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기고란 2022년 인도네시아 영화제 작품상 <예전, 지금, 그리고 그때(나나)>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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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인도네시아 영화제 작품상 <예전, 지금, 그리고 그때(나나)> 리뷰
배동선 작가
카밀라 안디니(Kamila Andini) 감독의
<Before, Now & Then (nana)>는 2022년 인도네시아
영화제(FFI 2022)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촬영상, 예술상, 영상상,
음악상 등 모두 다섯 개 부분을 석권했다.
대중적 흥행은 하지 못했으므로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예술적 드라마 장르 영화를 선호하는 영화제 측의 편애가 작용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직접 이 영화를 보면 위의 수상 내용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다음 달에 2022년 인도네시아 영화산업 결산보고서를 써야 하는 입장이라 호러 장르 편향의
취향에도 불구하고 프라임비디오에서 이 영화를 뒤늦게나마 챙겨 보았다. 영화를 보고 난 후의 감상은 자칫
정말 좋은 영화를 놓칠 뻔했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좋았다.
배우들
<예전, 지금, 그리고 그때(나나)>는 제목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주인공 ‘나나’ 역의 해피 살마(Happy
Salma)가 이끌어 가는 원톱 영화이지만 지주 남편의 정부 중 하나인 이노(Ino)로
분한 라우라 바수키가 등장하며 스토리의 흐름을 바꾼다.
1980년생 해피 살마는 영화에는 2006년에 데뷔에 지금까지 약 20편 정도를 찍었지만 인도네시아에서 흔히 ‘시네트론’이라 부르는 TV 드라마에는 그보다
7년 전인 1999년 데뷔했고 연극에도 많이 출연했다. 그래서
영화감독, 연극연출로도 조예가 깊은 배우다. 이 영화에서
신뢰감 넘치는 연기로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한 것은 그런 쟁쟁한 경력과 실력을 배경으로 한다.
한편 사랑스러운 1988년생 여배우 라우라 바수키는
2008년 <축구 때문에(Gara-gara
Bola)> 영화로 영화배우협회 신인상과와 인기상을 수상하며 데뷔했고 이후 많은 영화에서 주-조연을
오가며 좋은 연기를 보였다.
특히 코로나 직전인 2019년
개봉한 <수시 수산티: 모든 것을 사랑하다(Susi Susanti: Love All)>에서 1990년대를
풍미한 인도네시아 배드민턴 영웅 수시 수산티를 연기해 FFI 2020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이번 <예전, 지금, 그리고
그때(나나)>로는 베를린 국제영화제 여우조연상 수상을
포함해 여러 국내외 영화제에서 수상하거나 후보로 올랐다. 그만큼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또 한 명 빼놓을 수 없는 등장인물은 나나의 극중 나이 든 지주 남편 다르가(Darga)로
분한 아르스웬디 브닝스와라(Arwendy Beningswara)이다.
1957년생으로 1985년 영화에 데뷔하여 지금은 자신의 영화출연 외에도 젊은 배우들에게
연기지도를 하는 그의 최근작으로는 해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자서전(Autography)>, 그리고 2023 오스카에 인도네시아
영화 대표로 출품한 <무시무시하게 맛있는(Ngeri-ngeri
Sedap)>이 대표적이다.
그는 <무시무시하게 맛있는>에서 바딱
지역의 가부장 의식에 젖은 꼰대 역할을 능청스럽게 해낸 실제 바딱 출신 연기자인데도 순다어로 만들어진 <예전, 지금, 그리고 그때(나나)>에서 능숙한 순다어로 연기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인도네시아의 지역 방언들은 한국 방언들과 달리 외국어 못지 않게 완전히 다른 언어여서 다른 지역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으므로 (그래서 이 영화에도 표준 인도네시아어 자막이 달림) 그런 게 가능한 인도네시아 배우들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고 그 속에서 아르스웬디의 중후한 연기는 더욱 빛이 난다.
그러고보니 해피 살마는 수카부미 출신이므로 당연히 순다어가 태생적으로 가능하지만 자바-중국-베트남 혼혈인 라우라 바수키의 순다어 연기도 재평가할 여지가 있다.
내친 김에 까밀라 안디니 감독에 대해서도 간략히 소개하자면 1986년생으로 2011년 <거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The Mirror Never Lies)>로 장편영화 감독에 데뷔하면서부터 장래가 촉망되는 여성감독으로서
국내외에서 많은 수상을 했다.
뛰어난 영상미와 문제의식을 영화 속에 투영해 이번 <예전, 지금, 그리고 그때(나나)> 외에 직전 작인 <유니(Yuni)>도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여성 감독인 만큼 그녀의 영화에는 여성문제에 대한 깊은 고찰이 담겨 있다. 또 다른 유명 감독 이파 이스판샤(Ifa Isfansyah)와 2012년 결혼했다.
시놉시스와 역사적 배경
영화는 추적자들을 피해 순다 지역의 한 숲길로 아기를 안고 도망치고 있는 나나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보여주진 않지만 도적떼가 그녀의 집을 위협해 남편을 잡아갔고, 나나를
빼돌려 도망시킨 아버지도 목숨을 잃는다.
영화는 곧바로 15년 후, 순다(서부자바)의 한 저택에 귀부인이 되어 있는 나나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이 많은 지주 다르가와 재혼한 그녀는 세 명의 자녀를 낳아 키우지만 전남편에게서 얻은 아들 스티아는 예전에
세상을 떠났다. 결국 나나는 저택의 안주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늘 깊은 죄책감 속에 살며 밤마다 남편이
잡혀가거나 살해당하는 꿈을 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깨곤 한다.
그녀의 새 남편은 늘 나나의 미모를 칭찬하지만 거의 매일 그의 정부들에게서 방문해 달라는 편지를 받는데 때로는 나나가 그 편지를 받아
전달해 주는 굴욕적 상황을 겪기도 한다. 나나는 지주 집안의 풍족함을 누리지만 남편의 너무나 자명한
외도를 알면서도 참아야 하고 다른 여인들과 차모임을 하면서 듣기 싫은 뒷담화와 오만한 조언을 견뎌야 한다.
나나의 행복을 우선시한다는 남편도 정작 15년전 죽은 줄 알았던 나나의 전남편이 공무원이
되어 나타나고 나나가 전 남편에게 돌아갈 의사를 표하자 미묘한 반응을 보인다. 자유롭게 외도를 즐길 수
있게 된다는 기대와 자기 사람을 내주는 것에 대한 기껍지 못함이 뒤섞인 마음.
그 과정에서 남편의 정부 중 한 명인 이노를 알게 된 나나는 털털하고 당당한 성격의 이노와 급격히 가까워지며 의지하게 된다.
대략 이렇게 흘러가는 스토리라인은 일견 좀 진부하다 느껴지지만 몽환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화면,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팽팽한 긴장을 더욱 잘 느끼게 하는 배경음악에 푹 빠지게 된다. 특히 등장인물들의 절제된, 그러나 그 감정을 잘 드러내는 연기는 너무나 설득력 있어 공감하게 된다.
단지 영화의 시대적, 공간적 배경에 대해서는 오해나 혼선의 여지가 있어 인도네시아인조차
어느 정도의 역사적 사전지식이 없다면 상황의 전개를 조금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영화의 ‘현재’는 1965-66년이다. 영화 중간에 나오는 라디오 뉴스에서 수하르토가
부상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에서 그러한 시대적 유추가 가능하다. 이때 나나는 다르가와 혼인한 지 15년이 흘렀다. 나나가 아버지 집을 떠나 도망나온 후 바로 다르가를
만나 결혼하진 않았을 것이므로 영화 초반의 숲속 도망 장면은 1950년 전후가 된다.
1965년 10월 1일 새벽에 자카르타에서는
흔히 ‘9.30 사태(G930S PKI)’라 부르는 쿠데타가
벌어졌다. 일반적으로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소장파 군인들이 반공 장성들을 대거 살해하면서
시작한 수카르노의 친위쿠데타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당시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을 싸고 돌면서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와 각을 세우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 쿠데타가 실패하고 살해된 장성들의 처참한 시신들이 폐우물에서 인양되는 것을 본 인도네시아인들은 전국적으로 공산당 사냥을 벌였는데 이 시기에
공산당이 아니면서도 잘못된 제보나 시기, 음모에 휘말려 학살된 사람들이 최소 50만 명, 최대 3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나가 시장에서 정육점을 하는 이노를 처음 찾아간 것은 그런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던 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실제 학살장면이 나오진 않지만 나나의 오래 전 트라우마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특히 사람들은 여자의 몸으로 고기를 잘라 파는 당당한 이노가 아마도 공산주의자일 것이라고 수근거리기도 한다.
당시 그렇게 몰려 학살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나나가 나쁜
마음을 품었다면 그녀를 공산당으로 몰아 공산당 사냥꾼들 손에 넘겨주는 건 매우 쉬운 일이었을 터다. 그래서
영화 속 이노의 당당함은 사뭇 인상적이고 남편의 정부인 이노를 적대시하지 않고 의지할 상대로 여기는 나나의 마음도 되짚어 보게 된다.
나나가 숲 속에서 도망치던 시기가 1950년 이전이라면 아직도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이던 시기다. 당시 서부자바는 네덜란드군이 지배하던 지역이었고 수카르노의 신생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임시수도를 중부자바 소재 족자에 두고 중부-동부자바와 수마트라 일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 시기에 공화국 정규군은 모두 공화국 지역으로 물러난 상태였고 네덜란드 지역인 서부자바, 즉
순다 지역에는 깊은 산속에 근거지를 둔 공화국 측 유격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양칠성 등 일부 조선인
청년들이 일본군과 함께 귀순해 독립군에 입대해 싸운 것으로 알려진 서부자바 가룻 지역의 빵에란 빠빡 부대(Pasukan
Pangeran Papak)도 그런 유격대들 중 하나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민간인을 습격해 사람을 죽이고 부녀자를 잡아가 첩을 삼는
도적떼’ 는 당연히 네덜란드군일 리도 없지만 현재 인도네시아인들이 모두 칭송해 마지 않는 공화국 유격대일
리도 없다. 공화국 유격대를 ‘도적떼’ 취급했다면 이 영화야말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 말고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세력 중엔 다룰 이슬람(Darul Islam)이란 이슬람
근본주의에 가까운 무슬림 전사들의 부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나중에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후엔 네덜란드 식민종주국이 아니라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60년대 중반을 지나서야 완전히 소탕된다. 이른바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래서 숲 길에서 머스짓(모스크)에 기도하러 가는 마을 노인에게 접근해 목을 베는 이른바 ‘도적떼’가 다룰 이슬람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럼 이들은 독립전쟁 중 네덜란드군과의 2차 휴전이 진행되고 있던 1948년 9월에 동부 자바 마디운(Madiun)에
공산국가 수립을 선포하고 수카르노의 공화국 정부에 반란을 일으킨 이른바 ‘마디운 사태’의 공산당 잔당이라 보는 게 타당하다.
마디운 사태는 주동자인 무쏘(Musso)가 사살되고 전 총리 아미르 샤리푸딘 등 잔당들이
체포되는 1948년 12월까지 3개월 가량 강력한 군사작전을 통해 진압되었지만 이로 인해 공화국은 내부적으로 크게 약해져 이 틈을 타 휴전을
깨고 기습을 감행한 네덜란드군에게 순식간에 임시 수도 족자가 함락 당하고 수카르노를 위시한 공화국 정부 인사 거의 전부가 나포되어 방카섬으로 유배되는
철저한 패배로 이어지게 된다.
마디운 사태 이후 정부군에게 쫓기던 공산당 잔당은 공화국 지배 지역으로만 도망다닌 것이 아니라 일부는 정부군을 따돌리고 네덜란드 지역인
서부자바 정글 속으로 스며들었는데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유격대에도 다룰 이슬람에도 붙을 수 없었던
이들 중엔 민간인 마을을 공격해 보급품을 확보하는 ‘도적떼’로
전락한 경우도 있었다.
나나의 남편을 납치하고 아버지를 죽인 이들은 그런 ‘공산당 잔당’이라 보는 게 영화의 맥락과 일치한다.
흡연
영화 속 장면들의 뛰어난 영상미, 등장인물들의 마음과 장면의 분위기를 더욱 분명하게 해주는
아름답고 유려한 음악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직접 프라임비디오에서 찾아보기를 권한다.
단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 속 언어가 순다 방언이어서 비록 인도네시아어 표준어와 영어 자막이 준비되어 있지만 정작 한국어 자막은
없어 스토리를 따라가기에 다소 어려움이 예상된다.
하지만 본처와 정부의 우정, 죽은 줄 알았던 전남편의 귀환 같이 인도네시아에서 흔치 않은
주제들을 까밀라 안디니 감독이 어떻게 다루는지 들여다보는 것도 꽤 흥미로운 일이다.
특히 정기적으로 소규모 가물란 악단과 가수를 불러 혼자, 또는 친구들과 함께 앉아 연주를
감상하는 장면, 남편의 머리를 정성들여 염색해 주는 모습, 나나가
하인들에게 둘러 쌓여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전신관리를 받는 모습 등은 마치 그 시대를 실제로 불러낸 듯 생생하고 실감난다.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독특한 것은 쉼 없이 담배를 피는 여인들이다. 영화 속 나나와 이노는
틈나는 대로 담배를 피는데 1960년대 흡연은 상류층 여인들의 특권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들의 흡연장면은 ‘라라먼둣’(Rara Mendut)이라는
인도네시아 근대동화를 떠올리게 한다. 라라먼둣은 마타람 왕국 술탄아궁 시대인 17세기의 아름다운 여인으로 전쟁에 진 영주의 빚을 담배 장사로 대신 다 갚았는데 그녀가 침을 묻혀 만 권련, 그녀가 피다 만 꽁초 담배가 더 비싼 값에 팔렸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인들에겐 담배피는 여성에 대한 어떤 피티시(Fetish)나 환상 같은 게 있는 거 아닐까 싶다. 그래서일까? 인도네시아의 여성 흡연 인구도 적지 않다.
특히 라라먼둣은 정혼자에 대한 정조를 지키기 위해 끝내 목숨까지 버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
영화에선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돌아온 전남편에게 책임을 다하려는 나나의 결심에서 옛날 라라먼둣의 결기가 투영되는 듯하다.
나가는 글
<예전, 지금 그리고 그때(나나)>라는 영화 제목을 다시 곰곰히 되돌아 보자.
예전은 1948~1951 사이 언젠가 나나가 숲길을 통해 도망가던 시절, 지금은 순다의 한 저택에서 귀부인으로 살고 있는 현재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제목이 가리키는 ‘그때’는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과거 트라우마로 남아 아직도 나나의 꿈 속에 등장하는 사건들이 벌어졌던 시기, 즉 남편이 잡혀가고 아버지와 아들이 죽던 ‘그때’를 말하는 것이리라..
우린 모두 예전에서 지금을 거쳐 미래로 가고 있지만 '그때'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이념이나 기구한 사연에 치우치지 않고 오로지 그 시대 ‘여성’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영화제 작품상을 받을 만한 영화, 그러나
그 영상미와 풍부한 은유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유료관객은 많지 않았을 것이란 한계를 납득하게 된다. (끝)
*배동선 작가
- 2018년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저자
- 2019년 소설 '막스 하벨라르' 공동 번역
- 2022년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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