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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번지 없는 주막 /한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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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22-04-08 13:23 조회 17,92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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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205 >
 
번지 없는 주막
 
한상재 / 칼럼니스트 (한국문협 인니지부 고문)
 
 
어! 진짜 번지 없는 주막이네, 지난 가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수원 화성을 돌다가 ‘번지 없는 주막집’을 만났다. 진짜 번지수가 없는 집이다. 이 작은 초가집은 화서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노란색 초가지붕에 누구든지 걸터앉아 쉬고 갈만한 툇마루도 있다. 그야말로 이 집은 주막집이다. 그렇지만 주모는 없고 그저 지나가는 차만 있을 뿐이다. 나는 성문 앞의 슈퍼에서 커피 한잔을 사들고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갑자기 찬바람과 함께 ‘번지 없는 주막’을 즐겨 부르시던 아버지 모습이 스쳐간다.
 
우리 아버지는 생전에 ‘번지 없는 주막’을 즐겨 부르셨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궂은비 내리는 그 밤이 애절 쿠려” “능수버들 재질 하는 창살에 기대어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던 사람아.” “아주까리 초롱 밑에 마주앉아서 따르는 이별주는 꿀 같은 정이였소,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를 빌어도 못 믿겠소, 못 믿겠소, 울던 사람아!” 깨무는 입 살에는 피가 터졌소, 풍지를 악물며 밤비도 우는 구려, 흘러가는 타관길이 여기만 아닌데 번지 없는 그 술집을 왜 못잊느냐.“ 아버지가 부르시던 노랫말이 내 목덜미를 타고 흐른다.
 
 
그래서인지 큰 형은 이 노래가 18번지가 됐다. 이미 두 분은 작고한지 오래지만 아직도 내 머리는 ‘주막’을 찾아 헤매고 있었나보다. 이제야 그 주막을 만난 느낌이다. 툇마루에도 올랐다. 자꾸 아버지의 모습이 지나간다. 무슨 이별이 있었길래 그리 구슬프게 가락을 뽑았던 것일까. 아마도 나처럼 타관 길의 추억이 있었던 건 아닐까. 누군지 모르지만 이별주도 있었을 것이다. 뭔가 맹세도 한 모양이다. 하여간 어지러운 상상을 하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 후 어느 날 외출을 하기 위하여 거울을 보다 깜짝 놀랐다. 흰머리하며 이마의 주름까지 내 아버지의 모습과 똑같은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나를 쳐다보던 아내는 ‘나이가 드니 그런거 같다’고 퉁명스럽게 말한다. 그런데 두 다리가 가늘어 진 것도 똑같다. 그뿐만 아니다. 구부정한 허리하며 걷는 모습까지 똑 같다. 아버지를 빼 닮았다는 말은 별로 나쁘지도 않고 별로 좋게 들리지도 않는 것 같다. 그저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이려니 생각한다. 그게 인생이 아닐까.
 
우리 시골집에서 큰 길로 나가면 가요 속의 진짜 주막집과 같은 허름한 집이 하나 있었다. 그 집 앞엔 큰 노송이 몇 그루 서있어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땀을 식히곤 했다. 거기서 지나가던 사람들은 막걸리나 녹두부침개를 사서 먹곤 했다. 그 집을 우리는 ‘놈새네 집’이라고 불렀다. 그 집엔 딸 만 여섯이라 아들만 육 형제인 우리 집과 비교되곤 했는데 그 집 딸들은 일찌감치 도시로 나가고 막내딸만 남아 있었다. 그 애가 바로 ‘놈새’라는 별명의 아이다.
 
그러나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이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왔다. 그러다 어머니가 병사하시고 아버지만 남게 되자 우리 아버진 놈새네 주막을 즐겨 찾곤 했다. 주량도 줄어 2홉들이 한 병에 그저 툇마루에서 주무시는 날도 많았다. 우리 형제들도 일부 도시로 떠나자 부쩍 그 집을 드나드신 것 같다. 도시에서 만난 두 집 딸들과 아들들은 우리 아버지와 그 집 어머니의 만남을 모른 척 하자고 했다. 그렇지만 그 집 딸들은 자기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가버렸다. 그 후로 혼자 남게 된 아버지는 지난 일을 되새기며 늘 외로워하시다 갑자기 폐렴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나 내 생각엔 그 집 아주머니를 그리워하다 돌아가신 것 같다. 물론 어머니 산소를 극진히 돌보시긴 했지만 그래도 무척 외로웠던 것이 분명하다. 언제가 아버지는 ‘박정희 전집’을 사다 달라고 하셨다. 아마 외로움을 달래려고 그런 주문을 하신 것 같다. 그리고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그 친구 나보다 더 오래 살 것 같다고 했다. 근데 정주영 회장은 우리 아버지보다 일찍 작고했다. 그는 우리 아버지보다 잘 먹고 잘 사던 부자인데 나보다 먼저 갔다고 했다. 권세도 부자도 별수 없다고 하셨다.
 
어느 날 우리는 아버지의 방에 침대를 하나 사다 드렸다. ‘허참, 그거 참 일어나고 앉기 편하구만’ 하셨다. 그리곤 자신의 지난 온 추억을 쏟아내셨다. 코 흘리던 손녀딸을 업고 다니던 즐거운 때도 이야기 하시고 일제 강점기 말에 아오지 탄광에 징용으로 끌려갔다 돌아온 용감한 모습도 보여 주셨다. 특히 그때 가져온 일본제 ‘간드레’라고 하는 머리등을 자랑했다. 일본 사람들 어떻게 이런 걸 만들었는지 놀랍다고 하셨다. 또 겨울에 먹일 건초를 베기 위해 지게를 지고 산에 갈 때 어머니가 바가지에 담아주던 밥도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이렇게 저렇게 삶을 마감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아버지는 일제 합방 기념으로 지은 것으로 보이는 강화의 합일국민학교를 다녔던 기억도 즐겁다고 했다. 그 친구들이 지은 합일국민학교는 강화에서 제일가는 학교라고도 했다. 학교 이름이 일본과 합친다는 것이어서 꽤나 좋은 학교라고 알려진 곳이었다. 수원 서문 안의 번지 없는 주막 마루에 걸터 앉은지 한나절이 지나도록 아버지의 추억거리는 끊이질 않는다. 역시 나도 나이를 먹으니 어쩔 수 없이 지나온 추억을 되살리며 사는 것 같다. 흘러가는 인생을 막을 수 없는 이 대자연의 이치를 어찌 거스를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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