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언덕 포위작전> 관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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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언덕 포위작전> 관람 후기
배동선
원제
<Pengepungan di Bukit Duri>의 번역으로 <가시언덕
포위작전>이 적절하긴 하지만 영화 속 배경은 ‘Duri 고등학교’이고 실제 내용도 수적 균형이 맞지 않는 두 세력의 물리적 충돌이란 점에서
<두리고교 공성전>, <가시 돋힌 봉쇄>
같은 번역도 후보에 올랐음을 미리 밝힌다.
이 영화는 먼저 2011년의 폭동을 보여주고 그로부터
17년 후의 자카르타, 아직 그 폭동의 여파가 고스란히 남은 거의 무정부 상태의 2027년의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이 영화의 첫 시나리오가 2002년에 처음 나왔다는 점에서 1998년에 실제로 벌어져 자카르타를 1주일 이상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곳으로 만들었던 자카르타 폭동을 모델로 삼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76년생 조코 안와르 감독의 감독 데뷔가 2005년
<조니의 약속(Janji Joni)>이었으니 이 시나리오의 프로토타입은 그가
데뷔도 하기 전 20대 중반이란 젊은 나이에 나온 것인데 최근 인터뷰에서 그는 이 영화를 젊은 시절
성급히 찍었다면 마음 속에 담은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을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1998년 당시 22살이었던 그에게 온순하던 사람들이 모두 미쳐 날뛰던 자카르타 폭동은 절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조코 안와르의 말에 필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도네시아의 종족분쟁을 다룬 이 영화는 그가 충분한 기술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자칫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을 소지도 있고 모든 문화산업의 기본 규율인 SARA 즉
종족, 인종, 종교, 계층
간의 비난금지 조항을 어긴 작품으로 스크린에 오르지 못했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 종족이란 이른바 쁘리부미(Pribumi)라 부르는 인도네시아 토착민들과 대개 상권을
쥐고 그들보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생활을 하는 화인(華人), 즉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을 말한다. 실제로 1998년 자카르타 폭동 당시
수많은 화인들의 사업장이 파손되고 약탈당하거나 방화로 불탔고 많은 중국계 여성들이 잔혹하게 강간당한 후 일부는 불 속에 던져져 살해되기도 했다.
<가시언덕 포위작전>은 그 폭동 속에서 아직 고등학생이던 화인 여학생을 구하지
못한, 그래서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두 남자의 17년
후 이야기다.
시놉시스
이 영화는 1998년의 일들을 기억하는 필자 같은 이들,
특히 화인들에게는 실제로 트라우마를 일으킬 만하다. 당시 수많은 화인들이 수카르노-하타 공항으로 몰려가 타고 온 차들을 헐값으로 팔고, 당시 대목을
만나 천정부지로 가격이 뛴 항공권을 웃돈을 주고 어렵사리 구해 해외로 떠났고 안쫄 마리나 항구에 정박하고 있던 수많은 요트들은 그 소유주인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가족들을 태우고 모두 공해상으로 나가 정박항이 텅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중국의 조선족이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이듯 인도네시아의 화인들 역시 중국인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인들이다. 여기서 상징적으로 그려진 토착민과 중국계의 충돌은 당시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인종충돌, 종교충돌을 대변한다. 특히 깔리만탄에서는 다약족과 마두라족이 서로
목을 베며 치열한 종족분쟁을 벌였고 수라바야 등 동부자바에서는 군 특수부대로 보이는 닌자들이 나타나 두꾼들과 종교지도자들을 수백 명 단위로 살해했다.
▲교사 에드윈 역의 남주 모르간 우이(Morgan Oey)
남주 모르간 우이는 화인 영화배우다. 우이(Oey)란
성은 ‘위’씨의 인도네시아식 표기. 물론 현실세계에서 한 눈에 중국계임을 알 수 있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중국계라는 것이
내 눈으론 잘 구분되지 않는데 어쩌면 현지인들은 마치 우리가 한국인과 일본인들을 귀신같이 구별하듯 본토 중국인도 아닌, 현지 문화에 깊이 젖은 화인들을 간단히 알아보는 어떤 특징이나 기술이 있는 것 같다고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모르간 우이의 경우도 그가 멀끔한 양복을 입었다면 모를까 화인이라 말하지 않으면 모르겠던데.
그는 17년 전 폭동에서 강간당해 임신해 아이를 낳고 얼마 전에 죽은 누이를 위해 그때
버려진 아이를 찾으려 한다. 그 아이가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동부 자카르타의 많은 고등학교를
대체교사로 전전한 끝에 문제아들의 집합소인 두리 고등학교까지 흘러 들어온다.
학원물에서 흔히 보는 문제아들의 교화 같은
것은 이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사회가 중국계와 토착 로컬로 나뉜 것처럼 학교도 마찬가지이고 두 종족간
서로 잔혹한 린치가 오가고 그런 분위기는 폭동으로 인해 증폭되어 치명적인 대결로 치닫는다.
예전엔 중국계를 치나(China)라고 부르는데 요즘은 이 말이 혐오를 부르는 용어처럼 여겨
중국을 띠옹꼭(Tiongkok)이라 부르고 있다. 이 영화
속에서는 당연 치나라 부르다 못해 중국인들이 돼지고기를 즐겨먹고 영양상태가 로컬보다 좋다는 점에서 돼지(babi)라는
멸칭으로 부른다. 그런 중국인들을 대체로 로컬 사회에 고립된 피해자처럼 그린 것은 종족상 로컬인 조코
안와르 감독의 종족 감수성과 나름의 균형감각이 낳은 배치다.
▲빌런들의 대장, 고3 문제아 제프리 역의 오마라 에스테그랄(왼쪽)
그 상대편에는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한 열등감이 잔인함으로 표출되는 일진들의 대장 제프리가 있다. 이
영화는 두리 고등학교에 대체교사로 부임한 에드윈이 제프리와 충돌한 끝에 에드윈과 몇몇 학생들이 제프리의 일진 패거리에게 쫓기는 학원 내 폭력적인
공방전을 그린다.
제작자와 배우들
이 영화는 무려 미국 헐리우드 메이저 MGM 합작작품이다. 조코 안와르 감독의 위상이 헐리우드에서 손을 잡을 정도로 오른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과거 그의 영화에 붙었던 다른 국내 영화제작사들을 모두 물리고 아마존 MGM 스튜디오와 컴앤씨
픽쳐스 두 회사의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컴앤씨 픽쳐스(Come and
See Pictures)는 조코 안와르가 파트너 티아 하시부안이 주축이 되어 만든 자체 영화사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른바 ‘조코 안와르 사단’이라
불리는 배우들이 거의 출연하지 않았다. 과거 대부분의 조코 안와르 영화에는 그의 뮤즈 타라 바스로를
비롯한 일단의 배우들이 거의 모든 영화에 출연했다. 그러다가 지난 해
<무덤 속의 고통(Siksa Kubur)>부터는 기용하는 배우들의 스팩트럼이
훨씬 더 넓어졌는데 이번 <가시언덕 포위작전>에서는
모두 새 얼굴 일색이다. 랑가의 아버지로 출연한 키키 나렌드라(Kiki
Narendra) 만이 과거 그의 사단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워낙 많은 영화에 주-조연으로
출연하는 배우이다.
생각해 보니 엔디 아르피안(Endy Arfian)도
<사탄의 숭배자> 1, 2편에 모두 출연했으니 조코 안와르 사단의 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2001년생인 그가 사탄의 숭배자 1편에 출연한 2017년엔 실제로 고등학생이었을 텐데 이번 영화는 물론 몇 개월 전 리뷰한 올해 개봉 영화 <거데산의 재앙>에서도 계속 고등학생으로 출연해 좀처럼
졸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외에도 여주 포지션인 교사 디아나 역의 하나 삐트라샤타 말라산, 랑가 역의 파티 운루(여기까진 에드윈 교사 측), 그리고 제프리 일진 일당의 홍일점 사틴
자네타, 마음 약한 데와 다야타 등도 상황이 변하면서 함께 출렁이는 군상들의 심리를 잘 묘사했다. 특히 개그 캐릭터인 랑가의 개그가 이 심각한 스토리 속에서 매번 먹혔다.
▲출연진들.
가운데가 교사 디아나 역의 하나 말라산
성적과 전망
쟁쟁한 감독과 출연진, 제작사 등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관객 증가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무래도 17세 이상 등급으로 고등학교 이야기임에도 불구, 청소년들이
볼 수 없는 연령등급이라는 문제가 크게 작용한 것 같다. 개봉 5일차인 4월 22일 아직 관객 40만
명으로 간신히 흥행순위 13위에 진입한 상태다.
하지만 <설탕공장>도 17세 이상 관람가 영화이면서 400만 관객을 넘었으니 그것만으로는 흥행부진의 이유가 충분치 않다. 그리고
내가 이 영화를 본 4월 21일(월) 오후 5시45분 타임에 120개 좌석 규모 스튜디오에 30명 넘는 관객이 들었으니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다.
최근 로컬 애니메이선 <점보>가 엄청난
흥행몰이를 하면서 관객 증가 속도가 더욱 빨라졌는데 어쩌면 <가시언덕 포위작전>도 그런 기대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격투 시퀀스, 카메라워크 등은 매우 좋은 편. 특히 대부분의 액션 영화들이 무술 고수 또는 살인기계 같은 출연자들의 현란한 격투 장면을 보인 것과 달리 설정
자체가 무술 전문가가 아닌 출연진들이 개싸움, 막싸움을 하는 것으로 그려진 것도 꽤 흥미로운 관전포인트다. 하지만 그렇게 모두가 보통사람이라는 것이 ‘힘숨찐’ 캐릭터들이 난무하는 요즘 영화, 드라마 판에서는 감점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
물론 가장 크게 작용하는 부분은 첫째,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아동 애니메이션 <점보>가 지배하는 요즘 극장가에서 그 완전 반대편에 있는
꿈도 희망도 없는 <가시언덕 포위작전>이 충돌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둘째로는 영화의 중심 캐릭터가 화인, 중국계라는
점이다. 굳이 영화관에서도 관객들이 인종차별적 생각을 가지고 있으리라 믿지 않지만 최소한 화인들의 이야기는
우리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영화팬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인도네시아인들이 화인, 화교들을 경원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그들이 겪는 문제가 쁘리부미들의 관심사가 아닌 것 역시 분명하다.
오래된 시나리오라고 하면서도 주인공 에드윈 외에는 등장인물 대부분의 캐릭터가 그리 입체적이지 못하고 스토리의 진행 역시 긴장감 넘치는
액션과는 별도로 대체로 밋밋하다는 것 역시 감점요소가 될 것 같다.
최악의 폭동이 벌어지는 도시 한편의 학교에서 일진들과 화인 교사의 충돌이란 흥미진진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그 폭동 자체가
영화 내내 뉴스 속에서 전달되는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취급된 것 역시 조금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도시
전체를 휩쓴 폭동이 이 영화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래도 올해 기대작이었고 무려 조코 안와르 감독 작품이니 100만 관객은 넘겠지?
(2025. 4. 22)
▲매력적인 하나 말라산(왼쪽)과 일진 출연자의 두 기둥
*배동선 작가
- 2018년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
- 2019년 소설 '막스 하벨라르' 공동 번역
- 2022년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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