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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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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5,184회 작성일 2017-09-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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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위의 사랑
                                시. 차창룡
 
 
모든 사랑은 벼랑 위에서 시작되더라, 당신을 만나고부터
벼랑은 내 마음의 거주지. 금방 날아오를 것 같은 부화 직전의 알처럼
벼랑은 위태롭고도 아름다워, 야윈 상록수 가지 붙잡고
날아올라라 나의 마음이여, 너의 부푼 가슴에 날개 있으니,
 
일촉즉발의 사랑이어라, 세상은 온통 양귀비의 향기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당신과 나는 벼랑에서 떨어지고,
세상은 우리를 받쳐주지 않았다. 피가 튀는 사랑이여,
계곡은 태양이 끓는 용광로, 사랑은 그래도 녹지 않았구나.
 
버릇처럼 벼랑 위에 돌아왔지만, 벼랑이란 보이지 않게 무너지는 법,
평생 벼랑에서 살 수는 없어, 당신은 내 마음을 떠나고 있었다.
떠나는 이의 힘은 붙잡을수록 세지는 법인지.
 
모든 사랑은 벼랑 위에서 끝나더라, 당신을 만나고부터
내 마음 항상 낭떠러지였다. 어차피 죽을 용기도 없는 것들아,
벼랑은 암시랑토 않다는 표정으로 다투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출처: 벼랑 위의 사랑 (민음사)
 
 
NOTE **********
“승가에 귀의하기 직전에 원고를 정리했습니다. 앞으로 어떤 시를 쓸 수 있을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시집을 사랑하는 어머니께 바칩니다.”
 
시집 서문에는 시인의 자서가 적혀있다. 시집을 펼치기도 전에 마음 한켠이 먼저 저려오기 시작한다.
 
‘벼랑 위의 사랑’은 아름답고 처연하고 위태롭다. 시인은 낭떠러지에 서서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사랑을 했다. 길이 끊어지는 곳, 길이 될 수도 없는 곳이었던 벼랑 위에서의 사랑은 지극하였으나 늘 일촉즉발이었다. 벼랑에서 뛰어내리면 만나는 계곡은 태양이 끓는 용광로와도 같은데, 그럼에도 사랑은 녹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사랑은 벼랑 위에서 끝나더라는 한숨과 탄식을 내뱉으며, 마지막 사랑이었을지 모르는 당신을 떠나 보낸다. 떠나는 이의 힘은 붙잡을수록 세지는 법이란 것을 씁쓸하게 깨달으며 속수무책 이별을 당한다. 그리고 암시랑토 않다는 표정으로 다투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는 벼랑 앞에서 당신과 나의 사랑이 얼마나 작고 사소한 것이었나를 생각한다.
 
시인은 속세의 위태로운 사랑을 끝내고 지금쯤 품을 헤아릴 수조차 없는 신의 사랑을 만났을까. 세속에 몸을 맡기며 사는 우리는 하찮은 이유들로 마음을 상하고, 주고 싶은 사랑과 받고 싶은 사랑의 차이를 가늠하는 일에 급급하느라 정작 사랑할 시간들을 놓치고 만다. 오늘도 죽을 용기도 없이 여전히 벼랑에 서서 야윈 상록수 가지만 붙들고 서 있다.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카피라이터, 라디오와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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