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 지성) > 전문가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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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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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숙의 독서노트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6,879회 작성일 2017-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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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 아픈 후회
 
                                 시/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신상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NOTE

젊었고, 두려울 것이 없었으므로, 마땅히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랑했어야 옳았다. 황지우의 뼈아픈 후회는 그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는 것. 어떤 연애로도 내 마음 속 깊은 폐허까지 드러내놓고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그 누구고 나를 믿지 않고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사랑이라고 믿었던 자리는 오히려 폐허로 남았다. 그리고 사랑이라고 믿었을지 모르는 것들은 모두 상처가 되어 부서진 채 곁을 떠났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또 먼먼 어느 날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아낌없이 사랑한 자들은 어리석은 미련을 두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삶의 어느 순간에 주정뱅이의 갈짓자 걸음처럼 갈 길을 모르고 헤매던 때가 있었기 마련이겠지만, 그럼에도 사랑때문에 다시 벌떡 일어나 제 걸음을 추스리지 않았던가. 비틀거리며 걷는다고 손가락질을 받았던들 어떠랴. 손가락질을 하고 서 있던 그도 실은 가까스로 제 몫의 사랑을 견디느라 밤마다 홀로 외롭게 술병을 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라건대, 부디 당신도 모르는 새 부서지고 찢어져서 떠난 누군가가 남지 않기를. 목숨을 걸고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해 뼈아픈 후회로 남지 않기를. 더 사랑하고, 더 이해하고, 더 양보하고, 더 안아주지 못한 후회로 울지 않기를. 사랑하는 이를 마음에 품는 일이 당신을 살게 하는 일이기를, 그리하여 당신도 누군가의 살아가는 힘이 되기를. 
 
 
글쓴이: 채인숙 /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라디오 작가와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한,인니 문화연구원 부원장으로 일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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