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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자바에서 시를 읽다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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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285회 작성일 2017-04-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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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나무가 있던 골목
                                                         시/ 김소연
 
 
 언덕 아래 사람 사는 불빛이 차오릅니다 흰 입김을 앞으로 내밀면서 언덕을 내려오는 당신, 한쪽 손에 들려진 짐꾸러미를 잠시 내려놓고, 한쪽 어깨에 짊어진 가방을 그 옆에 내려놓고, 당신은 나를 올려다 봅니다
 
 기다리던 택시가 오고, 당신은 가방이랑 짐꾸러미를 챙겨들고 차 문을 닫습니다 짐을 챙기느라 당신을 미처 챙기지 못한 당신, 내 옆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며 당신이 서 있습니다 깜빡깜빡 졸음에 빠져듭니다
 
 깨우려다 그만 둡니다 내 주먹마다 흰 밥이 피고 그 밥알들이 환하게 저물어 다 떨어질 때까지, 그리하여 당신의 이불이 되어줄 때까지, 나는 혼자 뜨거운 차 한 잔을 오래 마시며 이 겨울을 지나가고 싶습니다
 
 눈이 옵니다 저 저녁을 다 덮는 흰 이불처럼 눈이 옵니다 발걸음 소리가 들립니다 당신은 짧은 길을 길게 돌아서, 찬 기운 가득한 빈집에 들어가 버리고, 당신이 남긴 당신과 나는, 이 눈을 다 맞고 서 있습니다
 
 봄이 올 때까지 주먹을 펴진 않을 겁니다 내 주먹 안에 당신에게 줄 밥이 그릇그릇 가득합니다 뜸이 잘 들고 있습니다 새 봄에 새 밥상을 차리겠습니다 마디마디 열리는 따뜻한 밥을 당신은 다아 받아먹으세요
 
(시 출처: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민음사 2006)
 
 
****** 언덕 아래로 불빛이 켜진다. 겨울을 견디느라 지친 사람들이 추운 밤을 건너갈 불빛을 밝히며 사랑하는 이를 기다린다. 누군가는 그 시간에 이별을 겪는다. 택시가 오고 그 사람은 이미 짐을 가지고 떠나 버렸는데, 그러나 ‘짐을 챙기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당신’이 그림자처럼 아직 내 옆에 서 있다. 당신이 두고 간 ‘당신과 나’는 눈을 맞으며 겨울을 지나고 있다. 나는 눈 내리는 날의 고요를 견디며 당신과 나를 끌어안고 겨울이 지나기를 기다린다. 목련이 피어나는 봄이 올 때까지 당신을 위해 따뜻한 밥상을 준비한다. 손에 따뜻한 밥을 쥐고 오래도록 당신을 기다린다. 시를 읽으며, 느닷없는 이별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으나 아직 그림자조차 떠나보낼 수 없는 모든 당신들을 아프게 떠올렸다. 4월 16일, 세월호가 바다에 가라앉은지 3년이 되는 날 아침이었다.
 
채인숙/ 시인.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카피라이터, 라디오작가,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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