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이승희 - 문학동네) > 전문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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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이승희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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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8,253회 작성일 2017-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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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비는 내리고
                   시/ 이승희
 
봄비라는 말 속에서 너를 만났다. 지친 뒤척임만 가득한 눈을 보며 그 속으로 살러 가고 싶었다. 낭떠러지 같은 말 봄비 속에서 너와 사랑을 했다. 비명도 없이 절벽을 뛰어내리던 꿈. 너와 살고 싶은 저녁이 봄비라는 말 속에 있다. 천국이 있다면 봄비라는 말 속에서부터 시작될 거라고 나무들이 키를 키우며 책처럼 펼쳐지던 날 있었다. 아주 오래전 거짓말처럼 또 다른 생이 시작되었고, 단절은 나를 멈추게 하지만 절벽은 나를 뛰어내리게 하였다고 나는 기록한다. 나의 절망은 비루하였고, 꽃이 피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날들이 네가 떠나간 흔적처럼 남았다. 
 
봄비를 맞으며 골목을 지나가는 연인들. 저들은 서로를 버티느라 또 얼마나 힘겨울 것인가. 내가 없이 봄비가 내리는 저녁. 
 
 
NOTE 1
 
자카르타에는 날마다, ‘한때 소나기’가 퍼붓는다. 떠나온 나라에선 지금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승희의 시집을 다시 펴든 이유는 그것이다. 지금쯤 봄비가 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모든 새로운 것들이 다투어 피어나도록 봄비가 내리는 날에, 천국이 있다면 봄비 라는 말 속에서 시작될 거라고 믿었던 청춘이 있었다. 아직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젊은 날의 사랑은 위태로운 낭떠러지를 뒤에 두는 것이었겠지만, 시인은 사랑하는 이의 봄비 속으로 들어가 살림을 차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봄비를 맞은 나무들이 키를 키우듯 사랑했던 시간들의 이야기를 책처럼 펼쳐놓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렇듯 꽃이 피는 이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절망과 단절의 시간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사랑이 지나버린 후의 모든 생은 비루하다. 흔적만 남은 사랑 앞에서 절망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나의 비루한 사랑은 천지에 피는 봄꽃을 보아도 지워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네가 없어서 나 역시도 사라져버린 저녁에 봄비가 내린다. 모든 절망이 잠들고 나니 비로소 다른 이의 절망이 보인다. 봄비를 맞으며 골목을 지나가는 저 연인들. 저들은 서로를 버티느라 또 얼마나 힘겨울 것인가.
 
 
NOTE 2
 
시집의 표지가 한여름 화단 속의 맨드라미처럼 붉다. 붉고 아름다운 표지 속에 시인은 처연하고 적막한 한 생을 감추어 두었다. 맨드라미처럼 붉게 타올랐으나 이제는 내 것이 아닌 한때의 꿈들을 쓸쓸히 내려다보며 비명을 지르고 서 있는 시들을 읽는다.
 
어쩌면 사는 일이란 게 처음부터 상처 나는 일이었다고, 맨드라미는 그 말을 하고 싶어서 그리 붉게 피어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가도 시인은 맨드라미의 붉은 손을 잡고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가고 싶다고, 그리하여 내일 싸울 일을 조금 남겨두고 싶다고 생각한다. 늙는 일도 아직은 살아있으니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늙어가는 일에 온 마음을 다할 거라 늙은 토마토처럼 고요히 생각한다.
 
그러니 맨드라미야. 죽을 힘을 다해 꽃을 피우는 일은 못된 것이다. 죽을힘은 오직 죽는 일에만 온전히 쓰여져야 한다.
 
시집에서 인용
 
글쓴이: 채인숙 /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라디오 작가와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한,인니 문화연구원 부원장으로 일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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