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창작 클럽 (173) 택만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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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만이 아저씨
김현숙
택만이 아저씨가 색시를 데리고 왔다
도시 아가씨를 구경하러 동네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책 세일즈맨인 아저씨는 허연 얼굴에 오똑한 코와
선한 눈으로 연신 쑥스러워 몸둘바를 몰랐다
택만이 아저씨 어머니와 아버지는
기웃거리는 이웃에 차마 들어오지 말란 말은 못하고
떨떠름한 표정과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건넌방, 다소곳이 앉아 앞머리를 길게 내린 색시는
열린 방문 안쪽으로 자꾸 엉덩이 걸음을 하였다
머지않아 결혼식을 치뤘다
읍내 예식장에 모인 동네사람들은
잔칫상보다 신부얘기에 더 정신이 팔렸다
올림머리 신부는 사팔뜨기 한쪽 눈을 가리느라
고개만 외로 돌렸다
택만이 아저씨가 아들을 낳았다
2남 4녀의 맏아들인 아저씨의 어깨가 올라가고도 남을 일이었다
며느리에 차갑기만 한 부모의 마음도 이참에 녹이고 싶었다
동네사람들은 갓 낳은 손주를 보고 온 아저씨 어머니에게
동정어린 축하를 건넸다
명절이 되자 택만이 아저씨가 아들을 안고 내려왔다
동네가 다시 시끄러워졌다
아저씨를 빼닮은 아들은 갈라진 윗입술 때문에
잘생긴 이마와 턱까지 비뚤어 보였다
아기가 웃을수록 색시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
색시는 시부모의 냉대에도 시댁행사에 빠짐없이 내려왔다
눈치 빤한 어린 아들이 싫다해도 건너뛰는 법이 없었다
예순셋이 된 색시는 얼마 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떴다
어머니의 요양병원과 아내의 암병동을 오가던 아저씨가 지쳐 쓰러지자
색시는 남편을 시어머니에게 양보하듯 먼저 가버렸다
삼개월 후 아저씨의 어머니도 아흔넷의 생을 마감하며
미련 많은 세상을 등졌다
아들의 반대로 아저씨는 색시를 서울근교에 두었고
어머니는 고향 선산에 묻었다
온 삶을 갈등 속에 줄타기하던 택만아저씨는
이제 어느 편에도 서 있지 않다
`내가 버리면 누가 데리고 살라고!’
말리는 부모에게 울부짖던 그때처럼 온전히 혼자가 되었다
물리적인 거리까지 보태준 죽음에
여전히 두 여자 사이를 오가며 가슴 칠 택만이 아저씨,
죽는 건 끝을 내는 일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가슴에 돌 하나 더 얹어놓는 일이란 걸
비로소 알았다
** 시작노트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부조리, 인간의 본성과 욕심이 만든 굴레에서 힘든 삶을 견뎌온 먼 당숙뻘인 택만이 아저씨 부부. 그들이 살아온 시간의 단편들을 몇 조각 늘어놓아 보았습니다.
아저씨는 지금 절대적인 위로가 필요한 시점이지만, 어느 누구의 어떤 행동도 위로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돌아간 이들이 다시 돌아와 지나온 삶과 다른 모습으로, 다르게 살기 전에는 말이죠.
그래도 가끔은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웃다가, 시간이 주는 망각이라는 치유법에 기대다가, 끝내 담담하게 지난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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