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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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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4,813회 작성일 2018-03-05 00:00

본문

 
 
쉽게 씌여진 시
                            시, 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어
 
대학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출처: 윤동주기념사업회)
 
 
NOTE***************
윤동주는 우리에게 속 아린 이름이다. 부끄럽지만 삼일절을 특별한 의미를 품고 보낸 적이 없는 나는, 오늘 아침 아픈 역사의 어느 한 순간을 누구보다 절박하게 살았던 한 청년의 시를 읽는 것으로 그 시대를 기억하려 한다. ‘쉽게 씌여진 시’는 윤동주의 시 중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이고, 그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시이다. 나는 이 시가 일제에 저항하며 독립의지를 불태우는 시라는 해석을 붙이고 싶지 않다. 그저 그 시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온 몸으로 아파했던 젊은 청년의 눈물을 읽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시는 충분히 아프고 쓰라리다.
 
부모님이 보내주신 땀내 나는 학비로 현실과는 동떨어진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가는 스물 중반의 청년, 여섯 장 짜리 다다미 방에서 고작 몇 줄 시를 적는 것으로 조국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는 나약한 시인, 한없이 침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다만 시가 이리 쉽게 씌여져도 되는 것인지를 끝없이 의심하며 부끄러워하는 슬픈 시인의 천명을 읽는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무기력한 현실의 자아와 끈질긴 희망의 자아와 악수를 나누는 것으로 시는 끝을 맺는다.
모두에게 시인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시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가장 시인다운 시인, 모두의 가슴을 흔들며 삶을 시로 보여준 시인. 우리는 윤동주를 가진 행복한 사람들이다.
 
: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에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나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 후, 일본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이후 1942년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옮겼으며 1학기를 마치고 귀향하려던 중에 항일운동을 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1943년 7월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2년형을 선고 받았고, 고문 후유증으로 1945년 2월 16일에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채인숙 /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라디오와 TV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1999년 인도네시아로 이주하였고, 인도네시아 문화 예술에 관한 칼럼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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