한 에너지다. 마침내 답을 얻으면 기쁨이 출렁인다. 그래서 감히 사제의 길을 여쭸다. 이때 아니면 어찌 여쭈랴 싶었던 거다.
 
“자기를 온전히 봉헌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것에는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하는 삶이지요. 사제의 길 선택 순간부터 걸림돌이 되는 것이 평생 독신입니다. 거뜬히 넘어야죠. 자기가 좋아하는 한 사람 선택을 포기한 대신 불특정 다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꽝~ 뇌리를 치는 울림이 일어났다. 답을 들으며 필자는 고개를 숙였다. 경솔한 질문, 후회 해봐야 이미 늦었다. 성직자의 길, 사제의 삶 무엇 하나 그저 그런 호기심 따위로 다가갈 경계이랴. 말씀을 차분히 새길 수밖에.
 
“제가 사제의 길을 선택한 것은 부모님, 특히 아버님 영향이 컸지요. 오랫동안 가톨릭 신앙의 집안 분위기 때문에 사제의 길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어요. 청도 김씨 죽산파로 저의 6대조께서 1835년생인데 세례명이 있어요. 그로부터 150여 년을 이어져 왔습니다. 한 집안의 신앙으로 역사가 깊다면 깊죠. 그런 집안의 분위기 때문일까요? 사제가 저뿐만이 아니에요. 가까이 작은 집의 외동아들인 사촌 동생도 신부입니다. 친척 중엔 또 다른 사제가 있고, 현재 신학생도 몇 있습니다.”
 
자식을 온전히 봉헌하는 부모의 신앙심 크기는 어떨까? 사제가 된 자식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기도 하실까? 분명 범상을 초월한 세계다. 또한, 감히 짐작만 해야 하리라.
 
“가톨릭의 독신자 제도 시행은 약 700년 정도 되었어요. 사실 독신이란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원래 목적과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법에는 맞지 않지요. 그러나 사제의 삶이 어딘가 매이는 것보다 독신인 것이 더 유익하지 않을까요? 어쨌든 그것은 가톨릭의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가 영원할 것인지 그건 신만이 아실 일입니다.
 
사제는 하느님과 교회, 그리고 신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디에 살든지 사사로운 것에 연연하지 않는 확고한 태도를 보여야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성철 스님이 참 수도자였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의 장례에도 시자(侍者)만 보낸 것처럼 속세의 인연에 연연해하지 않는 그런 정신은 본 받아야 합니다. 출가자인 사제가 잘 못 살면 교회가 비천해 집니다. 사제가 자신의 실존과 교회의 본질에 대해 사명의식이 투철하다면 교회는 자연 튼튼해 질 것입니다.
  
▲  성당을 방문한 <해인사 인도네시아 포교원> 자우 스님과 함께(2005년)
 
1962년부터 65년까지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사제의 실존에 대해서 신부는 교직자이지만 신자 위에 군림하지 않아야 한다고 천명했어요. 사제의 중요한 역할은 각종 성사를 거행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은 하느님을 보이게 하는 역할이지요. 독신이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는 좀 엄한 규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매개체인 교회는 좋은 모습이지요. 사제가 예수님처럼 살기 위한 한 방법이고요. 사제란 바로 모든 신자와 결혼한 신부입니다.”
 
투철한 사제관, 누군들 존경심 솟지 않으랴. 이런 투철함을 삶에 들인다면 누구라도 그 삶 바르지 않으랴. 그로 세상 무한 아름다워지리라.
 
삶은 묵상하는 것, 기도하는 것
 
한 시인 있어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를 간절히 읊었다. 기도는 경건의 표상이다. 겸허의 징표다. 기도가 곧 기도로 이루어짐이니 기도의 꽃이 곧 실행이리라.
 
“어느 스님이 은사께 왜 기도가 안 됩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 은사는 기도하지 않으니 기도가 되지 않는다고 답했어요. 종교인은 모두 기도 잘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는 신과의 커뮤니케이션이죠. 그보다 먼저 자기와 대화입니다. 실천을 위한 노력이고요. 기도는 ‘머무름’이기도 합니다. 십 분을 하면 십 분은 기다려야 해요. 미사 때나 묵주 기도 때마다 입으로만 되뇌는 것은 좋은 기도가 아니에요.
 
말로 하는 기도를 ‘염경기도’라 합니다. 기도의 초보죠. 또한, 책에 있는 기도문은 다 함께 같은 뜻으로 행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각자 지향을 분명하고 깊게 묵상해야 합니다. 임신 기간이 열 달이잖아요. 그 기간이 지나고 나서 한 생명이 탄생합니다. 뭔가 갈구한다면 긴 기간 기도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단순히 답을 얻으려는 기도는 금물입니다. 답을 정해놓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기도의 답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올 수 있으니까요.
 
▲ 김정렬 모세 신부의 결혼하는 교우 부부를 위한 기도문 (2005년 인재 손인식 작)
 
중요한 것은 왜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부터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묵상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깊이 성찰을 하는 시간입니다. 묵상으로부터 명상까지 시간을 가지면 좋겠는데 현대인들의 여건상 참 어렵지요. 친구나 TV, 인터넷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겨요. 그러나 자신을 위해 혼자만의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의 특성은 자꾸만 혼자 있는 것을 모면하려 해요. 그러나 혼자 있는 것은 곧 자기 영성 개발에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그래서 권장하는 기도 중 하나가 성체 조배입니다. 성체조배실 불빛을 응시하면서 온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머무르는 것이 참 기도일 수 있어요. 물론 바라고 구하는 부분들에 대해서 하느님이 아무개 들으라 하고 답해주진 않지요. 고요히 머물러 있다 보면 마치 휙 하고 스치듯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실천으로 옮겨야죠. 안타까운 점은 하느님은 늘 답을 주시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귀와 마음을 늘 닫고 있다는 겁니다.
 
신앙은 실천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의 행적과 말에 대한 기록, 즉 복음이 오늘 나에게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오늘 내가 예수를 닮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인은 나와 내 가족 이웃에게 봉사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해요.”
 
▲  정명조 아우구스티노 주교 자카르타 성요셉성당 방문 견진 성사 시 함께(2005년)
 
▲  본당 수녀, 교우들과 함께한 김정렬 모세 신부.
 
지금 당신 안에서 영감이 활동한다
 
“사람은 모두 영감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전원 교향곡」은 베토벤이 비엔나 숲에서 얻은 영감의 결과입니다. 「할렐루야」는 밤에 영감을 얻은 헨델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일상도 다반사가 영감입니다. 누군가 그리운 것도 뭔가 하고 싶은 것도 다 영감이지요.
 
성령을 좀 쉽게 설명하면 바로 영감입니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성령, 즉 하느님이 현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다른 말로 하면 위로자나 협조자입니다. 마음의 문을 닫으면 곧 성령이 죽는 겁니다. 신자는 세례 후부터 부싯돌이 부딪쳐 불빛이 일어나듯 성령과 교통해야 합니다.
 
올바른 신앙의 길이란 성령을 심화시키는 일입니다. 신앙을 차곡차곡 쌓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성령이 활동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더러 성령에 의한 은사가 좋은 곳에 쓰이지 아니하고 나쁜 곳에 쓰이기도 합니다. 부작용이지요. 자칫 악령 따위를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다만 욕심이 잘못 발휘되는 것입니다. 늘 깨어 이를 경계해야죠.
 
70년 이후 가톨릭 안에서도 성령에 관한 연구와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가톨릭이 성부와 성자와 함께 3위 일체의 신앙이지만 성령에 관한 연구는 개신교의 성령부흥회에 영향을 받은 바 크지요. 어느 신부님이 미국의 개신교 교단을 통해 통계를 낸 적이 있어요. 교리를 열심히 가르친 교단보다. 성령의 활동과 살아있는 역할에 대해서 강조한 교회가 더 많은 성장을 했다는 거예요. 성령의 현존을 많이 느끼는 교우들이 되기를 빕니다.”
 
삶의 아름다운 꽃 고해성사(告解聖事)
 
“당신을 용서합니다.” 이 말을 자주 듣는가? 이 말을 자주 하는가? 양자 모두 행복할 이말, 이 말은 삶과 인생을 새롭게 바꿀 가능성을 지녔기에 더없이 소중한 말이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가톨릭의 고해성사 시 사제를 통해 듣는 말이다,
 
“가톨릭에는 세례, 견진, 성체, 고해, 병자, 서품, 혼인의 7개의 성사가 있지요. 성사란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은총의 표시입니다. 모든 성사는 인간을 위한 것입니다. 특히 고해성사는 지은 죄 다 잊고 편히 살라는 하느님 은총이죠. 고해의 말은 사제가 듣지만, 용서는 하느님이 합니다. 사제의 직무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에 관한 확답을 알리는 겁니다.”
 
신부께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누구라서 남의 죄를 듣고 싶겠습니까?” "내용을 누설해도 기억해도 안 되는 다른 사람의 죄를 누가 묻고 싶겠습니까?"하고 되물었다. 학자들은 밝힌다. 인간이 죄와 격리가 안 되는 것이 불완전성 때문임을. 죄는 혼자의 불행으로 그치지 않는 것에 그 심각성이 있다. 가족을 힘들게 하고 타인에게 피해가 미친다. 나아가 사회를 어지럽힌다. 그러므로 죄를 용서받고 기쁨과 평화의 삶을 살게 하는 고해성사는 참된 신자들의 참 아름다운 신앙의 꽃 아니랴.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나는 누구인가?’ 누구나 되짚는 근원을 향한 질문이다. 사람들은 그 답을 찾기 위해 자기 나름 노력을 한다. ‘인생의 근본과 도리에 대한 가르침’인 종교를 찾는 이유도 그 하나다. 그러기에 성요셉성당이 가톨릭 유일의 인니 한인공동체로서 자카르타에 존재하는 의미가 분명하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성경 루가 10장 37절 말씀이다. 모세 신부께서 사제생활 신조로 삼은 구절이다. 사제서품 시 정한 서품 성구다. 모세 신부께서는 그 구절 전후의 의미대로 “이웃 사랑에 관한한 범위를 두지 않기 위해 선택”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바로 자카르타 성요셉성당에서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를 되새기며 이웃 사랑을 펼치고 계시다.
 
“병사들에게 강조했습니다. 군 생활이 지나고 나면 평생 추억담이 될 것이라고요. 대부분 현역 시절에는 생고생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사람의 생에서 고생이란 꼭 필요하다는 게 제 역설이었어요. 고생을 긍정하며 범위를 두지 말고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요. 복무 중 저 역시 한때 외로움과 허탈함을 느꼈습니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요. 지금 그것을 감사히 생각합니다.”
 
모세 신부께서는 두 번의 군 복무를 거쳤다. 사병으로 의무 복무를 했고, 선의로 군종 신부 복무를 이었다. 복무를 피하기 위한 병역 비리 문제가 많은 세상에 참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또한 서품 성구의 실천이 아니었으랴. 대담 마무리를 앞두고 모세 신부의 희망을 여쭸다.
 
“기회가 되면 세상 많은 곳을 다니고 싶습니다. 각 지역의 여러 문화를 사제의 눈으로 경험하고 느낀 것을 여러 교우와 함께 나눌 기회가 올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필자, 가톨릭 신앙의 세계를 진지하게 공부할 좋은 기회였다. 한정된 대담 시간이었지만 사제와 마주 앉아 수도자의 세계를 탐문하는 복을 누렸다. 김정렬 모세 신부의 확고하고 창의적인 사목과 실천을 확인했다. 그 배경에는 자카르타 성요셉성당의 존재 가치가 있다. 다만 대담 내용 정리의 미진함은 변명하지 않겠다. 현명한 독자들께서 사제의 말씀 행간에서 빛을 길러 올릴 것으로 믿는다.
 
“인도네시아 한인과 교우의 목적 성취와 건강을 위해 기도합니다.”라는 모세 신부의 말로 대담 정리를 마친다. 김정렬 모세 신부께도 항상 하느님의 은총이 두텁기를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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