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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입 속의 검은 잎 - 기형도, 문학과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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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817회 작성일 2017-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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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나의 힘
                        시/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드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새벽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구나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 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NOTE
 
1989년 3월 7일 탑골공원 뒷편 작은 극장에서 기형도가 죽었다. 그의 나이 스물 아홉. 그때 나는 문학을 하겠다며 마악 대학에 입학한 열 아홉살이었다. 내가 어리둥절하고 겁먹은 눈빛으로 낯선 서울에 적응하려 발버둥치던 그 시간에 서울의 뒷골목에서 죽어버린 시인. 우울한 유년과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고독과 죽음에 살을 댄 우울과 허무의 시를 썼던 젊은 시인의 죽음은 그가 남긴 시만큼이나 내게 그로테스크하고 낯선 것이었다.
 
지난 3월 7일. 그의 기일에 누렇게 색이 바랜 그의 시집을 몇년 만에 다시 꺼냈다. 제목마다 동그라미를 쳐놓고 몇날며칠을 읽고 또 읽었던 시들이 명조체로 누워 있었다. 마치 나의 오마주인 냥 그의 시를 품고 살았던 시간이 되살아났다. 최루탄이 쏟아지던 거리에서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던 우울한 개처럼 답답한 탄식을 쏟아내던, 아직 채 스무살도 되지 않은 내가 보였다. 그도 그 거리 어디쯤에서 이 시를 썼으리라.
 
대체 얼마나 많은 상념에 시달렸기에 그는 마음 안에 그토록 많은 공장을 세우고 기록하였던 것일까. 어리석은 탄식을 내뱉으며,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제 청춘을 저녁 거리에 세워 두었던 것일까. 게다가 희망의 내용이란 질투 뿐이라니, 그에게는 사랑조차 잔인하고 저주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기형도는 혹시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했던 걸까….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가슴을 찢는 마지막 문장을 토해놓았다. 너무 어렸고, 너무 어리석었고, 너무 무모했고, 너무나 많은 좌절에 무릎을 꿇어야 했기에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었던 시절. 마치 유서처럼 남겨놓았던 그의 시 ‘빈 집’을 읽으며 나의 유일했던 시인을 추억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춧불들아, 잘 있거라 /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글쓴이: 채인숙 /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라디오 작가와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한,인니 문화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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