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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인연 / 강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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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작성자 편집부 작성일 2021-07-02 08:42 조회 9,8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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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산책 165>
 
인연
 
강인수 / 한국문협 인니지부 회원
 
사람과 사람의 추억은 기억의 공간이 얼마나 넓고 크냐에 따라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든 소중한 인연은 그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함께 했던 추억은 해를 거듭할수록 사탕의 단물을 다 빨아내고 남는 여운처럼 달콤하고 아름답다. 지나간 시간과 공간 속에 있었던 그때의 나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내 삶의 한 역사가 되고 이야기가 된다.
 
아버지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갑자기 생각난다. 그때는 그냥 흘러들었으나 요즘은 새록새록 그리운 문장으로 마음에 남아 있다. “항상 큰 길로만 다니라우! 큰 길에서 만나는 사람과 어울리라우!” 아버지는 이북 사람이라 신기한 이북 사투리를 쓰시며 나의 귀를 흥미롭게 하셨다. 큰 길을 다니느라 좁은 길을 피해 다녔던 나는 요즘에 와서 그런 뜻이 아니었다는 걸 되새기게 된다. 큰 길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잘 사는 인연을 만들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내 나이 서른 즈음에 한 통의 편지가 미국 보스톤에서 자카르타로 날아왔다. 친구 은희의 크리스마스 카드였다. 그녀가 대학원을 막 졸업하고 자리를 잡을 즈음에 온 크리스마스카드 였는데 서로 비슷한 시기에 한국을 떠나면서 매우 아쉽고 섭섭해 하며 헤어진 친구였다.
 
 
인터넷 사정이 원활하지 않아 천리안 접속도(천리안을 아는 세대가 있다면 나와 같은 친구세대라고 말하고 싶다) 이따금 끊기던 시절 자카르타에서 받아 본 알록달록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카드는 눈물 나는 뭉클함이었으니 지금 읽어도 조르르 써 내려간 아름다운 언어들은 참 보고 싶은 인연임에 틀림없다. 내용은 이렇다.
 
 “인수야! 나는 먼 미국 땅에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릴 테니 너는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려라! 그래서 그 아름다움의 결실을 가지고 언젠가는 꼭 만나자!”
 
카드 내용을 읽고 또 읽고 한참을 들고 눈을 감고 상상했다. 매일 새벽 소복이 쌓인 눈을 뽀드득 뽀드득 밟고 교회당에 새벽기도를 가는 은희의 모습과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탔다는 이야기가 마치 옆에서 그녀가 이야기를 하듯 느껴지는 조근 조근한 말투가 글에 배어 행복한 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난다. 세월이 흘러 몇 번의 전화 통화를 하고 또 이사를 하고 우리는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옛날 연락처와 주소 전화번호도 바뀐 지 오래되어 찾을 수 없는 상황인지라 서로가 끊임없이 그리운 것은 같은 마음이라 생각이 든다. 아직도 미국에 있을 친구와 아직도 여기에 있는 나는 공간의 좌표 속에서 만나지 못하는 하나의 점으로 머물러 있으니 언젠가는 꼭 만나보리라 다짐해본다.
 
기회가 된다면 미국의 한인 커뮤니티에 연락처를 한번 수소문 해보고 싶다. 이 곳 태양이 작렬하게 타오르는 적도 땅에서 나는 얼마나 이들에게 한국의 아름다움을 전했는지 함께 이야기할 날이 조금씩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한 것도 사실이다. 제2의 고향 인도네시아에 나는 무엇을 기여하고 갈 것인가 인생의 후반부에 들어선 요즘에서야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자칫 여차하여 흔적 없이 짐을 싸고 사라져간 사람들처럼 될까 두렵기도 한 것이다. 돌아보면 많은 친구들을 만나 즐거운 한때를 보냈고 떠나는 사람들의 배웅도 많이 했었다. 간혹 페이스북을 통해 연락 오는 친구들이 아직도 자카르타에 머무냐 라고 물으면 머쓱한 대답을 한다.
 
 
한국에서의 은희와의 인연이 그리 행복했다면 이곳에서의 인연도 만만치 않은 그리움이 있다. 바로 학부모로 만났던 친구 네덜란드인 낸시. 네덜란드 학교로 처음 아이가 전학 가던 날, 족히 190센티미터 가량인 부모들의 키와 싸늘한 푸른 눈의 친구들에게 주눅이 들었을 우리 아이를 알뜰히 챙기며 그녀의 딸 줄리엣을 바짝 옆에 앉혀 쓸쓸하지 않게 도와주었다. 항상 여러 행사를 준비하면 빠지지 않고 내가 동참 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친구가 어느 날 동물보호 캠페인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카르타 커뮤니티에서 동물구조를 한다던가 돌봐주는 일을 열심히 하더니 앞마당에 동물원을 만들 만큼 개 고양이 토끼 등. 수 없는 동물들을 돌보며 구조하고 애쓰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헤이! 인수 !너는 혹시 개고기 안 먹지?” 하! 사실 나는 개고기 먹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온갖 동물을 물고 빨고 하는 그녀의 모습에 흐흑, 웃기만 했었다. 설마 내가 개고기를 먹으리라고는 지금도 그녀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아이들이 각자의 삶을 향해 떠나갈 나이가 찼을 때 우리는 짧은 점심을 먹고 서로 선물 교환을 했다. “나 곧 짐 싸.” 앗! 이제 귀국하니?“ 응 오래 있었어, 네덜란드 한 번 와라!” 나시고랭도 깡쿵도 그리울 거야, 그리고 너도 그리울 거야.” 친구는 울먹이듯 팔찌 하나를 우리 아이의 손목에 채워주었다.
 
언젠가 만나리. 아 그 언젠가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녀는 그렇게 길 잃은 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먼 유럽의 한 고향 땅에 정착했다. 요즘도 생일이면 안부 인사를 해오는 친구, 이제는 말을 데려와 키운다는 그녀의 메시지에서 자카르타시절, 열심히 뭔가를 해내며 활기찼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와의 인연에서 느낀 것은 역할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나도 이 땅에 무엇인가 이정표를 남기고 떠나야 할 것인데. 그것이 무엇일지 요즘 곰곰이 생각해본다. 친구는 가끔 우기 철에 안부 인사로 “오늘 반지르(홍수)났니?“ 라고 묻는다. “가는 길마다 반지르(홍수)야!”라고 대답하면 지긋지긋한 길 막힘과 홍수를 빠짐없이 이야깃거리로 또 한 켠의 추억을 곱씹게 한다. 글을 써 내려가다 보니 보고 싶다. 친구!
 
우리는 수많은 인연의 끈을 쥐고 살아간다. 보석이 박힌 귀한 줄도 있고 살며시 놓아버려도 아깝지 않은 그저 그런 인연의 줄도 있다. 어찌 모든 인연이 다 보석 박힌 줄이겠나마는 잡고 있는 끈이 단단히 당겨지는 느낌이 드는 사람은 시간과 공간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연결고리에서 서로의 아픔도 느끼고 행복도 느낀다고 생각한다. 피천득님의 수필 “인연”에서 처럼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는 인연일지라도 마음의 그 줄을 단단히 잡고 있다면 삶은 우리를 지루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기억의 서랍은 끊임없이 추억의 이야기를 내보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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