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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창작 클럽 (203) 미국 동부 여행, 중국 이민자들과 베트남 피난민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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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 창작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12,190회 작성일 2022-07-17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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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동부 여행, 중국 이민자들과 베트남 피난민들의 이야기
 
조인정
 
인천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비행기 안, 10시간이 넘는 지루한 시간 동안 어떤 영화를 보면 좋을까? 화면에 보이는 영화들을 손가락으로 넘기고 넘겨본다. 고심 끝에 고른 영화는 미국 뉴욕 맨해튼 워싱턴 하이츠라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뮤지컬로 꾸며낸 《인 더 하이츠(In the Heights)》다. 열렬한 뮤지컬 팬인 내가 어떻게 뮤지컬 영화를 지나치겠냐 만은, 내가 이 영화를 보기로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가 푸에르토리코 · 쿠바 등 라틴 아메리카에서 온 ‘이민자들’의 생활을 담았다는 데에 끌렸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1학년 홀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나는 사회 주류집단이 아닌 ‘외부인’으로써 ‘다름’과 ‘낯설음’을 피부와 가슴으로 느꼈었다. 외부인으로서 느끼던 장벽과 두려움, 소외감이 내 자신을 더욱더 꽁꽁 싸매도록 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토록 마주한 어려움이라는 허들을 하나하나 지나며 더욱 단단해지고, 성숙해 짐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이민자 가정의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의 경험이 내 경험, 내가 느낀 복잡한 감정들과 닮아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이민자들의 스토리는 내게 언제나 큰 공감으로 내게 다가왔다.
 
미국 여행 중 찾은 이민자들의 공간
지난 6월 16일~7월 5일 약 20일에 걸쳐 우리 가족은 아빠 회갑 축하 기념으로 미국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의 첫 10일 동안은 워싱턴 D.C., 버지니아, 뉴욕에 걸쳐 미국 동부지역을 여행했고, 그 후 10일간은 시애틀과 캐나다 밴쿠버를 걸친 서부지역을 여행했다. 동부에서의 여행은 나의 단짝 친구인 앤디가 가이드를 해주었다. 앤디는 버지니아 알링턴(Arlington)에서 태어나고 자란 제2세대 베트남계 미국인이었는데, 그와 함께 우리는 이민자들 삶을 느낄 수 있는 몇몇 곳을 방문했다. 과연 우리가 미국에 있는 건지 헷갈리게 했던 장소, 이민자들의 발자취와 시간이 만들어 낸 장소. 그 가운데 가장 가장 인상 깊었던 두 곳 – 워싱턴 D.C. 차이나타운과 버지니아주의 이든 센터(Eden Center) - 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1-1. 워싱턴 D.C.의 차이나타운에서의 점심
아빠는 한국인은 밥심이라고 하셨다. 집에서는 삼시세끼를 밥과 반찬으로 챙겨 드셨기 때문에, 여행 전부터 “미국에 가면 빵이랑 고기만 먹고 어떻게 버티지?”하고 걱정하셨다. 이런 아빠를 고려해 하루 식사 중 꼭 한 번은 가능한 한 느끼하지 않고, 뜨끈한 국물과 밥이 있는 식당을 찾아갔다.
 
백악관과 워싱턴 모뉴먼트(Washington Monument)를 구경하고 20분쯤 걸어가니 초록색, 빨간색으로 치장한 거대한 중국식 대문 '패루(牌樓)'가 떡하니 서 있었다. 마치 미국과 중국의 경계를 나누듯 우람한 체격으로 우리를 마주한 그 대문을 지나니, 한자로 쓰인 상점과 식당들이 동서남북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인 점으로 봐서 여전히 우리가 미국에 있는 것이라 느꼈지만, 상점 창문을 통해 보이는 그 안에서 일하는 아시아인들의 모습은 내가 중국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 차이나타운 입구에서 부모님과 함께
 
수많은 식당 리뷰를 찾아본 후, 우리가 찾은 식당은 ‘차이나타운 가든(Chinatown Garden)’이라는 곳이었다. 식당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우리를 중국인이라고 짐작한 웨이터는 중국어를 사용하며 우리 가족을 테이블로 안내했다. 테이블에 앉은 아빠를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빵이 아닌 밥을 먹을 것에 아빠는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탱글탱글한 게살 스프가 곧 애피타이저로 나왔고, 그 스프를 음미하며 아빠는 앤디에게 질문했다.
 
▲ 애피타이저로 나온 게살 스프
 
“어떻게 워싱턴 D.C.에 차이나타운이 생긴 걸까?”
 
#1-2. 차이나타운: 차별과 배척을 겪으며 형성된 곳
학교 역사수업 시간에 배운 것이 어렴풋이 생각나기는 했다. 1949년 캘리포니아에서 골드러시가 벌어지자 미국이 중국으로부터 저임금 노동자 쿨리(Coolie, 苦力)를 고용하여 대륙횡단철도를 지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다면 미국 동부에 중국 이민자들이 발을 들이게 된 이유도 이 때문일까? 그리고 어떻게 동부지역의 여러 주 가운데 워싱턴 D.C.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되게 된 것일까?
 
워싱턴 D.C. 차이나타운의 시작은 188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서부지역의 차이나타운들과는 달리, D.C.의 차이나타운은 경제활동을 위해 중국을 떠나 미국 서부를 거쳐, 동부로 건너온 100여 명의 남성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남성들은 어느 정도 돈을 모은 후 중국에 남겨진 아내와 가족들을 위해 중국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목표를 가진 남성들이었다 (National Park Service, 2020). 그들은 펜실베이니아 에비뉴 남쪽을 따라 4 1/2번가와 7번가 사이에서 생계를 위한 활동을 했고, 그곳이 D.C. 차이나타운의 시초였다. 그들 대부분은 세탁소 혹은 음식점을 운영했으나, 건물 1층에 작은 상점을 운영하여 중국 컵, 냄비, 차, 사탕 등을 팔며 돈을 버는 이들도 있었다 (Lee, 2020).
 
스프를 한 숟갈 넘기며 앤디는 말했다.
“하지만 중국 이민자들은 차별 때문에 미국의 백인 주류 사회에 낄 수 없었어요.”
 
실제로 1890년대 워싱턴 D.C.의 지역 신문이었던 <이브닝 스타(Evening Star)>의 기사를 통해 당시 차이나타운의 중국 이민자들이 얼마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 평가된 존재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들은 “달 모양 눈의 몽골인”, “초승달의 눈” 등 찢어진 눈을 가진 이국적인 존재로 비하되어 묘사되었던 것이다 (Lee, 2020).
 
“중국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은 그들을 사회의 구석으로 계속 몰았어요.” 하고 앤디는 곧이어 나온 크림새우를 부모님 접시에 나누며 말했다.
 
사회의 차별을 겪으면서도 차이나타운은 점점 더 확장했고, 1900년도 초기에는 약국, 음식점, 이발소 등을 고루고루 갖춘 하나의 커뮤니티로 DC 사회 내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는데, 1920년도 미국 의회는 “City Beautiful”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도시미화를 발표했고 차이나타운의 철거를 내세웠다. 의회가 내세운 도시미화의 목표는 링컨기념관과 국회의사당을 잇는 2km의 국립공원인 내셔널 몰 (National Mall)을 손보고, 삼각지대(페더럴 트라이앵글, Federal Triangle)를 만들어 정부 기관들을 집합시키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목표 성취를 위해 4번가와 6번가에 있는 차이나타운의 철거가 포함되게 된 것이다. 차이나타운 주민들은 권력에 대항할 만한 힘과 목소리가 없었고, 자신들의 집과 생계를 책임진 그들의 공간을 한순간에 잃게 되었다.
 
물론 차이나타운에 부동산을 갖고 있던 상대적으로 부유한 주민들은 그들의 소유지를 팔아 그 주변 교외로 이사를 가는 선택을 했지만, 그렇지 못하고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소상공인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났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고 현실에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들은 H스트리트 지역을 새로운 보금자리로 정했는데, 그곳이 우리 가족이 찾은 중국 음식점이 있는 그곳으로, 오늘날의 차이나타운이다 (Tam et al., 2022). 그리고 현재는 약 360여 명의 중국 이민자들과 그 후손들이 그곳에 남아 DC의 차이나타운의 면모와 역사를 지켜가고 있다.
 
우리 테이블에 잔뜩 차려진 크림새우, 해산물 볶음밥, 간장에 조린 생선 요리는 차이나타운의 역사를 담고 있는, 박해를 이겨낸 중국 이민자들의 강인함이 깃들려 있는 듯 진하고 풍부한 맛이었다. 그 음식들은 한국 밥상을 그리워하던 아빠의 입맛에 잘 맞아 아빠가 맛있게 밥을 두 그릇이라 비우셨다는 건 차이나타운에서의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이기도 하다.
 
#II-1. 버지니아 이든 센터의 저녁 식사
여행 9일째 저녁 우리는 버지니아주 폴스 처치(Falls Church)에 위치한 이든 센터(Eden Center)로 향했다. 이든 센터는 내가 이번 여행 중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곳 중 하나였기 때문에, “EDEN CENTER”라고 쓰인 빨간 입구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자 내 심장도 기대감에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든 센터는 내가 2018년 가을 조지 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서 교환학생을 하던 시기, 앤디와 자주 방문했으며 추억과 함께 나를 베트남 음식의 매력으로 빠지게 했던 곳이기도 했다.
 
▲ 이든 센터 입구 (O’Connell, 2022)
 
교환학생을 하기 전까지 나는 베트남 음식점을 일부러 찾아다니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든 센터 음식점에서 앤디와 소고기 퍼(phở)를 먹은 다음 나는 그 매력에 완전히 빠지게 되었다. 그날 내가 먹은 퍼의 뜨끈한 국물과 면발은 수많은 과제와 데드라인에 치이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내 가슴 속 뭉친 스트레스 응어리를 쓸어내리는 듯했다. 퍼에 빠진 그 날 이후, 나와 앤디는 DC와 버지니아에 위치한 여러 베트남 식당을 다녀왔고, 다양한 퍼를 맛보았다. 하지만 이든 센터의 퍼 맛은 단연코 최고의 맛이었다.
 
이든 센터 내는 식료품점, 빵집, 음식점, 카페, 보석상, 미용실 등 베트남어로 쓰여 있는 상점들로 뺑 둘러서 줄지어 있었다. 차를 대자마자 우리는 흐엉 비엣(Hương Việt, 베트남의 향기라는 뜻)이라는 음식점으로 향했다. 창문 너머로만 봐도 이미 식당이 손님들로 꽉 차 보였기 때문에 조금 더 빨리 발걸음을 서둘렀다. 들어서자마자 벽을 메우고 있던 상패들은 이 식당의 위엄을 증명하는 듯했고, 식당 안은 아시아계 미국인들뿐 아니라 다수의 백인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곧 창 옆의 부스에 앉았고, 앤디는 유창한 베트남 언어를 사용하며 스프링롤, 세 종류 면발의 퍼와 해물 볶음밥을 주문했다.
 
▲ 세 종류의 퍼와 해물 볶음밥
 
“여기 굉장한 맛집이구나! 심상치가 않네.” 하고 아빠는 식당 내를 쓱 살피시며 말씀하셨다.
 
퍼는 거대한 크기의 그릇에 담겨 나왔는데 우리는 저절로 “우와” 하며 탄성을 자아냈다. 앤디는 바질을 손으로 찢어 숙주와 함께 퍼 위에 올렸다. 향긋한 바질의 향이 은은히 퍼지는 퍼 국물을 드시면서 아빠는 질문하셨다.
 
“워싱턴 D.C.에는 중국 이민자들이 많았는데, 버지니아에는 어떻게 베트남 이민자들이 많은 거니?”
 
▲ 흐엉 비엣 식당에서, 우리 가족과 앤디
 
#II-2. 이든 센터: 두 차례의 피난 물결이 만든 곳
이든 센터는 1984년 개관되었지만 그 시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약 10년을 더 거슬러 오른 1975년, 베트남 이민자들이 버지니아에 터전을 마련하게 된 그해부터 살펴봐야 한다.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은 결국 공산주의의 북베트남 베트콩에 의해 함락되었고, 남부의 수많은 베트남인이 조국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미국을 향한 첫 피난의 물결을 시작한 건 남베트남을 위해 일했던 공무원들과 군 요원들이었다. 그들은 민주주의적 공화제를 취하던 남베트남 정권을 위해 자신들이 동조했다는 사실이 북베트남 정권에게 발각되면 투옥되고 고문을 당할 거라는 두려움에 피난길을 선택했다 (Blitz, 2019). 천만다행으로 첫 피난민들은 미국 사회에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사회 엘리트였던 그들 대다수는 영어를 사용할 줄 알았다는 점이 가장 큰 이점이었고, 이에 더해 미국은 베트남 전쟁 중 남베트남에 대한 그들의 갑작스러운 원조 단절과 패전에 대한 죄책감에 엘리트 피난민들을 따뜻하게 환영하고 수용했다.
 
버지니아주 알링턴(Arlington)은 엘리트 피난민들에게 최적의 터전이었다. 사이공에 살면서 도시의 삶이 가장 익숙했던 그들에게 알링턴은 워싱턴 D.C.에 맞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알링턴에서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의 주택을 구할 수 있었고, 가톨릭교회 등으로부터 정착에 필요한 다양한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일거양득이었던 셈이었다.
 
그 후 1990년대 초반까지 두 번째 피난의 물결이 일었다. 두 번째 물결은 78년도부터 90년대 초까지 꾸준히 흘렀고, 그동안 약 80만 명의 사람들이 미국에 발을 내디뎠다 (Echoes of Little Saigon, n.d.). 두 번째 피난 물결은 이전과는 상이했는데, 엘리트 계층이 주도한 첫 번째 피난과는 달리 두 번째 피난의 물결은 교육 수준이 낮고 가난한 사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은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온 “보트 피플(Boat People)”이었다. 또한 그들은 전쟁을 겪으면서, 망망대해를 건너면서, 난민캠프에서 살면서 겪은 온갖 심신의 고통과 트라우마로 인해 미국에서의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더욱이 꾸준히 유입되는 베트남 피난민들은 미국인들에게 점점 더 불편하고 불쾌한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들에게 피난민들은 ‘패전’이라는 불명예와 수치스러움을 계속해서 자각시켜 불편했고, 늘어나는 미국의 경제적 책임과 짐이라고 생각되어 불쾌했다 (Roos, 2021).
 
이미 미국에 정착한 피난민들이 있는 알링턴은 자연스레 보트 피플의 종착지였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운이 따랐는데, 당시 알링턴의 클래런던(Clarendon) 지역은 오랜 지하철역 건설 공사와 버지니아의 타이슨스(Tysons) 지역에 들어서는 대형쇼핑몰의 등장으로 시장경쟁력에 밀리면서 빈 건물들이 늘어났고 임대료는 떨어졌다. 피난민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클래런던의 빈 건물을 임대하여 식료품점, 음식점, 쥬얼리샵을 차렸다. 그렇게 클래런던은 피난민들에 의해 그들의 문화를 교류하고 꽃피우는 ‘리틀 사이공(Little Saigon)’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1979년 오랜 공사 끝에 클래런던 지하철역이 마침내 완공되자, 클래런던의 임대 가격은 급격히 솟구쳤고 단기 임대 계약을 통한 가게 운영도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Echoes of Little Saigon, n.d.).
 
피난민들은 클래런던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차로 15~20분이 걸리는 거리에 있는 (약 6~8마일 거리) 곳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시작을 했다. 그들이 새롭게 터를 잡고 경제활동 및 문화교류의 공간인 곳은 1984년 이래 ‘이든 센터(Eden Center)’로 불렸는데, 이곳은 고향 사이공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피난민들의 마음이 잔뜩 녹아 있었다. 이든 센터라는 이름은 사이공의 고급 쇼핑몰이었던 ‘이든 아케이드(Eden Arcade)’의 이름에서 따왔으며, 이든 센터의 랜드마크로 볼 수 있는 시계탑은 17세기부터 현재까지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사이공의 ‘벤탄 시장(Chợ Bến Thành)’의 시계탑에서 모티브를 따 축조된 것이었다 (O’Connell, 2016). 현재 이든 센터는 120여 가구가 운영하는 음식점, 슈퍼마켓 등으로 피난민들의 자식, 후손들이 그 문화와 뿌리를 이어가는 중요한 곳일 뿐 아니라, 베트남계 미국인들을 넘어 모든 인종의 미국인들이 즐겨 찾는 장소로써 자리매김했다.
 
앤디는 바질을 잘게 손으로 찢어 퍼에 올리면서 자신의 아버지 또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셨고, 여러 나라를 거쳐 미국으로 작은 보트를 타고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든 센터 근교의 다른 퍼 음식점에서 일했다고 했다. 교환학생 당시 앤디 집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마주했던 아담한 체구의 앤디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괜스레 짠한 마음이 들었다. 전쟁과 피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새로운 환경에서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과 노력을 쏟았어야 했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기에 말이다. 앤디는 이든 센터에 들어서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물어보지 않았으나, 나는 앤디로부터 부모님의 미국으로의 피난/이민 이야기, 베트남 역사에 대해 들을 수 있어 너무도 감사했다.
 
마치며
워싱턴 D.C.의 차이나타운과 버지니아의 이든 센터는 내게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다. 그래서 미국을 처음 여행하시는 부모님을 이곳으로 모시고 안내했다. 특히 나는 이 두 곳에서 항상 푸근함을 느꼈다. 아마 그 이유는 차이나타운과 이든 센터에서 마주하는 대다수가 아시아인이며, 그들은 어릴 적부터 내가 경험해 온 비슷한 문화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내가 친근감을 느끼기 때문이지 아닐까 싶다. 더불어 처음 이곳을 세운 분들이 미국으로 건너와 겪은 차별과 두려움을 나 또한 피부로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며, 그들이 느끼는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나 또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데서 오는 공통점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에 더해, 허름한 상점의 간판, 고급스럽진 않지만 정성스럽게 포장된 빵과 떡, 구수하고 진한 육수 냄새, 우리 시골에서 볼 법한 옛 이발소와 미장원이 정겹게 느껴져서 일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내가 차이나타운과 이든 센터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리고 자석에 끌린 듯 그곳을 다시금 찾는 이유는 두 곳 모두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더해지고 다듬어져 만들어진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오랜 역사를 지닌 곳에서,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보고 알아가는 건 그들의 인생사를 담은 빛바랜 일기장을 읽는 듯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써 내려가는 일기는 여전히 끝나지 않고 쓰이고 있다. 그곳을 처음 찾은 중국인 이민자들, 베트남 피난민들에 의해서만이 아닌, 그들의 자식, 후손들, 그리고 그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스토리를 모두 담은 일기로 말이다. 그리고 그 일기장을 넘기다 보면, 2022년 6월, 우리 가족과 앤디의 이야기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1) Blitz, M. (2019, February 25). ‘It’s A Place That Makes Me Feel Like I’m Home’: How Eden Center Became A Hub For Virginia’s Vietnamese Community. DCist.
 
2) Echoes of Little Saigon. (n.d.). History. Echoes of Little Saigon.
 
3) Lee, K. (2020, April 10). The History & Survival of Washington D.C.’s Chinatown. Boundary Stones.
 
4) National Park Service. (2020, November 2). Downtown Historic District (Chinatown) Washington, D.C. National Park Service.
 
5) O’Connell, K. A. (2016). Echoes of Little Saigon: Vietnamese Immigration and the Changing Face of Arlington. Worth Higgins & Associates.
 
6) O’Connell, K. (2022). Celebrate the Year of the Tiger at the Eden Center. Arlington Magazine. https://www.arlingtonmagazine.com/eden-center-falls-church/
 
7) Roos, D. (2021, September 1). How the End of the Vietnam War Led to a Refugee Crisis. History. https://www.history.com/news/vietnam-war-refugees
 
8) Tam, R., Fort, P., Watwe, S., & Awad, A. M. (2022, June 9). Is D.C.’s Chinatown a Chinatown in name only? WAMU 88.5 American University Ra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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