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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9)| 호쾌한 사나이의 아름답게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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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손인식의 경영 탐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7,424회 작성일 2018-03-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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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손인식의 경영 탐문 9

 

 

# 50년 오직 한길가발 사랑

신의 한 수선택 인도네시아

학력 인플레그가 곧 교과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자기 확신

은퇴새로운 일의 시작

 

 

 

- 세계 가발 계 대부 김영율 회장의 경영 세계

 

딱 20분이다. 그의 이야기를 20분만 경청한다면 그의 호쾌함에 매료되리라. 그의 넘치는 에너지로 인해 저절로 힘이 솟으리라. 그의 일 즐기기, 일 집중에 힘차게 박수하리라. 그의 긍정의 삶, 통찰 능력에 감탄하리라. 그리고 마침내 그가 창출한 성과를 향해 ‘과연’하고 긴 숨을 토하리라.
 
김영률 회장(67), 그가 운영하는 회사는 현재 업계가 인정하는 세계 최대 규모다. 가발 개발과 생산 마케팅 등 필요한 모든 부문에서 이미 최고에 도달했다. 그가 창출한 바로 지금의 결과는 그의 장점이 반세기를 바라보는 시간과 더불어 쌓은 것이다. 끈기와 집념으로 한길을 걸은 열매다. 다시 내일로 향하는 탄탄한 대로다.
 
김 회장은 1993년 6월 인도네시아에 진출했다. 중부 자바 지방에 <PT. SUNG CHANG INDONESIA>를 창업했다. 지금은 뿌르발링가에 본 공장을 두고, 반자르, 시다르자, 보보사리, 족자카르타 등에 일정 거리를 두고 일곱 개 공장이 분포하고 있다. 앞으로도 필요에 따라 늘려갈 계획이다. 물론 그의 창업은 1988년 한국이 그 시작이다. 1990년대 들어 노동집약 산업 전반에 인력 수급이 어려워질 때 중국과 베트남을 놓고 상황과 전망을 분석하여 인도네시아를 선택했다.
 
▲ ▼ 김영율 <PT. SUNG CHANG INDONESIA> 대표이사
현재 인니 가발 협의회 회장/ 인니 상공회의소 부회장
 

 

“놀라지 마세요. 문헌에 의하면 가발 사용이 기원전 3000년 경부텁니다. 예컨대 고대 이집트인들은 관습상 삭발을 했는데, 태양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가발을 썼어요. 아시리아인 · 페니키아인 · 그리스인 · 로마인들에게도 가발이 일종의 문화였답니다. 하여튼 역사 속에서 가발은 멋과 계급, 직업적 필요 사이에서 변화도 많았고 부침도 심했어요. 시대가 변해도 가발은 여전히 필요하고 변화 가능성 또한 많습니다.”
 
김 회장께서는 가발 업에 관한 자부심이 확고했다. 그 자부심이 오늘날 성창 인도네시아의 기저다. 성창은 현재 총 일곱 개 생산 현장에 1만 5천여 인도네시아인이 일하고 있다. 관리직 한국인만도 30여 명이다.
 
유쾌한 돈벌이, 돈이란 돌고 도는 것
 
“인도네시아 진출 3년여 즈음입니다. 큰 시련이 닥쳤어요. 새 공장을 축성한 다음입니다. 임차해 쓰던 곳에서 이전하려고 할 때였어요. 장비와 물건을 옮기려 하자 문제를 제기 하는 겁니다. 어느 것도 제 소유가 아니라는 거죠. 처음 법인 설립도 복잡하고 해서 다른 사람이 설립한 법인을 활용했거든요. 물론 임대료야 상당한 금액을 꼬박꼬박 지급했지요. 제 이름의 회사가 아니다 보니 장비를 사거나 재료 수입할 때 등 모두 제가 설립한 법인이나 제 이름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그런 상황이니 법도 제 편이 아니었지요.”
 
그야말로 거액을 요구했다. 안타깝게도 그 상대가 동포였다. 한국의 집을 비롯해 모든 재산을 처분했다. 그러나 요구하는 돈을 채울 수 없었다. 그 순간에도 김 회장의 호쾌한 기질이 빛을 발했다. 해결을 목적으로 결론을 내릴 뿐 안 되는 것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훗날을 기약했다. 요구하는 돈을 최선을 다해 마련한 다음 김 회장은 딱 잘라 말했다. “더는 줄 돈이 없다. 장비와 물건을 주고 안 주고는 알아서 결정해라.”
 

 

“서울 성북동의 꽤 크고 좋은 주택을 판 돈이 그렇게 단숨에 날아갔어요. 자녀 셋을 데리고 이사를 올 때 아내가 눈물을 흘리더군요. 수중에 돈 만 원 남았다는 거예요. 96년이었어요.”
 
김 회장은 아내를 향한 감사가 서슴없다. 아내야말로 창업할 때부터 현재까지 절대 조력자였음을 밝힌다. 아이디어를 보태기도 하고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을 때마다 아내의 인맥이 힘을 발휘했다. 다수 어려운 일의 해결사가 아내였다. 아내의 신발을 자주 사대야 할 정도였다. 일에 집중하느라 아이들과 놀아주지 못하는 김 회장을 탓하기보다 아이들을 이해시키는 쪽도 아내였다.
 
“1990년대 후반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 때였어요. 미국의 거래처 지인이 인도네시아 여행을 왔어요. 스치듯 샘플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더군요. 당시 미국에서 개봉해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한 영화 <아바타>가 소개된 잡지 한 권을 함께 내밀었어요. 거기에 신제품 개발 포인트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 배경인 행성 판도라의 토착민 <나비(Na’vi)>족의 쪽 머리를 모티프로 한 가발입니다. 확신은 없었지만 흥미로웠죠. 반신반의하면서 샘플을 만들어 미국에 보냈어요. 미국에서 바로 오라는 연락이 오더군요. 미국으로 가서 그쪽 스텝들과 1주일에 걸쳐 마라톤 회의를 했습니다. 7가지 아이템이 확정되었어요.”
 
김 회장은 돌아온 즉시 상품 제작에 몰두했다. 쉴 틈이 없었다. 혼신을 기울였다. 아내는 물론 공부하는 자녀들도 거들었다. 평소 당당하던 체구가 수척해졌다. 김 회장은 그렇게 완성한 7점의 제품을 가방에 담고 다시 미국으로 갔다. 관계자들의 놀라는 모습에 히트를 예상할 수 있었다. 생산 시스템 요구와 함께 대규모 주문, 그리고 자금 지원으로 이어졌다. 연이어 소위 대박 주문이 이어지기를 3년, 한때 허무하게 잃었던 돈은 그렇게 다시 그에게 멋지게 돌아왔다.
 
“금융위기를 맞아 널뛰던 환율까지 제게 큰 이득을 안겨줬어요. 그때 생각난 것이 뭔 줄 아세요? 어쩔 수 없이 놓아버렸던 성북동 집이었어요. 돈 보따리 싸 들고 다시 찾으러 갔지요. 물론 실패했어요. 꿩 대신 닭으로 그때 구입한 건물 두 동이 지금은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합니다. 미래에도 안정에 큰 기여를 할 것이라 믿고 있고요.”
 
돈에 관한 한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매우 독특하다. 내심과 달리 겉으로 푸대접이다. 옛 선비들이 젓가락으로 돈 집었다는 등에 기인한 정서리라. 자연 돈 버는 이야기에 관한 한 좀 비판적인 프레임이 작동한다. 그래서 자랑해도 좋을 부를 이룬 경우도 대부분 드러내기를 꺼린다. 그러므로 김 회장께서 쏟아내는 이야기는 참 유쾌했다. 청량하고 아름다웠다. 마치 이야기를 듣는 내가 그 주인공이 된 느낌 뭐 그런 거였다.
 
신의 한 수, 가족이 함께 하는 경영
 
“자녀요? 2남 1녀입니다. 손자 손녀가 8명입니다. 두 아들과 딸 역시 고마움의 대상입니다. 셋 모두 동업자입니다^~^ 지금 모두 경영에 참여하고 있죠. 지근 거리에서 각자의 위치를 정해 일하면서 우리 모두의 꿈을 펼치고 있지요.”
 
장남 김창근 상무(현재)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다. 장남이 고려대 재학 중 언어 연수 겸 영국에서 1년 공부할 때다. 장남이 하이닉스에 매료됐다. 하이닉스가 제시하는 조건이 젊은이들 대다수가 끌릴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들의 진로에 관한 김 회장의 생각은 단호했다. 가족회의를 통해 분명히 밝혔다.
 
“각서를 쓰라고 했지요. 하이닉스에 헌신한다면 먼 훗날에도 성창의 재산이나 성과를 넘봐서는 안 되잖아요. 저는 온 가족이 다 성창의 경영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제가 일군 것은 기초입니다. 좀 더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새로운 세대가 글로벌 경영에 나서기를 바라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이라기보다 모든 창업자의 생각 아닐까요?”
 
김 회장의 가발 사랑은 각별하다. 그가 배우고 느낀 가치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일하다 이직을 하거나 하는 일에 열정이 부족한 젊은 직원을 볼 때면 늘 안타깝다. 직업을 남 보기 좋은 것에 가치를 두는 정서에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창업한 가발 업,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바탕을 갖췄으니 그가 아는 가치를 더 키우고 더 펼치기를 바랐다. 그러나 장남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는 한 달이라는 기간만 밝힐 뿐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여행을 떠났다. 전화기도 두고 갔다. 연락 두절이었다. 한 달 후 돌아온 장남의 말 “아버지 회사에 전념할게요.” 였다.
 
“그 이듬해 새해 1월 초였어요. 장남이 작은 보따리 하나 꾸려 회사 기숙사로 들어가면서 “아버지 1년만 제가 무엇을 하든 내버려 두세요.” 하는 겁니다. 약속했죠. 뭘 하든 바라만 봤고요. 현장으로 사무실로 쏘다니다가 독서에 파묻히는 등 바쁘더라고요. 그러기를 6개월여 외부 영업을 맡겠다고 하더군요. 바이어 관리를 좀 더 철저히 하고, 업계 시장동향 파악과 함께 개발 방향도 제시하겠다고 포부를 밝혔어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과감했다. 생산과 운영, 영업까지 담당한 아버지의 방식을 한마디로 ‘구식’이라 규정했다. 아버지는 1주일이면 가능하던 미국 출장 기간이 아들의 경우  20여 일로 늘어났다. 세심한 부분까지 살폈다. 효율적인 분업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김 회장께서도 개발과 회사 운영에 전념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즈음 어렵게 개발한 제품이 성창만의 레이스 프런트 가발이다. 최고의 품질이란 자부심이 컷다. 그러나 시장 반응 결과야 예측할 수 없었다. 장남 김 상무는 그 제품을 들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제품 브리핑과 광고, 제품 쇼를 체계적으로 기획 진행했다.
 
▲ 한국외국어대 글로벌 CEO과정 원우회 회원들의 성창 인도네시아 방문
 

▲ 한국외국어대 글로벌 CEO과정 원우회 성창 인도네시아 방문 시 성창이 만든 가발 하나씩을 쓰고

 

“역시 질로 승부한 것이 적중했어요. 어쩌면 아들의 마케팅 전략 때문일 수도 있고요. 설마 했던 상품이 놀라운 결과를 창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발 업 종사 40년을 결산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로부터 3년여 그 제품을 독점 생산하는 동안 거둔 성과는 정말 놀랍습니다. 그 이후 8년여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제품이 성창 매출의 중심을 잡고 있습니다. 가족이 합심한 결과가 빛을 발한 겁니다.”
 
그의 이야기 전반을 흐르는 것은 가족에 대한 감사였다. 가족은 그의 기업 경영에 중심에 있었고 성공의 중심이었다. 가발 업 종사에 첫 다리가 된 부친도, 90을 훨씬 넘긴 연세에 지금도 여전히 강건하고 검소하신 어머니도, 절대 동반자임을 밝힌 아내도, 그리고 지금은 경영의 핵심인 두 아들과 딸, 며느리 사위까지도 모두 감사의 대상이었다.
 
二人同心 其利斷金(이인동심 기리단금), 고언에 이르기를 두 사람 마음이 하나 되면 그 이로움이 쇠도 자를 힘을 갖는다 했다. 하물며 가족이 하나 될 때 그 힘이 얼마나 커지랴. 함께 일구는 그 기쁨이 얼마나 크랴. 김 회장께서는 해외 진출 시 “인도네시아를 선택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라고 했다. 가족이 함께하는 경영을 강력하게 추구한 것 또한 어찌 신의 한 수가 아니랴. 
 

同心斷金(동심단금)/ 마음을 함께하면 쇠도 자를 힘이 생긴다
二人同心 其利斷金(이인동심 기리단금)/ 두 사람 마음이 하나 되면 그 이로움이 쇠도 자를 힘이 생긴다.  /  2018년 3월 인재 손인식 작

 

세계 가발 계의 대부 김영율 회장
 
“김 회장은 활력의 사나이죠. 그가 있는 곳은 어디나 생기가 넘쳐요. 베풀고 나누는데 선수죠. 손은 또 어찌나 큰지……”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가까운 지인의 말이다. 그는 현재 인니 가발 협의회 회장이다. 인니 상공회의소 부회장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그가 참여하는 대소 단체가 다수다.
 
“저와 가발의 인연은 마치 약속 같았어요. 아버지의 친구께서 당시 가발업계의 대부셨으므로 길이 열려 있었습니다. 물론 제 선택이 거침없이 가발이었지요. 고등학생 시절부터 방과 후 견습생으로 인연을 맺었어요. 물론 대학진학이냐 가발기술이냐 선택을 놓고 고민을 많이 했지요. 최종 선택이 가발기술이었고요.”
 
사회로 내딛는 첫발부터 그의 호쾌한 성격이 발동했다. 일류대학을 못 갈 바엔 최고의 기술자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마침 당시 가발 업 동향이 그의 넘치는 에너지와 어울렸다. 생산이 수요에 따르지 못했다. 일이 무한정이었다. 성과에 따라 비례하는 수입 또한 일을 즐기는 그에게 승부욕을 자극했다. 일을 즐겁게 그리고 열심히 하는 그에게 높은 수입이 화답했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그가 지닌 지혜요, 이 경영탐문을 통해 그에게 배우는 한 수다.
 
이 얼마나 우리 모두가 참고해야 할 교과서인가. 일류 대학 진학, 고등학생이나 학부모라면 다 바라는 바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기 확신 아니랴. 자신을 스스로 판단하고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 자기가 잘 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작금처럼 고학력 인플레이션 현상이 심한 때일수록 김 회장께서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거화취실(去華就實)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취미요? 일하는 겁니다. 전 아무래도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에요. 일 열심히 했으니 살아온 길을 돌이켜볼 때 아쉬운 부분도 별로 없어요. 생각했었던 데로 이루어졌다 할 정도죠. 감사할 것은 열심히 일 할 수 있도록 뒤를 받쳐준 건강입니다.”
 
김 회장께는 은퇴 후 계획도 일이다. 진즉부터 은퇴 후 할 일에 관해 준비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많은 것을 받았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환원코자 한다.
 
“저는 좀 근본적인 데 관심을 두고 있어요. 인도네시아가 모계 중심 사회이기 때문이겠지요? 가족 구성이 아빠 없이 엄마와 아이들인 경우가 너무 많아요. 대부분 생활고를 겪고요. 엄마나 아이들이 그릇된 유혹에 빠지기 쉬운 구조죠. 거기서 악순환이 생겨요. 가발 업종의 특성을 잘 살리면 선순환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돈벌이를 하는 일터와 육아시설, 종교시설을 한 단지 안에 갖추는 겁니다. 가발 업은 그게 가능합니다. 현재 약 4핵타 정도 대지를 확보했습니다. 우선 1백 가구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차츰 5백 가구 1천 가구로 늘려야죠.”
 
물론 아직 갈길이 멀다고 했다. 갖춰야 할 일이 많다고 했다. 우선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단지와 제반 시설 구축이다. 분명 어느 선까지 혼자 일구겠다고 했다. 그러나 좋은 일일수록 함께 이루는 것이 중요하므로, 때가 되면 정부는 물론 다른 기업과 사회의 동참을 추구하겠다고 했다.
 
김 회장께서는 손이 크다. 때마다 각처에 갖가지 방법으로 환원한 것이 그 얼마일까 헤아리기 어렵다. 베풂과 나눔에 관한 한 이미 주변에 정평이 나있다. 그의 은퇴 후 계획이 일이라 했다. 그 일이 바로 사회 환원이요 봉사다. 당당하게 호쾌하게 돈을 벌고 아름답게 활용하는 그를 누구라서 존경하지 않으랴.   
 
※ 이 프로젝트는 <자카르타 경제신문>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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