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마녀, 매력적인 그녀 /전현진
페이지 정보
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21-12-17 09:01 조회 15,262 댓글 0본문
<수필산책 189>
마녀, 매력적인 그녀
전현진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옛날 옛적에 얼굴이 하얗고 머리가 까만 공주가 살고 있었습니다. 공주는 매일 아침 눈 뜨고 싶을 때 일어나고, 나풀거리는 옷들을 즐겨 입었어요. 예쁜 옷이 구겨질까봐 행동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지요. 그림처럼 차려놓은 음식을 새처럼 조금씩 먹는 둥 마는 둥 했고요. 공주가 하는 일이라고는 거울 앞에서 빗질하고, 딱히 약속이 없어도 곱게 치장하는 것이었어요.
누굴 만나러 갈 때는 마차 뒤에 앉아만 있어서 어디로 가는 줄도 몰랐답니다. 햇볕에 얼굴이 그을릴까 봐 나들이도 잘 가지 않았고요, 어쩌다 물놀이를 가도 옷이 젖을까봐 보기만 했어요. 혼자서는 길을 잃을까봐 어디 갈 엄두도 못 냈지요. 공주는 예쁘다는 말만 들으면 다 좋았어요. 공주는 예쁘다고 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힘이 없었어요. 공주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착하다는 칭찬을 들으려고 얌전히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요.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공주는 웃음을 잃어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공주는 마녀를 만났어요. 마녀는 머리가 산발이고 옷도 신발도 이상했어요. 손톱 밑도 좀 까맸고요. 마녀는 아무 데나 앉고 누웠어요. 밥을 어찌나 많이 먹는지 뱃속에 다 들어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어요. 거울을 보기는 하는 건지, 치장은 고사하고 세수나 하고나온 거면 다행이었어요. 마녀의 팔다리는 햇볕에 그을려서 옷 자국이 선명했어요.
어디를 그렇게 돌아다니는지 마녀를 만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답니다. 마녀는 언제든 원할 때 물속에 뛰어들어 수영했고 모래에 파묻혀 뒹굴고, 흙 놀이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를 보냈어요. 정말이지 하루가 너무 짧았어요. 꽃향기도 맡아야 하고, 달리기도 해야 하고, 고양이도 쫓아가야 했거든요. 온종일 깔깔 웃고, 엉엉 울고, 소리 지르고, 작게 속삭일 일들이 너무 많아서 늘 땀범벅이었답니다. 마녀는 너무 시끄러웠어요.
공주는 이상했어요. 아무도 칭찬해주지 않고, 아무도 예쁘다고 해주지 않는데도 마녀는 아무렇지 않았거든요. 힘이 넘쳐났어요. 공주는 이상한 마녀가 싫었어요. 그래서 마녀가 공주에게 같이 수영을 하자고 했을 때 공주는 깜짝 놀랐어요. 마녀가 연못에 들어가자고 했거든요. 벌레도 있고, 흙도 있는 연못에 들어가자고 하다니, 정말 이상한 마녀였어요. 위험한데 말이에요. 공주는 겉으로만 웃으며 물 밖에서 지켜보겠다고만 했어요. 다이빙하고 잠수를 하고 하늘을 보며 수영하는 마녀는 정말 즐거워 보였어요. 마녀는 수영복도 없고,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웃고 신이 났어요. 공주는 멀찍이 서서 보기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어요.
‘정말 이상한 마녀야.’ 집에 돌아온 공주도 이상해졌어요. 자꾸만 수영하는 마녀가 생각나는 게 아니겠어요? 물이 차가웠는지 따뜻했는지 궁금하고, 살갗에 튀었던 물방울이 어쩐지 기분 좋았던 것 같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던 연못에 또 가고 싶어졌어요.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마녀처럼 공주도 연못에서 수영이 하고 싶어졌어요. 맨발로 걷고 싶어졌어요. 긴 풀들을 손으로 훑어보고 싶어졌어요. 못된 마녀가 마법을 걸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어요.
‘나쁜 마녀 같으니라고.’ 공주는 더듬더듬 발길을 되돌려 연못으로 향했어요. 마차도 없이 안내자도 없이 혼자 가는 길이었지만, 꼭 가보고 싶었어요. 우거진 나무가 등 뒤에서 검은 그림자를 아른거리며 뒤쫓아 오는 것 같아 무서웠어요. 그래도 연못으로 가는 걸음을 멈출 수 없었어요. 연못은 짐작했던 것보다 멀지 않았고, 어둡지 않았고, 위험하지 않았어요. 햇살을 튕기는 물결은 잔잔했고, 하늘을 가리는 커다란 나무는 바람에 흔들거리며 그늘을 만들어주었어요. 연못에 도착한 공주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 공주요? 요즘 오토바이 배웁니다. 인도네시아는 도로에 나서면 오토바이가 차만큼 많은 곳입니다. 그래서 오토바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금요일에는 바띡을 입고요. 화장 대신 미소를 장착하고 밖에 나갑니다. 오늘은 인도네시아 살롱에 가서 머리도 했습니다. 미용실에 앉아 힐끔거리는 인도네시아 아줌마에게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아주머니 머릿결이 예술인데 비법 좀 전수해 달라고요. 뒷자리 언니까지 나서서 머리에 바르는 것을 추천해주었습니다.
집에 오는 길에 화장품 매장에 들러 추천받았던 제품을 샀습니다. 수영도 합니다. 수영장에 가서 다이빙을 했습니다. 발이 패널에서 떨어지기 직전이 제일 겁나는 순간입니다. 머뭇거리는 시간이지요. 그러나 발을 떼는 순간, 무서움은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물이 내 몸을 안아 올려주면 짜릿합니다. 다시 밖으로 올라와서 또 다이빙합니다. 물줄기 따라 미끄럼틀도 타고, 쏟아지는 물에 온몸을 맡깁니다. 너무 웃어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입니다. 가져온 과일과 과자를 한 움큼 쥐고 먹는데 꿀맛입니다. 저녁에 집에 와서 밥 한 공기를 뚝딱했습니다.
도전이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맛있다고들 해서, 두리안 에스짬뿌르를 시켰는데 입맛에 맞지 않아 냉장고에 넣었더니, 냉장고 안이 다 두리안 냄새로 가득 찼습니다. 망가, 망기스, 빠빠야 등 다른 과일 향들은 좋은데, 아직 두리안은 꾸랑 쪼쪽입니다. 인도미가 유명해서 종류별로 몇 가지를 사 왔는데 이것도 반반입니다. 목 넘김이 좋은 것도 있지만, 먹다가 반도 넘게 남기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다른 종류를 또 시도해보려 합니다. 삼발, 케찹아신 소스들도 냉장고 한쪽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비가 많이 내려서 지붕에 물이 새면 뚜깡이랑 함께 지붕 위에도 올라갑니다. 소소하지만 큰 도전입니다. 동화책에서는 공주는 착하고, 마녀는 나쁘지요? 어른이 되어 다시 보니 마녀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죽은 듯 성에 갇혀 있다가 오늘일지 내일일지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왕자님만 기다리는 허연 공주보다, 자기주장 분명하고, 하고 싶은 말 똑 부러지게 하고, 갖고 싶은 것 갖고, 마법이라는 확실한 능력 있고, 빗자루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는 마녀가 훨씬 매력적입니다. 마법 주스를 만드는 창의적 탐구 정신 또한 탁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매력녀입니다. 공주도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겁니다.
누가 꼭 예쁘다고 해줄 필요는 없었다는 것을요. 내가 나를 증명하는 방법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마녀가 되기로 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하는 마녀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