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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바띡, 느린 영혼의 여행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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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경의 잘란잘란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730회 작성일 2017-08-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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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띡의 현대화 (20 ~ 21세기)
 
사공 경 / 한인니문화연구원장 
 
*무단복제 금지
 
지난 칼럼, 네덜란드 바띡 시대에서 알 수 있듯이 1800년대 말부터 인도네시아 바띡은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바띡 수요자가 자바인 외에 유럽인, 중국인, 인디셔(인도네시화 유럽인), 아랍인이 참여하면서 다양한 바띡 디자인이 나오게 되었다. 또한 1920년에 화학 염료의 등장으로 염색기법과 색상이 다양해지고 작업시간이 단축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계 후예(2세 이후)인 뻐르아낙깐(peranakan) 들이 바띡의 주요 고객이 되면서 바띡의 산업화는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로써 1890-1920년대까지 바띡은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산업이 되었다. 그 뒤 세계경제공황,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바띡 산업은 침체 되었다가 독립 후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뻐르아낙깐: 중국어나 중국문화를 알지 못하는 인도네시아화 화교 집단으로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성공하였다.)
 
바띡 사랑, 초대대통령 수카르노 Sukarno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수카르노는 바띡에 대한 애정이 컸다. 그는 독립의 상징으로 인도네시아인 들의 정체성이 담긴 바띡을 부각시켰다. 전쟁과 파괴, 민족주의의 대두 및 식민지배 체제의 붕괴, 그리고 치열한 경쟁에도 불구하고 자바의 바띡은 많은 신생독립 국가의 예술과 공예처럼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상복으로 바띡을 착용하기 시작한 것도 독립 이후의 일이다.
 
수카르노 대통령은 여성 정장은 바띡 까인빤장(Kain Panjang, 긴 치마)과 끄바야(Kbbaya, 브라우스), 그리고 슬렌당(Selendang, 숄)이라고 선언하였다. 허나 정작 남자들은 현대식 정장을 입어야 과거에 그들을 지배했던 서양인들과 동등해진다고 믿었다. 그는 전통복장을 착용하면 식민지 시대에 서양인들에게 굽실거리는 것이 연상된다고 말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바띡 사랑에도 불구하고 바띡을 착용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1955년에 GKBI (Gabungan Koperasi Batik Indonesia)라는 바띡 협동조합을 설립하였다. 이는 바띡 천을 단일 수입하는 유통 업체로 자바 상인을 보호하였으며 바띡 산업을 육성시켰다.
 
하르조나고노(K.R.H.T. Hardjonagono) 바띡 인도네시아, Batik Indonesia
 
하르조나고노(이하 하르조노, Hardjono)의 본명은 고띡스완(Go Tik Swan,1931.5~2008.11) 이다. 그는 뻐르아낙깐(peranakan)으로 솔로에서 약 1,000 명의 장인예술가를 거느린 바띡 기업가인 외할아버지 집에서 자라면서 장인예술가들에게서 다양한 전통 자바이야기, 인형극, 전통 노래, 자바 춤을 배우게 된다. 수카르노 대통령은 우이대학(UI, Universitas Indonesia) 학생이었던 그가 개교기념일 때 대통령궁에서 춤을 추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수카르노는 1955년 그에게 지역적인 특성을 초월한 범국가적인 “바띡 인도네시아, Batik Indonesia”를 개발하도록 독려한다. 그는 솔로로 돌아와 역사와 철학을 포함한 바띡에 대한 모든 것을 연구했다. 솔로의 왕족과 친한 하르조노는 빠꾸부오노 12세 왕 (Susuhunan Pakubuwono XII)의 어머니에게서 대대로 내려오는 바띡 문양과 예술적 기법을 전수 받게 된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희귀한 바띡 패턴이나 전통적인 패턴의 본질적인 특성이나 의미를 잃지 않고 더 깊게 연구하고 개발하였다. 통일성, 내셔널리즘, 낭만주의가 반영된 ‘‘바띡 인도네시아“는 세계 2차 대전으로 인해 침체된 바띡 시장을 활성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로써 바띡은 1960년대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산업이 되었다.
 
그가 개발한 패턴은 솔로-족자 바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갈색, 청색 및 황백색만이 아니라 밝은 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또한 중부자바 전통문양과 해안바틱의 색상과 발리에서 영감을 얻은 싸우는 공작 혹은 불사조 형상으로 "바띡 인도네시아"라 불리는 새로운 패턴이 창조되었다. 독립 이전에는 바띡을 ‘’자바의 영혼“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자바적 색채가 짙었으나 “바띡 인도네시아”는 자유롭고 통일 된 인도네시아의 상징이 되었으며 미학적으로도 잘 조화를 이루었다. 이는 다양성 속의 통일을 지향하는 국가적 모토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마침내 바띡은 자바만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인 들의 아이콘이 되었다. 하르조노의 영감과 수카르노대통령의 의지가 없었다면 “Batik Indonesia”는 현실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띡의 제도화, 2 수하르토 Suharto 대통령
 
‘개발의 아버지’라 불리는 수하르토는 대통령은 영부인과 함께 바띡을 인도네시아인 들의 삶의 일부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공식 행사시 서양식 정장과 검은 색 넥타이 대신에 바띡 셔츠로 바꾸겠다고 선언하였다.
 
이후 공식적인 행사에서 남성들은 서양식의 답답한 디너 재킷이 아닌 편한 바띡 셔츠를 입게 되었다. 바띡의 상업화에도 큰 역할을 한 수하르토 대통령은 1971년 바띡을 공무원 복장으로 규정하여 제도화함으로써 바띡을 통해서 인도네시아인 들의 일체감을 인식시켰다.영부인 띠엔(Tien) 여사는 바띡 디자인에 새로운 패션을 시도하였고, 정계 부인들의 중요 모임에 단체복을 만들어 입도록 격려하였다. 솔로의 망꾸느가라(Mangkunegara) 왕궁에서 성장한 띠엔 여사는 귀족들을 위해 만들어진 갈색 바띡을 선호했다.
 
 
바띡의 개척자, Iwan Tirta 이완 띠르따 (Iwan Tirta, 1935. 4~ 2010. 7)는 세계적인 바띡 패션 디자이너이다. 그는 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우이대(UI), 미국 예일대학(1964년)에서 법을 전공했고 유엔본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는 1962년부터 바띡 컬렉터인 어머니와 함께 바띡 작업을 시작한다. 록펠러재단의 연구자금을 받고 1960년 대 후반 솔로에서 전통무용을 연구하던 중 자바 문화에 매료되어 1970년 뉴욕에서 완전히 돌아와서 자카르타에 바띡 작업장을 세우고 바띡 디자이너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1966년, 뉴욕에서 실크에 바띡 기법을 적용하는 것을 연구한 그는 자카르타에 오자마자 실크바띡을 시도함으로써 고품질의 바띡을 생산하게 된다.
 
이는 다양한 레퍼토리와 고도의 염색술이 발달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아울러 그는 바띡의 디자인, 모티프 및 제조 과정을 깊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1960년대 후반 국제노동기구(ILO)의 후원을 받아 현대적 디자인으로 다각화할 수 있었다. 띠르따는 바띡에 관한 저명한 몇 권의 저서도 저술하였다. 그는 1970년대~1980년대에 새로운 분야의 바띡 디자인을 개척하는 사람이 되었다.
 
1930년 때부터 바띡을 생산한 바띡 끄리스(Batik Keris)는 바띡 디자인 대회를 개최하여 현대적인 바띡 디자인의 개발에 일조하였다. 이완 띠르따는 1972년 바띡 끄리스 (Batik Keris)에서 주최한 디자이너 대회에서 수상을 한다. 이를 계기로 그는 바띡계에서 또 한 번 주목을 받게 된다.
 
1980년에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과 낸시 레이건(Nancy Reagan) 영부인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을 때 그가 디자인한 바띡을 착용하였다. 1994년 보고르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세계 지도자들이 그의 바띡 셔츠을 착용하면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또한 넬슨 만델라도 그의 고객이 되었다. 그는 다양하고 풍부한 디자인, 고도의 염색기법과 기술적인 완성도로 인도네시아 바띡을 세계의 정상에 올렸다. 그는 잡지 및 패션쇼를 포함하여 국제 패션 업계에서 바띡 디자인을 홍보하는 데 널리 인정받았다.
 
 
알리 사디킨(Ali Sadikin) 주지사와 소매의 바띡
 
1976년, 전 자카르타 주지사(1966년~1977년) 알리 사디킨(Ali Sadikin)이긴 소매의 바띡을 공식적인 행사에서 남성정장으로 인정하는 조례를 만들어 공표하였다. 이를 전역에서 받아들이면서 바띡 산업은 더욱 활성화가 되었다. 처음에는 긴 소매 바띡 셔츠가 까인빤장 천, 즉 긴치마 천으로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처음부터 남성셔츠 용으로 패턴, 재단되어서 생산되고 있다.
 
브라마 띠르따 사리 Brahma Tirta Sari 스튜디오
 
바띡은 1970년 대 이후 아구스 이스모요(Agus Ismoyo)와 미국인 니아 플리암(Nia Fliam) 부부가 족자에 설립한 브라마 띠르따 사리 스튜디오를 중심으로 순수예술로도 크게 발전한다. 이전보다 철학과 상징성을 더 심오하게 바띡에 그려 넣었으며, 바띡을 평면이 아니라 입체적인 작품으로 만들었다. 입체적인 작품으로는 주로 어머니의 자궁이나 품속을 상징하는 작품이 많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1976년부터 프린트 바띡이 생산되었고 1970-1980년 바띡산업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1980년부터 구세대 패션이라는 인식으로 주춤하다가 2000년대부터는 말레이시아와 바띡 오리지널 소유권 문제로 분쟁을 하게 된다.
이 분쟁을 계기로 인도네시아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이 바띡에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바띡의 가치를 알고 높이 평가하게 된다.
 
드디어 2009년 10얼 2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도요노 대통령은 2010년에 10월 2일을 “바띡의 날”로 제정하면서 매주 금요일에 바띡을 착용하기를 권유한 이래 바띡을 입은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이후 2016년 조코위 대통령은 매주 금요일을 전 국민이 바띡을 입는 날로 제정한다. 이처럼 인도네시아 바띡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전통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전통 문화인 것이다. 이제 바틱은 자바의 영혼이 아니라 인도네시인 들의 아이콘이 된 것이다.
 
현재 바띡은 실용성과 예술성으로 인해 패션상품으로 유럽, 미국, 아시아 등 전 세계로 수출되고 있으며 순수 예술로도 크게 발전하면서 최근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참고문헌
국제학박사학위논문, 인도네시아 바틱: 지역문화에서 국민문화로 확대 (이지혁, 2014)
The Globalization of a Craft Community, by Michael Hitchcock&Wiendu Nuryanti
Batik, Fabled Cloth of Java, by Inger McCabe ElliotIwan Tirta 1996
사진출처 Google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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