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사소한 기억의 순간들
페이지 정보
채인숙의 독서노트
본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 앤드루 포터 / 21세기 북스
…… 로버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콜린이 수련의 생활을 시작하고 2년째, 그러니까 수련의 생활이 끝나가던 해였다. 사실 콜린의 동료를 따라간 저녁 파티 자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 일을 모르고 지날 수도 있었다. 콜린의 동료는 젊었을 적 물리학자였다. 그는 우리에게 로버트가 림프종으로 죽었다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먹고 있을 때 말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나의 표정이 어땠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충격과 슬픔을 숨기지 못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콜린이 잠시 뒤 양해를 구하더니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콜린이 아직도 그날 밤 바에서의 일 - 로버트와 내가 손을 잡고 있던 모습 - 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차 안의 침묵 속에서 나는 거리감을, 몇 년에 걸쳐 서서히 우리집의 어둠 속에서, 우리 사이에서 자라고 있던 거리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뜰로 나가 통곡했다. 나는 지금도, 콜린이 내 통곡 소리를 들었는지 알지 못한다.
NOTE
밤에 잠자리에 누워 불 꺼진 천장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문득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어떤 순간의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 지금은 어디 사는지조차 모르고 이름도 가물가물한 어릴 적 친구와 바닷가 등대에 서서 미래에 대한 막연한 절망을 이야기하던 어떤 저녁이나,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국어 선생님께 드릴 꽃다발을 사기 위해 소도시의 시장을 걸어 들어가던 어느 일요일 오후의 겨울 햇빛이나, 정작 당사자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데 친구의 옛 애인이 두르고 있던 머플러의 독특한 색깔이나 문양이 문득 떠오르는 식의 순간들 말이다. 그런 기억들은 대체로 내 인생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던 아주 무의미하고 사소한 순간들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 순간순간의 기억들이 현재의 내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까…?
앤드루 포터는 마음 속에 묻어 두었던 10개의 기억들을 끄집어 내어 사람의 기억이 현재의 삶과 주변의 관계들에 미치는 영향을 담백하고 담담하게 풀어나간다. 어쩌면 무겁게 느껴질지도 모르는 주제들이 의외로 가볍고 간결하게 읽힌다. 물론 책 속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기억들은 나의 것처럼 밤에 침대에 누워 문득 떠올리다가 마는 짧고 사소한 순간의 기억은 아니다.
12년 전 여름에 잔디를 깎다가 친구의 죽음을 보았고 청년이 되어서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하는 <구멍>의 나, 열 세 살이던 되던 해에 부모의 결혼 생활이 조각나는 모습을 지켜 보았던 <코요테>의 소년,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 서른 살 많은 물리학 교수를 사랑했던 헤더가 세월이 흐른 후 남편 콜린과 함께 나간 파티에서 우연히 그 교수의 죽음을 전해 들은 날의 통곡(이 글머리에 그 광경을 옮겨 놓았다)을 읽으며 이야기 켠켠마다 가슴이 저릿해진다. 상처로 남아있는 그 기억들을 어루만질 용기조차 없이 살아 온 주인공들의 여린 마음과 그들이 겪었을 불안에 대한 연민이 밀려드는 것이다.
각각의 주인공들은 그 기억들 때문에 주변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아슬아슬하게 갇힌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들은 자신과 서로를 위해 그 기억들을 깊이 묻어두었고, 그 기억들과 마주 서지도 못하고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아왔다. 그러나 그 기억들이 의외로 자신에게서 좀체 떠나지 않는 것들이었고 순간순간 삶을 지배해 왔음을 깨닫는다. 그들은 비밀처럼 누군가를 질투해 왔고, 그리워했고, 미워하고 의심을 품었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그런 감정에 절망하며, 그것을 애써 숨기고 살아왔다. 그 기억이 드러나버리는 순간, 지금까지 유지해 온 이 관계들조차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 자신이 먼저 무너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어느 날 마치 정해진 시나리오를 읽어야 하는 배우처럼 그 기억들을 하나씩 끄집어 내고야 만다.
각각의 주인공들은 그 기억들 때문에 주변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아슬아슬하게 갇힌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들은 자신과 서로를 위해 그 기억들을 깊이 묻어두었고, 그 기억들과 마주 서지도 못하고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아왔다. 그러나 그 기억들이 의외로 자신에게서 좀체 떠나지 않는 것들이었고 순간순간 삶을 지배해 왔음을 깨닫는다. 그들은 비밀처럼 누군가를 질투해 왔고, 그리워했고, 미워하고 의심을 품었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그런 감정에 절망하며, 그것을 애써 숨기고 살아왔다. 그 기억이 드러나버리는 순간, 지금까지 유지해 온 이 관계들조차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 자신이 먼저 무너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어느 날 마치 정해진 시나리오를 읽어야 하는 배우처럼 그 기억들을 하나씩 끄집어 내고야 만다.
"누구에게든 하나쯤 있기 마련인 '지워지지 않는 어떤 순간'을 회상하고,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그 기억에 아파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들을 편안한 언어로 그려냈다. 작가는 우리 주위에 흔히 있을 법한 친근한 인물들을 통해 상처나 아픔으로 남은 기억이라고 해도 그 역시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소중한 과거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어느 매체에서 읽은 책에 대한 소개의 문장처럼, 주인공들은 마침내 그 기억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기억 속에 남은 자신과 상대의 상처를 이해한다. 그리고 책을 읽는 우리도 그 상처의 과거로부터 천천히 동참해 왔으므로, 자잘한 비밀의 입자들을 감추며 살아가던 주인공이 어느 날 맞닥뜨린 기억 앞에 통곡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바로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기어이 들고 마는 것이다. .
글쓴이: 채인숙 / 2015년, <실천문학>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라디오 작가와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다. 한,인니 문화연구원 부원장으로 일을 돕고 있다.
추천0
- 이전글사라진 손바닥- 나희덕 (문학과 지성) 17.01.19
- 다음글어른이 된다는 것 17.01.06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