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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공장(Pabrik Gula)> 관람 후기

작성일202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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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공장(Pabrik Gula)> 관람 후기


배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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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수) MOI의 Flix Cinema에서 이 <빠브릭 굴라(Pabric Gula-설탕공장)> 영화를 보았다.


3
31() 개봉했으므로 3일차 되는 날. 아직 르바란 연휴 기간이어서 사람들이 많았는데 120석 남짓한 스튜디오에 70% 전후가 찼다. 이 정도로 관객들이 많이 찬 로컬영화를 본 건 그리 흔치 않다. 영화 내용과 관객 반응을 미루어 보면 장담컨데 이 영화가 최소 300-400만 명 관객은 족히 들 것 같다.

대부분의 공포영화가 그렇듯 영화 전반부는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가 많은데 포스터 역시 그렇다. 저 위의, 두 사람이 탄 가마를 여러 사람들이 이고 사탕수수밭 한가운데에 난 길을 통해 어딘가로 가는 모습의 포스터는 이 영화의 핵심 스토리를 시사한다. 그게 그런 상징임을 영화를 본 다음에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영화는 그 점에서 성공적이다.

이것 말고도 두 개의 포스터가 더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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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포스터는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을 보여주며 영화의 내용 상당 부분을 시사하도록 구성되었지만 조금 난삽하다 싶다. 이 포스터만 제목이 <설탕공장 완전판(Pabrik Gula Uncut)>이라고 되어 있는데 오히려 오른쪽 포스터와 제목이 바뀐 게 아닐까 싶다. 오른쪽 포스터에는 반라의 여인이 한 남성 위에 올라탄 모습을 여러 원혼들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대중영화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장면이다.

특이점
그래서 시놉시스나 다른 영화평을 말하기 전에 이 영화를 보면서 조금 놀라거나 의외였던 부분을 먼저 짚어본다.

1.
연령등급의 혼선?
한국에서 영화를 본 게 30년도 전의 일이라 요즘 어떤 식인지 모르겠지만 인도네시아에서는 영화가 시작하기 앞서 영화검열위원회(LSF)의 상영허가증이 허가번호, 연령등급과 함께 나온다. 그 바로 전에 연령등급을 알리는 짧은 애니메이션이 나오는데 인도네시아에서 영화를 본 한국인은 물론 인도네시아인들 역시 이런 영상을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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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lop LSF (Lembaga Sensor FIlm) "21+"www.youtube.com 


이건 ‘21세 이상 관람가영상이다. 인도네시아 영상등급은 SU(전체연령), 13+(13세 이상), 17+(17세 이상), 21+(21세 이상) 로 나뉜다. 주민등록증(KTP)이 나오는 나이가 17세이니 17+란 청소년들은 볼 수 없는 성인용이란 뜻.

그럼 21+는 뭘까? 이건 한국의제한상영가와 마찬가지다. 인도네시아 영화인구 대부분이 젊은 층임을 감안하면 21+ 등급으로는 관객이 많이 들 리 없어 일반 영화관에서는 걸어주지 않으니 철저히 흥행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등급을 받지 않기 위해 모든 영화제작사들이 제작단계에서부터 조심하고 영화검열위원회에 영상을 보낼 때 스스로 칼질을 하기도 한다. 21+를 전문적으로 상영하는 영화관이 없으므로 21+ 영상등급 동영상을 볼 일도 있을 리 없다.

그런데 이 영화가 일반 영화관에서 17세 이상으로 둔갑하여 상영된 것이다. 즉 포장은 17+인데 알맹이는 21+였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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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I몰 플릭스 시네마에 실린 17+영화 등급. 이건 뻥. 


이건 두 말할 나위 없이 저 위 오른쪽 포스터의 장면 때문일 텐데 저 부분을 빼면 영화의 스토리가 잘 연결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쓴 편법일까? 실제로 한국이나 다른 나라 영화들에 비하면 수위가 전혀 높은 편이 아니지만 이슬람의 가치가 드높은 인도네시아에서 속옷 차림 여성을 저 정도 수위로 등장시킨 것은, 만일 저 여성이 영화 속 다른 장면에서 히잡을 걸치고 나왔다면 당장 신성모독으로 감독이 잡혀갈 일이다.

어쨌든 난 본의 아니게 속임수 상영을 본 셈인데 이게 나중에 꼭 문제가 될 것 같다. 신고해야 할까?

2.
맨 앞에 나오는 쿠키 영상 같은 트레일러
모든 예고편과 광고들이 끝나면 마지막으로 극장에 설치된 사운드시스템의 광고가 나온 후 본편 영화가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니 난 당연히 첫 장면을 보고 이 영화에 쁘릴리 라뚜콘시나가 나오나?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요즘 영화들은 시작할 때 타이틀이 나오는 게 아니라 영화가 어느 정도 진행될 때 타이틀과 제작사, 감독 등을 알리는 장면이 나오니 한동안 이 영화가 그 영화 맞나? 심지어 내가 스튜디오를 잘못 찾아 들어온 게 아닐까 해서 다시 티켓을 꺼내 확인해 보기까지 했다.

맨 앞의 그 영상이 MD 픽쳐스의 다음 작품인 <다누르 4>의 트레일러라는 것을 조금 더 지나가서야 알았다. 그럼 그렇지, 미리 확인해 본 출연자 명단에 올라 있지도 않던 쁘릴리 배우가 여기 나올 리 없다. 그녀는 <다누르> 연작 호러영화로 전성기를 맞았고 최근작 <모든 것이 멈춘 순간(Ketika Berhento di Sini)>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불은 체중을 어찌하지 못해 2024년엔 거의 활동하지 못하다가 얼마전 감량에 성공했다는 기사가 수백 개씩 쏟아지며 새삼 주목을 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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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누르 4> 1차 포스터와 쁘릴리 라뚜콘시나 배우(오른쪽) 


하지만 제작 발표회에 나온 쁘릴리는 극심한 요요현상을 겪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 인지상정이라 다 이해한다.

시놉시스와 배경
언젠가부터 로컬영화를 볼 때 영화 속 시대적, 물리적 배경과 캐릭터들의 입체성을 따지고 영화 전반에 담긴 감독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하는 게 얼마나 피곤하고 영화 몰입도를 떨어뜨리는 것인지 새삼 깨닫는 중이다.

 

그래서 왜 영화 평론가들이 재미있는 영화들의 단점들을 하나하나 꼽으며 혹평하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보면 영화가 재미없기 때문이다. 소주 한 잔 마실 때 그 안에 담긴 원료의 함량을 따지고 그걸 만든 기계 스펙, 그 회사 회장의 경영철학 같은 걸 따지지 말고 그냥 즐기며 마셔야 기분 좋은 저녁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2003년이다. 새 밀레니엄에 들어섰지만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넘은 시점, 수하르토의 철권통치가 무너진 지 5년 되던 해. 메가와티 수카르노뿌트리가 대통령으로 있던 시기다. 호러영화의 배경을 과거로 잡는 유행은 지금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다더라, 하면서 신성모독 혐의의 예봉을 살짝 피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라 보인다.

정확한 도시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동부자바에 있는 한 설탕공장에서 각지에서 모집한 계절 직원들이 공장에서 보내 준 트럭을 타고 오래된 공장건물로 모여든다. 플랜테이션의 사탕수수가 익는 계절에 임시직 직원들을 모집해 사탕수수를 수확하고 설탕공장을 가동하려는 것이다. 거대하고 오래된 설탕공장은 공장을 중심으로 주택식 기숙사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페인트 색이 바랜 건물들과 거기 고대로부터의 오랜 역사와 사연들이 괴담이 되어 켜켜이 쌓여 있다.

참고로 1990년대에 진출한 미원과 제일제당도 각각 수라바야와 빠수루안 등 동부자바 도시에 첫 공장을 세웠다. 과거 식민지 시대에도 네덜란드인들이 그곳에 플랜테이션과 설탕공장을 세운 것처럼 사탕수수, 카사바 등을 재배하기에 동부 자바가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고 노동인구 역시 넘쳐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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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1857년 세워진 구도(Goedo)의 설탕공장

1884년 세워진 슬로레조 공장, 끌라텐 공장, 마잘렝카 공장 


실제로 인도네시아에는 오래된 설탕공장들이 많다. 일부는 19세기에 만들어져 아직도 건재하지만 대부분의 다른 공장들은 노후화를 이기지 못해 결국 문을 닫았다. 이들은 하나같이 건물 중앙 또는 한쪽 끝에 설치된 높은 굴뚝이 중요한 포인트다.

 

<설탕공장>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설탕공장은 아마 그렇게 문 닫은 공장들 중 하나일 것 같다. 이렇게 그럴 듯한 장소를 섭외한 지점에서 이미 영화는 큰 설득력을 갖기 시작한다. 마치 2022년 조코 안와르 감독의 <사탄의 숭배자2: 커뮤니언>이 북부 자카르타에 버려진, 특이한 형태의 서민 아파트를 촬영장소로 확보한 것이 영화 성공의 50% 이상 좌우했던 것처럼. 대낮에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장소였다.

영화 속의 설탕공장은 온갖 장비들로 가득 차 있지만 실제로 가동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가동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지 싶다. 그런 상황을 적절한 스토리 전개로 잘 덮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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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숭배자 2: 커뮤니언>의 촬영장소로 헌팅된 북부 자카르타의 한 노후 아파트 건물 


영화 속 설탕공장은 식민지 시대에 세워졌다는 설정이다. 하지만 그곳에 터를 잡은 끄라자안 더밋(Kerajaan Demit) 즉 영적 존재들의 왕국은 고대로부터의 이어져 내려온 것이고 그 우두머리 마하라투(Maharatu)는 명칭이나 형상, 소품 등으로 보아 여성형임을 암시한다. 그녀는 강력하고 준엄하나 적당한 타협점이 정해지면 이를 마다하지 않는 존재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녀는 융통성이 거의 없고 인간과는 존재방식이 호환되지 않으므로 약정된 규칙을 어기고 선을 넘은 인간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그곳에 모여든 계절 노동자들 중엔 엔다, 라니, 나닝, 와티로 이루어진 여주인공 그룹과 파딜, 헨드라, 물요노, 드위로 구성된 남주 그룹이 있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그리 입체적이진 못하지만 일단 와티와 헨드라는 결혼을 약속한 연인 사이, <스까완 리모>에서 등산 일행을 따라붙은 지박령은 연기한 베니딕투스 시레가르가 분한 물요노와 드위는 개그 캐릭터다. 물요노는 자바인들이 가장 전통적인 이름인데 그는 자신을 프랭키라 불러 달라 우긴다. 그러려니 했는데 스튜디오 안의 다른 관객들에게서 웃음이 터졌다. 저런 코드가 통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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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 캐릭터들, 왼쪽부터 베니딕투스 시레가르, 아리프 알피안샤, 요노 바끄리, 사다나 아궁 


영화 속 경비원 라노(Rano)와 까르노(Karno)로 분한 요노 바끄리와 사다나 아궁 역시 개그 캐릭터다. 극 중 이름부터 그렇다. 두 사람의 이름을 붙인 라노 까르노는 버따위 출신 국민배우로 통하던 미남 배우의 이름이다. 그는 정치권에 들어서 땅그랑 군수, 반뜬 주지사와 국회의원을 지냈고 지난 2024 11월 지방선거를 통해 쁘라모노 아눙 당시 내각사무처장의 러닝메이트로 자카르타 주지사 선거에 나서 당당히 부지사로 선출된 인물이다. 그의 중후한 분위기와 영화 속 두 경비원의 어딘가 바보스러운 연기가 대조를 이루는 것이 웃음 포인트인 모양인데 그것도 꽤 통하는 듯했다. 난 이 나라 사람들 웃음코드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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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노 까르노 자카르타 부지사의 리즈 시절(왼쪽) 


한편 여주 엔다와 남주 파딜은 영적 감각이 예민한 인물로 이 영화의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열쇠 역할을 한다. 특히 파딜은 매일 기도시간을 빠뜨리지 않는 독실한 무슬림이다. 그렇다고 이 두 사람이 특별한 연인 사이 같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포스터의 복판을 차지한 남주와 여주 치고 실제로 획기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두 사람의 두꾼 바 사민(Mbah Samin)과 바 지나(Mbah Jinah)를 연기한 부디 로스와 데위 빠끼스의 열연이 빛나며 더 두드러진다.

이름 앞에 붙는(Mbah)’란 무당 격인 두꾼(dukun)의 이름 앞에 붙는 경칭이다.


히잡을 쓴 여인들과 독실한 무슬림 남성이 등장하는 만큼 자바 호러가 아닌 이슬람 호러로 분류되어야 하나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엔 일반 이슬람 호러영화들처럼 모스크의 교사인 끼아이나 우스탓이 나서는 게 아니라 무당인 두꾼들이 나서는 점에서 정통 이슬람 호러라 말하기도 어렵다. 대략 그 중간 어딘가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의 딜레마가 살짝 엿보이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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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꾼 바 사민과 바 지나를 연기한 부디 로스와 데위 빠끼스 


계절 노동자들이 들어와 일을 시작한 다음날부터 벌어지기 시작하는 기괴한 사망사고들, 이를 보고 터주신이 분노했다며 공장 가동을 늦추라는 공장 고문 격의 두꾼들,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일정을 늦출 수 없다고 강변하는 공장장, 그리고 파딜와 엔다의 눈과 꿈에 보이는 이상한 존재들. 그 존재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킨 원인을 찾아 해결하려 노력하는 가운데 전개된 스토리는 점차 파국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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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다 역의 에르샤 아우렐리아(왼쪽)과 파딜 역의 아르바니 야시즈 


감독의 딜레마
아위 수리야디 감독은 MD 픽쳐스가 <다누르: 나는 귀신이 보여(Danur: I Can See Ghost)>(2017)를 시작으로 이른바다누르 유니버스라는 호러 영화 세계관을 구축한 본인으로 2022년 공전의 히트를 친 인도네시아 첫 천만 관객 공포영화 <무용수마을의 대학생봉사활동(KKN di Dewa Penari)>, 2023년 유사한 테마의 자바 호러 <세우디노(Sewu Dino)> 2년 연속 로컬영화 흥행 수위를 차지한 명실공히 호러영화의 거장이다. 그러니 <설탕공장>이 비교적 매끈한 호러영화로 뽑힌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호러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겐신성모독의 혐의가 걸리는 것이 가장 위태로운 일이다. 그러니 이슬람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가상현실 속에서 스토리를 진행시키는자바 호러가 신성모독을 피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무슬림들의 공감과 호응을 이끌어 내려면 어딘가 이슬람적 요소를 넣는 게 유리하므로 숄랏 기도하는 장면, 히잡을 쓴 여성을 등장시키는 등 여러 장치를 넣지만 무슬림들이 잡귀들에게 패배하는 식으로 흘러가면 신성모독으로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우스탓들이 귀신들을 쫓아내는 천편일률 권선징악의 뻔한 결말로 치닫고 만다는 필연적인 약점을 안게 된다.

아위 감독은 다른 언론 인터뷰에서 신성모독의 오해를 일으킬 것이 두려워 자신의 영화 속엔 절대 우스탓을 소환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래서 <무용수마을의 대학생봉사활동>에서는 숄랏 기도와 히잡을 등장시켰던 그도 <세우 디노(Sewu Dino)>에서는 원초적인 자바의 고대 무속만을 보여주면서 이슬람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했다.

 

이 영화가 2023년 흥행수위에 오르긴 했지만 보통 1위 영화의 600-1000만 명 관객에 비해 400만 명 대 관객을 들이는 데에 그쳤다. 감독이 자바 호러가 문제였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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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위 수리야디 감독 


그래서 <설탕공장>에서는 다시 숄랏 장면과 히잡을 쓴 여인이 등장한다. 그리고 여기서 감독은 많은 고민을 하며 몇 가지 규칙을 스스로 정한 듯하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1.
무슬림이라고 귀신들리지 않는 건 아니다. 마음이 무너지고 믿음이 약해진 순간 히잡을 입어 자신의 신앙을 드러낸 사람조차 빙의되어 악령의 주구가 될 수 있다.

2.
하지만 무슬림들은 절대 악령에게 패하지 않고 종국에는 살아남는다. 죽는 자들은 불신자들, 또는 이슬람 신앙을 드러내지 않은 이들이다.

3.
두꾼들은 귀신을 가장 잘 다루는 인간들이지만 귀신들의 편에 선 어둠의 세력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들은 권능을 행하고 때로는 인간들을 돕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행사는 의도가 어떻든 귀신과 타협하고 부리거나 거래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파국을 맞게 된다.

이 정도는 지켜져야 이슬람과 두꾼들이 동시에 등장하는 호러영화에서 감독이 신성모독의 혐의를 피해갈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이 원칙을 철저히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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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한 귀신과 두꾼의 싸움 


귀신의 왕국과 두꾼의 역할
집의 형태를 가졌으나 사람이 오래 동안 사용하거나 살지 않으면 그곳에 사람이 아닌 것이 산다는 이야기가 인도네시아에서도 흔하다. 그래서 1998년 동남아 외환위기로 건설이 중단되었던 많은 건물들 중 끌라빠가딩의 빨라디안 아파트는 그로부터 6-7년 후 주인이 바뀌어 새로 건설이 속행되어 속속 완공되었는데 처음 입주한 주민들 중 귀신을 보았다는 소문이 꼬리를 이었다. 그중 두 동은 공사 중단 때 내장 공사만 남겨 거의 완성된 상태였는데 그렇게 집의 형태를 갖춘 곳을 오래 비워 두었더니 사람 아닌 것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괴담이 이제 거의 잦아졌으나 최근까지도 자고 있을 때 옆에 누군가 서서 계속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전해준 입주자도 있었다.

사탕수수 추수기에만 가동되는 설탕공장은 그렇지 않은 기간엔 오랫동안 비어 있기 마련이어서 영화 속에서도 공장 구석구석의 후미지고 오래된 창고들은 귀신 나오기 쉬운 음산한 장소로 묘사된다.

두꾼들은 그 지역 일대에 마하라뚜(Maharatu)라는 마물들의 왕이 지배하는 귀신들의 왕국이 있어 마하라투와의 타협, 허가를 통해 그곳에 지어진 공장을 가동시킨다. 그러니 두꾼이 공장의 상임고문으로 들어앉아 공장이 가동되는 동안 공장과 직원들의 안전을 위해 매일 굿을 하듯 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공장에서는 직원들이 퇴근하면 해가 질 무렵인 6시에 기적을 울려 경계경보를 하고 밤 9시엔 다시 한번 기적을 울려 통금을 알린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마주치지 못하도록.

흥미로운 부분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미지의 존재들이다. 할머니 귀신, 염소를 닮은 마왕 형상의 거대한 괴물, 하얀 얼굴로 달려드는 귀신, 목이 잘린 젊은 서양 여인, 총을 맨 채 자전거를 타고 기숙사 마을을 누비는 일본군 귀신, 수술용 환자복을 입고 등진 모습으로 길을 막는 여성 귀신, 그리고 앙상하게 불타 죽은 모습으로 아직도 연기와 그을음을 뿜어내며 떼로 출몰하는 예전 공장 일꾼들의 유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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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부터 그곳에 자리잡고 있던 귀신들의 왕국에 네덜란드 식민종주국 사람들이 들어와 공장을 지을 때 유입된 서양의 악마, 네덜란드 여인의 원혼, 태평양전쟁 때 들어온 일본군 순찰대원의 유령, 현대사 속에서 벌어진 화재의 희생자 등 그곳에서 유입되거나 사람이 죽어 발생한 귀신들이 모두 마하라투의 수족으로 흡수되었다는 설정인데 마하라투에겐 악의가 담겨 있다기보다 자신의 왕국에 들어오는 이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르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귀신들이 정말 있다면 그들은 정말 악한 존재일까?
아니면 단지 인간과는 존재방식이 호환되지 않으므로 악의가 있든 없든 조우하는 것만으로, 또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치명적이기 때문에 피하거나, 달래서 거리를 유지하거나, 적극적으로 퇴마하여 없애려는 것일까?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 두꾼들이 한국과 같이 영적 존재의 뜻을 전달하는 영매의 역할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귀신들과 거래하여 원하는 바를 이루도록 타협하는 것이며 그것이 절대 공짜가 아니므로 정당한 대가를 치르는 거래형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영화는 시사한다.

 

문제는 정당한 대가라는 것이 대개의 경우 원하는 바를 귀신을 통해 이루려는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두꾼이 하는 일은 일반인이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귀신을 식별하고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귀신과 모종의 거래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거래 당사자가 되는 만큼 자신의 생명을 귀신에게 요구의 대가로 내놓아야 하지만 자신의 목숨도, 의뢰인의 목숨도 내놓지 않고 그 대신 가축 제물로 가름하거나 귀신을 속여 목숨을 바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 두꾼이 하는 일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에서 용한 두꾼들은 기적적인 일을 행해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들이 그를 무서워하고 경원해 대개 숲 속에 초막을 지어 살거나 외딴 곳에 떨어져 살게 되는 것은 귀신도 속이는 두꾼들이 사람들을 속여 그 목숨을 부지불식 중에 귀신들에게 제물로 바치지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중세시대의 사람들이 마녀들을 두려워했건 것과 같은 종류의 두려움인 셈이다.

그러나 영화 속 마하라투는 두꾼들의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정당한 제물을 스스로 찾아 나설 수 있는 철저하고도 비정한 존재다. 영적 존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셈이 맞는 것이다. 문제는 그게 인간의 셈법이 아니라는 것.

이 영화 속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접신한 두꾼들이 자라난 춤(Tari Jaranan)을 추는 것이다. 자라난은 종마를 뜻한다. 즉 따리 자라난은 말춤. 마침 얼마전 인도네시아 문화부가 유네스코에 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 신청한 것이어서 특히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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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자바 뽀노로고 지역의 자라난 춤. 자란 끄빵(Jaran Kepang)이라고도 한다. 


마치며
감독의 마음과 생각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해 보면 스토리가 전개되는 상황이 뭔가 좀 이상하고 덜컹거려도 모든 게 다 이해된다.

또 다른 호러영화 거장인 조코 안와르의 작품들은 분위기나 주제가 무겁기 한이 없고 음산하고 기괴한 배경 속에서 개그를 칠 만한 상황이 거의 나오지 않는데 아위 수리야디 감독의 전작 <세우 디노>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가장 크게 히트한 <무용수마을의 대학생봉사활동>에서도 두 명의 개그 캐릭터가 나와 공포 일변도로 나가는 분위기의 강약을 조절했다. 그때엔 남주팀 3, 여주팀 3명이어서 이번 <설탕공장>과 주인공 구도도 비슷한 편이다.

그리고 이 영화도 <무용수마을의 대학생봉사활동>의 경우처럼 심플만(@simpleman)이라는 X 플랫폼에 서식하는 신비의 작가가 제공한실화바탕이라는 이야기를 공포영화 시나리오 전문 렐레  라일라(Lele Laila) 작가가 시나리오로 각색했다. 그녀는 2012년부터 MD 픽쳐스 작품들의 시나리오를 썼는데 2017년 시작된 다누르 유니버스 작품 거의 대부분의 시나리오도 그녀가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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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렐레 라일라 시나리오 작가 


그래서 <설탕공장(Pabrik Gula)>은 제작사, 감독, 시나리오팀 전체가 <무용수마을의 대학생봉사활동>과 동일한 라인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배경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감독이 고심 끝에 넣은 영화 속 이슬람 코드가 난해할 수밖에 없고 왜 인도네시아 로컬 귀신의 왕국에 서양 악마들이 등장하는지도 의아해할 것 같다.

내 점수는 7.9.
억지스럽지 않은 CG와 두꾼 역을 열연한 두 노배우, 마지막의 허를 찌르는 반전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2025. 4. 3.)

 

*배동선 작가 

- 2018년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 저자

- 2019년 소설 '막스 하벨라르' 공동 번역

- 2022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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